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선불교의 구호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어떤 연유에서 언어를 불신하는지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이쯤에서 그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하고 다음 대목, 즉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넘어가보자. 어차피 이 대목에서도 언어문자에 대한 선종의 태도가 계속 거론될 것이다.
언어문자를 넘어서는 종교적인 체험도 남에게 전달하려면 어차피 언어문자에 담아 표현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언어문자만이 유일한 표현 수단은 아니다. 몸짓이나 표정만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음악으로, 심지어는 침묵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체험과 생각을 남에게 표현하는 일차적인 수단은 역시 말과 글이다. 논리와 조리를 갖추어 말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인간 특유의 아주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때로는 몸짓, 표정, 음악, 침묵이 말이나 글보다 훨씬 간단하고 강력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음을 표현할 때, ‘나 화났어’라는 말보다는 화를 내는 몸짓과 표정이 훨씬 간단하고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적어도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전하려면 말이나 글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래서 여러 성인들이 말과 글을 불신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과 글을 동원하여 가르침을 편 것이다.
그런데, 종교체험을 전달하는 데에는 말과 글의 논리와 조리가 오히려 함정이 될 수 있다. 지난주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손가락만 바라보고 달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습관에 젖어있다. 여기서 손가락은 말과 글을 비유한다. 우리는 말과 글에 매달려서 그것만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따지느라 분주하다. 심지어는 말과 글 그 자체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떠받드느라 바쁘다. 그러다보니 정작 성인이 그 말과 글로써 억지로 표현한 종교체험의 경지는 관심 밖으로 밀어놓기 일쑤이다.
이 연재의 앞부분에서 일찌감치 언급한 적이 있듯이, 불교의 역사에서도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선종은 이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경전을 해석하고 여러 경전의 취지를 비교하며 그 위치를 가늠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선종은 모두 한 마디로 교종(敎宗)이라고 싸잡아 불렀다. 그리고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 즉 깨달음의 체험은 경전의 글귀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글귀로 표현된 가르침, 즉 교(敎) 이외에 별도로 전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교외별전, 즉 ‘가르침 밖에서 따로 전한다’는 구호가 나온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통해서 전달되는가? 교외별전이라는 개념과 흔히 함께 붙어 나오는 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쓰는 익숙한 말이다. 직역하자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는 뜻이겠고, 대개는 굳이 말이나 다른 수단을 통해 표현하지 않아도 속마음이 전달되어 서로 알아준다는 뜻으로 쓴다.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다. 흔한 정도가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엄청난 양의 의사소통이 이심전심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인 깨달음의 체험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리송하다. 어찌하여 그게 가능할까?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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