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권의 화엄경 강설, 책이 나오다
“오늘 화엄경 강설책이 나왔다. 한 권 챙겨라.” 하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잘 왔다. 오늘 중요한 날이야.”라고 스님들에게도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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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딱 쥐어지는 아름다운 화엄경 책이 담앤북스에서 나왔다.
경전 원문의 글씨체며 글자간의 간격까지 일일이 큰스님께서 편집팀과 상의하며 만들고 싶어서 이번에는 그동안 눈여겨 보셨던 부산의 출판사에 출간을 맡기셨다고 했다.
큰스님은 책이 마음에 들게 나왔다고 기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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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이렇게 하는 것은 그때 그때 좋은 내용도 많을 수 있는데 건성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번역하고 부연설명하고 하다보니까 내 공부가 깊어진다.”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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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은 벌써 원고를 화엄경 19권째를 쓰고 계셔서 이번에 첫번째 다섯권을 출간한 출판사에서 큰스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셨다.
맨처음 화엄경을 출간하기로 하면서 그 많은 분량을 어떻게 나누어 책을 만들까 고민하시다가 전통적인 방식인 80권(卷) 분량으로 책을 만들고 마지막에 보현행원품 한 권을 덧붙여서 81권의 화엄경을 출간하기로 하셨다고 말씀해주셨다.
원래 전통적으로 두루마리를 펼치기 좋은 만큼의 분량이 한 권이라고 하셨는데, 새로받은 2014년의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1권 역시 손에 딱 쥐고보니,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손을 잡은 듯 편안하고 기분 좋은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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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첫 시작이지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1권>으로서는 어쩌면 큰스님의 마지막 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어쩌면 진심을 다해 화엄경을 공부할 가장 좋은 순간이자 가장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앞으로 80권의 화엄경이 다 출간될 때까지 큰스님은 한권씩 한권씩 화엄산림 법회에 나온 스님들께 책을 공양하실 생각이라고 하셨다. 순례자의 여권에 스탬프를 찍듯 부산의 화엄산림 법회에 오시는 스님들은 번호가 늘어가는 화엄경 책을 선물 받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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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이 마비가 되어서 큰 글씨 몇 자 쓰는 것 밖에는 글씨를 못써. 마비된지 35년인가 그렇게 되었어. 손이 아주 어둔해. 그 덕택에 우리나이에 컴퓨터를 일찍 접하게 됐지. 그러니까 아픈 것에도 공짜가 없어. 아픈 데 대한 대가라고 할까 보상이라고 할까. 틀림없이 있어.
그런데 그걸 못 챙기는 사람은 못챙기고 자기 보상을 챙기는 사람은 챙기지. 내가 아파서 화엄경 할 수 있었던 거야.”
초고를 컴퓨터로 쓰시느냐는 질문에 큰스님께서 대답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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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있을 기자간담회를 위해서 출판사 홍보팀과 여러 매체의 종교전문기자들이 법문이 열리는 문수선원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七
初發心功德品 第十六
七. 法慧菩薩의 重頌
여러분들과 화엄경만 공부한지도 4년이 넘어가고 있는 이 인연으로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1권이 그 결실로 나왔다.
인터넷 까페 <염화실>에 매달 강의하는 화엄경 강의가 그대로 올라가긴 하지만, 대개 현전대중을 우선으로 생각하면서 강의가 끝나다 보니까 강의가 1회적으로 끝나는 감이 있었다. 그래서 두고두고 화엄경을 공부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강설집을 집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현행원품까지 81권을 책으로 낼 생각이다. 이 큰 불사(佛事)가 나에게는 나름으로 해인사 절하나 짓는 이상의 원력과 뜻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과 함께 매달 이렇게 화엄경을 공부한 것이 원동력이 되어서 이렇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집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81권을 다 발간할 때까지 매달 한 권씩 여러분에게 강설집을 나눠 드릴 생각이다.
우선 오늘 1권을 나눠드리니까 화엄경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점안식을 하겠다.
점안식은 다른 불교행사와 좀 다르다.
번잡하게 할 것이 아니라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4페이지 <서문> 을 큰소리로 함께 읽는 것으로써 점안식을 대신 하겠다.
