앞의 글에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나오는 인언견언(因言遣言)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보통 하는 말은 그 말 자체의 뜻을 내세우는 그런 말이다. 하지만 인언견언의 말은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을 이미 전제하고 풀어내는 말이다. 그 말을 팽개칠 수 있어야만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한 셈이 된다. 흔히 듣는 손가락과 달의 이야기가 바로 이를 위한 비유이다. 저기 달 좀 보라는 뜻으로 치켜세우는 손가락은 손가락 그 자체를 내세우기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다. 손가락을 세운 뜻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손가락에서 시선을 거두어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달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달을 본 사람에게는 손가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손가락의 주인도 손가락을 거두고, 달을 보는 사람도 더 이상 손가락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반면에, 옆 사람이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달 좀 봐라’하니 그 손가락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아, 이걸 달이라고 하는가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다. 실제로야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되겠지마는, 집개손가락을 세워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 몸짓의 의도를 모르는 어린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가 바로 그런 어린아이들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을 보면, 말과 글을 대할 때 그 어법과 문법의 틀 안에서만 뜻을 파악하려고 하는 습관이 있다. 말이나 글 그 자체를 붙들고 늘어지며 그에 얽매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경이나 논서를 보면 기껏 심각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놓고 나서 나중에는 앞에 한 말을 부인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하게 앞에서 한 이야기가 다 헛소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학교 화장실에서 본 낙서에 이런 것이 있었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직역하자면 말로써 말을 여읜다는 뜻이다. 말로는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게 말을 넘어서는 이야기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말을 한다는 뜻이다. 즉, 일상적인 분별의 구도를 넘어선 세상의 통합성, 그 불이적(不二的)인 진상은 언어로는 도무지 온전하게 표현하고 전달할 길이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주제이지만, 그게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하자니 어쩔 수 없이 언어에 의지한다는 뜻이다. 또는, 일단 말을 제대로 잘 알아듣고 나아가 마침내는 그 말에 다 담을 수 없었던 언어 너머의 메시지까지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겠다.
“아래 명제는 참이다”라고 써놓고는, 그 아래에다가는 “위의 명제는 거짓이다”라고 써놓았다. 아마 논리학 강의에서 모순율에 관해서 배우고는 재미있어서 그런 낙서를 해놓은 모양이다. 불교의 경론에서 자기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도 마치 그런 양상이다. 그 낙서의 두 명제를 모두 참이라 여기고 그 두 문구 사이에서만 눈길과 의식이 오가다보면 왕복에 끝이 없다.
그런 낙서를 해놓은 의도와 정황을 짐작하기에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고 그냥 피식 웃고 눈길을 거두어버린다. 종교언어를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적인 가르침을 풀어내놓는 그 체험의 경지를 우리가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 그 자체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만 맴도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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