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38. 불립문자(不立文字) 11

수선님 2018. 8. 26. 12:29


앞의 글에서, 세상의 통합성, 즉 불이적인 이치에 대한 내면의 체험은 언어로는 온전하게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예 침묵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유마힐(維摩詰)이 무생법(無生法)에 대해 침묵으로 설법한 것이 유명한 한 예이다. 그 자리에 있던 청중 5천 명이 그 침묵의 설법을 듣고(?) 무생법을 깨쳤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경우에도 그 유명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설법 이야기가 전해진다. 말 대신에 몸짓으로 설법한 셈이다. 그 설법을 가섭이 알아듣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는 언어문자를 통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심지어는, 언어문자를 통하지 않아야 제대로 전달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언어문자는 전하려는 내면의 체험을 온전하게 담지 못하며 왜곡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과 문자가 얼마나 여러 가지인가? 어떤 하나의 언어로 말한 것을 가지고 다른 언어로 옮길 때에 또 한번 대대적인 왜곡이 일어난다.

 

부처님은 원음(圓音) 즉 완벽한 소리로 설법을 하였기 때문에 청중이 잘못 알아듣는 일이 없었고 심지어 개미나 벌 같은 미물들도 다 알아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언어의 한계를 심각하게 여기는 문제의식이 거기에 깔려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는 결코 모든 중생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인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원효대사가 어느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부처님이 원음으로 설법한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그 말씀을 제각각 이렇게도 이해하고 저렇게도 이해하여 서로 다른 주장이 난무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뜻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 다양한 주장들의 취지와 의의, 시비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다. 그 작업이 바로 화쟁(和諍)이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온 매체는 경전이다. 불교 경전은 석가모니가 입적한 직후 제자들이 모여서 글로 적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생시에 늘 바로 옆에서 수행하며 그 언행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아난(阿難) 존자가 구술하는 것을 오백 명의 아라한이 받아 적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의 첫 구절인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구절에서 ‘나’라는 이가 바로 아난이다. 하지만 문헌학에서 밝혀낸 바에 의하면 불교의 경전이 다 그 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수백 년에 걸쳐서 각자 다른 때에 만들어졌다. 일단 만들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첨삭가필 되었다. 심지어 가장 초기의 경전이라는 빨리어 경전 가운데에도 어떤 것은 서기 5세기에 와서야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형태로 최종적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경전의 문구 가운데 얼마만큼이 석가모니의 육성을 충실하게 담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경전을 불신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숱한 사람들의 손을 타고 우리에게 전해진 경전은 불교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이해하고 전하려는 그 사람들의 노고를 담고 있어서, 그 자체가 고스란히 불교라는 종교의 역사를 형성해왔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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