서 문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두가 부처님의 법신이요,
들리는 소리나 들리지 않는 소리나
모두가 부처님의 설법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젊은 시절에 왕궁을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6년간 수많은 스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숱한 고행(苦行)을 하였습니다. 고행을 하시다가 마지막으로 부다가야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서 7일간 바른 선정(禪定)에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루었습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정각을 이루시어 드디어 여래(如來) 응공(應供) 불(佛) 세존(世尊)이 되시어 그 자리에 앉으신 채로 21일간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80권이나 되는 방대한 내용으로 남김없이 설파하셨으니, 이것이 곧 화엄경(華嚴經)이며 불교의 첫 출발입니다.
그러므로 화엄경은 불교의 수많은 경전(經典) 가운데 최초로 설해진 경전이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내용을 추호의 방편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보이신 가르침이며, 인류가 남긴 최고의 걸작(傑作)입니다.
다행히 이와 같은 위대한 가르침을 만나서 몸과 마음을 다해 공부할 수 있는 인연이 되었습니다. 이 소중한 화엄경 공부의 인연을 많은 법우(法友)님들과 함께하고자 하나하나 천착(穿鑿)하며 강설(講說)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화엄경 공부는 금세기 최고의 축제(祝祭)며, 누구에게나 인생 일대에 참으로 크나큰 행복이요 더없는 영광입니다.
부디 이 아름답고 복된 인연에 동참하시어 인생으로 태어난 보람을 한껏 누리시기를 권선(勸善)하는 바입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2014년 1월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불교는 참으로 매력적인 종교다. 그 심오한 가르침의 내용은 그만두고라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미술이라든지 조각이라든지 음악이라든지 세계문화에 자랑할 만한 훌륭한 내용들이 참으로 많다. 그 수 많은 불교의 내용들중에서 나는 석굴암 부처님도 아니고 해인사 8만 대장경도 아닌 화엄경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첫손가락을 꼽을 부처님의 위대한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곧 화엄경이다. 그래서 우리 공부는 <금세기 최고의 축제 화엄경강설>이라고 표현한다.
스님들과의 화엄경 공부는 10년을 잡았지만 신도님들은 <화엄경강설 만일결사> 라고 하였다.
말로만 강의하고 듣는 것으로 끝나기에는 너무나 아쉬워서,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은 많지만 내 힘이 닿는데 까지 이렇게 책으로 정리해서 남기기로 했다.
그래야 두고두고 오래 갈 것이고 앞으로 화엄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길잡이가 되고 안내서가 될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나는 겁없이 80권이나 되는 이 화엄경 강설을 써 나가고 있는 중이다.
흔히 80화엄이라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이것은 내용이 아닌 분량에 따른 나눔이다.
나 역시 화엄경 강설을 쓰면서 책의 분류를 어떻게 할까 고민 하다가, 전통적인 권수에 맞춰서 화엄경 강설을 출판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책이 앞으로 끊임없이 나와서 80권 화엄경과 보현행원품을 합쳐 총 81권이 출판될 것이다. 지금 벌써 다섯 권이 나왔다.
81권이 끝날 때까지 나는 스님들에게 매달 한 권씩 화엄법회 때마다 법공양을 하리라고 생각 하고 있다. 여러분도 결석하지 마시고, 빠진 도반들을 데리고 오고, 꾸준히 나오셔서 80권을 채워서 소장본으로 절에 모시기 바란다. 전통 법당에는 으레 부처님 옆에 경을 모시게 되어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기도 하고, 공부하는 교재로도 삼는다. 스님들이 법회 할 때, 손에 뽑히는 것 한 권을 뽑아서 그날 법회에 사용한다 하더라도 최소한도 81회를 강의를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이 한 권을 세 번 정도로 나눠서 법문 한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강의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참 엄청난 일이다.
나는 여기 스님들과 신도님들 해서 600권을 매달 법공양을 올리고, 전국 본사와 비구니스님들 4대 강원과 비구니 스님의 총무원인 법룡사와 봉은사까지 각 열권씩 해서 거의 1000부를 매달 개인의 힘으로 법공양한다. 화엄경 강설을 써서 빚을 지게 생겼다. 그렇지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행복한 일이고 영광스러운 빚이고 자랑스러운 빚이다.
