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서, 글이라는 시각적인 장치는 의식을 분절화시키고 타자화하는 속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사실상 글뿐만 아니라 말도 그다지 마땅한 것은 아니다. 인간 정신의 내면적인 체험, 특히 세상 만유의 궁극적인 통합성에 대한 의식을 표명하고 전달하는 데에는 말 또한 기본적으로는 글이 지니는 한계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우선, 전에도 언급했듯이 말도 사상(事象)의 분별을 기본적인 속성으로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이 통하려면 어법(語法) 즉 말을 의미 있게 하는 법칙에 따라야 한다. 그래도 모든 체험을 어떻게든 말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을 알게 되고도 그것을 발설하지 못해서 병이 난 이발사 얘기도 있다. 그래서 도무지 말로는 적절하게 다 담아내지 못하는 내면의 체험도 어떻게든 말에 담아내려고 하는데, 일단 그렇게 발설된 말은 이미 말한 사람의 바깥으로 달아나가 그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사상(事象)이 된다. 내면의 체험이 외면화해서 타자화(他者化), 객체화되는 것이다. 이것도 말과 글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기본적인 속성이다. 하지만 그래도 말은 글에 비하면 부작용이 좀 덜하다. 말이 오가는 현장에는 사람과 사람이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현장에는 글과 읽는 사람만 있으면 된다. 글을 쓴 사람은 없다. 사람과 사람의 대면이 아니라 글과 사람의 대면이다. 글은 그것을 쓴 사람의 밖에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객체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그래서 불이적(不二的)인, 즉 통합적인 세계관의 내면화를 강조하는 고전종교의 입장에서는, 그 이상을 표명하고 전달하고 달성하는 데에 글이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어떤 말이 듣는 이에게 의미 있게 전달되려면 적절한 분별을 담아야 한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하는 모든 명제는 분별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분별은 듣는 이도 동의할 수 있는 분별이어야 한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미 어느 정도 합의가 되어 있는 분별의 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그리고 지식의 세습을 통해서 여러 가지 분별의 틀을 공유한다. 그것을 흔히 상식이라고 부른다. 어떤 말이 듣는 이에게 의미 있게 전달되려면 그 상식의 틀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면의 체험, 특히 일상적인 분별의 틀을 넘어서는 경지의 체험을 온전하게 말에 담아 전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듣는 사람에게는 그 말을 한 사람과는 별도인 또 하나의 독자적인 객체로서 그 말이 다가온다. 말한 사람의 의도나 내면의 체험과는 별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해도 생기고 심지어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는 일도 생긴다.
그러나 말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떠나 별도의 독자성을 가지는 정도가 글보다 훨씬 덜하다. 말을 주고받는 현장에서는 그래도 사람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고전 사상과 종교의 태두들이 평생 말씀은 무척 많이 했으면서도 글은 남기지를 않은 것도 그런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세간의 상식적인 틀에 가둘 수 없는 내면의 불이적인 체험이지만 어차피 표현하고 전달은 해야 하겠지만, 글은 그 부작용이 너무 심하여 기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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