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37. 불립문자(不立文字) 10

수선님 2018. 8. 26. 12:28


우리는 의사전달을 위해서 말과 글뿐만 아니라 각종 소리와 기호, 몸짓 등 온갖 도구를 편리하게 사용한다.
 
인류가 갖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영장 노릇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 크다. 경험과 지식을 널리 공유하고 대대손손 전달하며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개체, 한 세대가 각자 직접 체험으로 학습하여 얻는 지식만으로 환경에 근근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축적된, 그리고 다른 개체와의 의사소통으로 얻게 되는 간접 경험, 간접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뛰어나고 정교한 의사소통 수단은 역시 말과 글이다. 그러나 말과 글조차 완벽한 의사소통을 이루어내지는 못한다는 이야기를 누누이 하였다. 매우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라고 생각될 것이다. 의사소통의 원천적인 한계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한계는 대화의 주제, 환경,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정도로 나타난다.
 
가령 내가 가구점에서 물건을 고르면서 어떤 의자를 가리키며 “이건 나무네!”라고 하니까 바로 옆에 있던 점원이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하자. 그때 “나무”라는 말은 목재라는 뜻이지 산이나 정원에 자라는 소나무, 참나무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대화 당사자들이 굳이 해명을 주고받지 않아도 된다. 두 사람이 같은 물건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옆방에서 누군가가 “이건 나무네!”라고 내게 말을 걸어오면, 그 말만으로는 그가 목재로 된 어떤 물건을 보고 그러는 것인지, 다른 무엇을 보고 그러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까 의사소통이 그나마 가장 쉽고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경험과 지식, 언어 습관을 많이 공유하는 당사자들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물건을 놓고 얘기할 때이다. 그런 현장에서 멀어질 수록 의사소통이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의사소통은 말 그 자체, 글 그 자체만으로 저절로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제와 환경, 맥락에 따라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는 대개 말과 글의 그러한 한계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도 그럭저럭 넘어간다. 그래서인가, 우리는 말과 글을 적절한 정도보다 훨씬 지나치게 신뢰하고 그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언어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말과 글은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 의식에 틀을 지우는 힘을 가지기도 하기 때문일 터이다.

 

주제가 추상적인 것이나 내면의 체험으로 갈수록 의사소통이 정확하게 되기가 어렵다. 특히 세상의 통합성에 대한 내면의 체험, 즉 불이적(不二的)인 체험을 온전히 말에 담아 전달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어법의 틀 자체가 이미 분별적이기 때문이다. 분별을 바탕으로 해서 작동하는 어법을 구사하여 분별을 넘어서는 체험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주제이다. 언어도단이라고 하면 일상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뜻으로 쓰지만, 워낙은 말의 길이 끊겼다,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문구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말의 길이 끊겼다,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고 함은 곧 분별의 틀을 가지고는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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