출판사에서 동참 신청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보시고 스님들이 한 사람이 열권씩을 신도들에게 법공양을 하든지, 100권씩을 하든지 50권씩을 하든지 각자 힘 있는 대로 법공양을 하면 좋겠다. 여기와서 공부만 할 것이 아니고 공부한 것을 나눌 수 있으니까 얼마나 복된 일인가. 화엄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펴는 일이니까 스님들에게도 큰 복을 짓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내가 늘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 공양 중에 제일가는 공양은 법공양이다. 쌀이든 돈이든 꽃이든 과일이든 부처님이 자시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이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법공양이다. ‘법공양이 부처님의 식성이다’ 라고 경전에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말 한 마디만 믿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경집이라든지 또 <염화실>이라든지 인연 닿는대로, 내 능력이 닿는 대로 법공양을 하고 있다.
여기 스님들이 100여명 이상 공부하러 오는데 이 중에 한 두 사람만이라도 나와 같이 법공양에 대한 발심을 한다면 큰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하면 힘들고 부담스러우니까 스님들이 힘닿는 대로 최소한도 열부 이상씩만 법공양하면 아마 이 세상에, 최소한도 우리나라에 화엄경이 많이 펼쳐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여기 연락처가 있으니까 스님들이 절에 돌아가셔서 깊이 심사숙고해서 ‘나도 한 번 이러한 원력에 조금이라도 같이 동참해 보겠다’는 마음이 난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13, 諸苦消滅
菩薩具足妙智光하야 善了因緣無有疑라
一切迷惑皆除斷하고 如是而遊於法界로다
魔王宮殿悉摧破하고 衆生翳膜咸除滅하며
離諸分別心不動하야 善了如來之境界로다
三世疑網悉已除하고 於如來所起淨信하야
以信得成不動智하니 智淸淨故解眞實이로다
爲令衆生得出離하야 盡於後際普饒益호대
長時勤苦心無厭하며 乃至地獄亦安受로다
福智無量皆具足하고 衆生根欲悉了知하며
及諸業行無不見하야 如其所樂爲說法이로다
了知一切空無我하고 慈念衆生恒不捨하야
以一大悲微妙音으로 普入世間而演說이로다
보살이 묘한 지혜 광명 갖추고
인연법을 잘 알아 의심 없으며
온갖 미혹 모두 다 끊었으므로
이렇게 온 법계에 두루 다니고
마왕의 궁전들을 부숴버리고
중생의 어두운 무명 모두 제멸해
분별을 떠났으매 마음이 부동하여
여래의 묘한 경계 분명히 알고
삼세의 의심그물 이미 제하고
여래에게 깨끗한 신심을 내어
부동하는 지혜를 이루었으며
지혜가 청정하매 이해도 진실하네
중생들 생사에서 뛰어나와서
오는 세상 끝나도록 이롭게 하며
오랜 세월 애를 써도 싫은 줄 몰라
지옥에 이르러도 평안히 받네
한량없는 복과 지혜 모두 갖추고
중생의 근성 욕망 모두 다 알며
모든 업과 행동을 죄다 보고서
그의 욕락 따라서 법을 말하며
온갖 것이 '나'가 없어 공한 줄 알며
중생들을 생각하여 버리지 않고
한 가지 자비하고 미묘한 음성
세간에 들어가서 연설하도다
*
제고소멸(諸苦消滅) :모든 고통의 소멸
*
발심의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초발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사실 오늘 화엄경 강설 1권이 나온 것도 이렇게 처음 시작했으니까 일종의 초발심이다.
내가 이렇게 마음먹고 시작을 하니까 어떤 스님은 ‘저 사람 건강도 안 좋은데 80권이나 되는 책을 지금 시작해놓고 어떻게 할 것인가?’ 염려하기도 했다.
‘원고를 얼마나 썼느냐’고 전화로 질문도 해 온다.
‘지금 17권 째 쓰고 있다’고 하자 ‘아 그러냐?’고 마음을 놓더라.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다 초발심 덕분이다.
불교 역시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하는 부처님의 초발심을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그 혜택이 오게 되었다. 초발심의 중요함을 경전에서도 누누이 이야기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만히 생각해봐도 그 공덕이 대단하다. 이곳에서 여러 스님들과 함께 6년째 법화경,임제록, 화엄경까지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6년이라는 세월을 빠짐없이 오시는 분들도 많이 있다. 우리들의 이러한 공부도 처음 발심해서 어느새 이와 같이 이르게 됐다.
뭐든지 첫 마음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 아도화상이 처음에 불교를 전했다. 그 스님이 한국에 불교를 전하겠다고 하는 첫 마음, 한 마음을 일으킨 덕택에 오늘날 우리나라에 불교가 이렇게 전해졌다.
무수한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불교에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누리게 되었다.
멀리는 부처님의 첫 발심이고, 다음에는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해준 스님의 첫 발심이고, 또 가까이로는 여러 스님들이 처음 불교에 입문하겠다고 하는 그 첫 마음, 그 초발심이 오늘날 여기 까지 와서 스님들이 화엄경을 공부하게끔 만든 것이다.
세속의 경우 남녀가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겠다고 하는 첫마음 때문에 한 가정이 이루어진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들 부모가 서로 만나서 가정을 이루겠다고 하는 그 마음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
첫마음이 소중하다.
다음달 쯤 되면 원고속도가 강의를 앞서갈 텐데, 나는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의 원고를 쓰고 있다.
‘첫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만치 참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첫마음을 잘 못 일으키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되고, 또 반대로 아주 좋은 길로 들어서게도 된다. 여기 제목에서 발심의 결과로 여러 가지 고통을 소멸한다고 나와 있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발심에는 어마어마한 공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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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구족묘지광(菩薩具足妙智光)하야 : 보살이 아름답고 미묘한 지혜의 광명을 구족한다. 이것이 무엇이겠는가.
선요인연무유의(善了因緣無有疑)라 : 인연을 잘 아는 것이다. 미묘한 지혜의 광명을 구족해서 결과적으로 인연을 잘 알고 인연의 이치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이 없게 되었다.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인연(因緣) 연기(緣起) 인과(因果)의 법칙을 잘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제일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인연이고 인과론이고 연기설이다.
일체미혹개제단(一切迷惑皆除斷)하고: 결국 같은 뜻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 엮여져서 천가지 만가지로 변화해서 돌아간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여러 가지 인연들이 엮여서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 이 세상이 어떻게 해서 존재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 내 얼굴은 왜 이런가? 나는 어째서 중노릇을 하는가? 나는 왜 가난한가? 나는 왜 부자인가? 모든 문제들은 전부 인과의 이치로써 다 푼다. 인과의 이치로써 풀지 못할 문제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이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가? 지구에서 처음에 뜨거운 열기가 식어서 차츰차츰 습기가 생기고, 그 다음에 거기서 생물이 생기기 시작하고 나아가서 동물이 생기고, 사람이 생기기까지 이것도 전부 인연의 이치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시이유어법계(如是而遊於法界)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이치를 가지고 법계에 노닌다. 유행이라고 하는 것은 교화하러 다니는 것이다. 여기 유(遊)자가 나왔는데 경전에서는 유행(遊行)이라고 한다. 인연이라고 하는 이 이치 하나 가지고 교화하러 다닌다.
우리 불교의 교설이 여러 가지로 많다.
천도에서부터 일심사상, 열반사상, 요즘은 수식관이라든지 힐링이다 등등 많지만, 그 가운데 사람을 가장 감동시키고 또 이 세상 존재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해서, 그것이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의 안녕과 편한 마음 행복한 마음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이치는 뭐니 뭐니 해도 연기설이다. 인과설이고 인연설이다.
*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마승은 부처님의 첫 제자인 5비구중의 한사람이다.
그 사람이 탁발을 하러 나갔는데 워낙 품위가 있고 교양 있어 보이자. 사리불과 목건련이 그만 그 모습에 반했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천하의 수재이고, 머리좋고 좋은 집안 출신에 인도 사회에서 가장 인텔리였다. 그 당시 이들은 이미 종교의 지도자였다.
그들이 보기에 마승이 품격과 품위가 있고 근사해 보였다.
그 모습에 반해서 “도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고, 어떤 공부를 하고 있으며, 평소 생활은 어떤가?” 하고 숨도 안 쉬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마승라고 하는 5비구중의 한 사람이
“싯달태자가 출가해서 성도하시고 그 분이 붓다가 되었는데, 나는 그 분 밑에서 제자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분이 무엇을 가르치기에 당신의 인격이 그렇게 훌륭하냐?” 고 묻자 “나는 초보자라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고 사양을 했다. 그래도 사리불이 “아 그래도 뭐라도, 한 마디라도 소개할 것이 있지 않겠느냐?” 하고 졸랐다. 그러자 소개한 것이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 제법종연멸(諸法從緣滅) 아불대사문(我佛大沙門) 상작여시설(常作如是說)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소멸한다. 생노병사 성주괴공 춘하추동 생주이멸 일체 모든 변화는 전부가 인과의 이치, 인연의 이치로 소멸하고 생성한다는 것을 우리 스승이 가르칩니다.”라고 하였다.
총명한 사리불이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마음이 환히 열려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당신 스승에게 나를 좀 안내 해 주시오.” 해서 당장에 부처님 앞에 가서 교화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 사리불 목건련이 각각 제자를 250명씩 거느리고 가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부처님에게 출가를 하게 된 사연이 바로 이 인연의 이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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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보살이 아름다운 지혜의 빛을 구족했다는 것은 결국 인연의 도리를 잘 안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인연의 이치 하나로 세상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이 없는 것이며 일체미혹을 모두 해결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구가 처음에 어떻게 생겼고, 나는 왜 이렇게 생겼고, 나는 왜 이렇게 잘 살고, 나는 왜 이렇게 못났고 하는 자기의 인생사 모든 문제를 인연의 이치 하나로 해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법 하나가지고 법계에 노니면서 교화를 했다. 부처님이 인연의 이치를 가지고 중생에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불교는 이렇게 간단한 이치다.
이것을 우리가 밤낮없이 읊조리지만 요는 얼마나 가슴에 와 닿고 실생활에 적용이 되는가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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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궁전실최파(魔王宮殿悉摧破)하고 : 마왕의 궁전을 다 최파했다는 것은 마왕궁전에 대한 이치를 다 파했다는 것인데 인과나 연기의 이치에서 벗어난 이론이 전부 마왕궁전이다.
하늘에서 떨어졌다든지 어떤 절대 신(神)이 있으라 하니 있게 되었다든지 하는 것이 전부 마왕의 궁전이다. 그러한 것을 다 파했다.
중생예막함제멸(衆生翳膜咸除滅)하며:중생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전부 소멸하게 됐다.
인과의 이치가 아니라고 하는 것, 남을 원망하고 탓하고 조상을 원망하는 것, 이것이 전부 인연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고 눈에 막이 끼어서 아무 것도 못 보는 사실이다.
인연의 이치로써 그것을 소멸하게 됐다.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초발심 때문에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뜻은 그렇게 되어있다.
눈에 뭔가 가려 있어서 이치를 모른다. 인생 살아가는데 인과의 이치, 연기의 이치만 제대로 알면 아무 걱정이 없다. 내가 잘 됐든 못 됐든 누구를 탓 할 것도 아니고, 내가 어리석어서 그렇고, 내가 미련해서 그런 것이다.
이제분별심부동(離諸分別心不動)하야 : 모든 분별 망상을 전부 다 떠나버렸다. 거기에 이러쿵저러쿵 원망하고 따지고 할 일이 없어서 마음에 움직이지 않는다.
선요여래지경계(善了如來之境界)로다: 여래의 경계를 잘 요달했다. 여래의 경계라고 별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 역시 인과의 이치고, 연기의 이치다.
인연으로써 여래의 경계를 잘 요달했다. 얼마나 선명하고 간단한가?
*
삼세의망실이제(三世疑網悉已除)하고 : 삼세의망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현재,미래의 의심의 그물이다. 인과의 이치, 연기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 의심의 그물이다.
연기의 이치를 잘 알면 의심이 있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봄이 되어서 저렇게 벚꽃이 만발했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계절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벚꽃이 만발하지’ 하는 것은 잘 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문제로 돌이키면 그만 캄캄하다.
끊임없이 연기를 읊조리면서도 쉽게 팍 와 닿지를 않아서 끊임없이 분란이 일어나고 문제와 갈등이 일어난다.
종단의 프로라고 하는 스님들도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서 사는가. 그렇게나 인연, 인과,연기를 이야기 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부당하게 손해를 봤다 하더라도 언젠가 돌아오겠지 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인과를 아는 것이다.
틀림없이 부당하게 나에게 손해를 끼쳤고 만약 그것이 진정 내 것이라면 언젠가 나에게 당연히 돌아와야 되는 것이고 또 당연히 돌아온다. 내게 돌아오도록 안 되어 있으면 그것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어여래소기정신(於如來所起淨信): 여래의 처소, 여래의 가르침에서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 이것 역시 연기의 법칙이다. 인연의 도리가 청정한 믿음이다.
이신득성부동지(以信得成不動智)하니 : 이러한 믿음으로써 부동지를 이루게 되었다.
부동지는 움직이지 않는 지혜, 만고불변의 지혜다.
연기의 진리를 제대로 체득하면 그것이 곧 만고불변의 지혜라는 뜻이다.
지청정고해진실(智淸淨故解眞實)이로다 :지혜가 청정한 까닭에 이해하는 것이 진실하다. 지혜라고 하는 지(智)가 근본적인 지혜라면 이해라고 해(解)자는 우리 일상생활에 그것을 활용하는 내용이다. 지혜가 청정하니 활용하는 이해도 진실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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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중생득출리(爲令衆生得出離)하야 :중생을 위해서 모든 의혹의 그물에서부터 벗어난다.
진어후제보요익(盡於後際普饒益(진어후제보요익)호대 : 연기의 이치,인연의 이치 하나로써 영원한 미래까지 널리 이익하게 한다. 후제는 영원한 미래까지라는 말이다.
영원한 미래까지 그 이치 하나로써 널리 이익하게 한다.
장시근고심무염(長時勤苦心無厭)하며 : 오랫동안 고생고생 한다 하더라도 마음에 싫증이 없으면 그 고생은 이미 고생이 아니다.
내지지옥역안수(乃至地獄亦安受)로다 : 설사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또한 편안히 받아들인다. 우리가 어딘가 여행을 가서 ‘내가 어째서 여행 왔는가?’하고 의심하지는 않는 것처럼 지옥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여행을 왔으니 그 나라에 간 것이 아무 의심이 없다.
지옥에 가는 것도, 지옥 고통을 받는 것도 편안히 받아들인다. 참 기가 막힌 내용이다.
*
내가 허리수술을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의료사고라고 말하고 소송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한 마디도 대꾸를 안했다. 의료사고 소송을 한다고 이미 난 사고가 뒤바뀌어지는가, 법원에서 의료사고다 라고 딱 판결내린 그 순간 잘못된 수술이 바로잡아지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특히 승려들은 그렇게 할 일이 아니다.
만약에 그 사람들이 잘못을 했다면 그 사람들이 과보를 받을 것이다.
잘못이 없는 나는 복을 받아야 할 것을 의료사고라고 소송하면서 그 순간 벌써 다 까먹어 버린다. 인연이라고 하는 이치는 그렇게 돌아간다.
누가 잘했다 잘 못했다 하는 것에 속고 깜빡깜빡 연기의 이치를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중생의 본심이 발동을 한다. 만일 자기의 어떤 문제에 관해서든 좀 여유를 갖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런 문제들을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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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무량개구족(福智無量皆具足)하고: 복과 지혜가 한량없는 것을 다 구족하게 되고
중생근욕실요지(衆生根欲悉了知)하며: 중생 근기와 욕망을 다 알게 된다. 초발심을 제대로 하면 그렇게 된다.
급제업행무불견(及諸業行無不見)하야: 그리고 모든 업의 행을 못 보는 것이 없다. 일일이 다 보게 되고 알게 된다.
여기소락위설법(如其所樂爲說法)이로다: 그 즐겨하는 바와 같이 항상 법을 설한다. 내가 화엄경을 좋아해서 스님들하고도 공부하고, 보살님들하고도 공부하고, 신도님들하고도 공부하고 또 나 혼자 앉아서 책을 글로 쓰면서 공부한다. 그런 것이 다 여기소락위설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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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일체공무아(了知一切空無我)하고 :일체가 공하다, 무아다 이런 것을 일단 잘 알고, 내 육신으로부터 내 마음과 부귀공명과 이런 것이 전부 공하다, 무아다, 실체가 없다 하는 것을 알고
자념중생항불사(慈念衆生恒不捨)하야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생각해서 그 자비한 마음을 항상 버리지 않는다.
자비행을 제대로 하려면 근본적으로 공하다,무아다 하는 것이 바닥에 깔려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일체 초점을 전부 내 자신에게 맞춰놓고 내 자신부터 먼저 계산해서 나에게 이로운가? 손해인가?를 생각하고 나서야 남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가 공하고 무아인 것을 요지한 뒤에 중생을 자비로 생각하는 것을 항상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야 제대로 된 자비심이 나오지 자기를 생각하면 자비심이 제대로 안 나온다.
‘책을 써서 매달 천 권씩을 법공양을 올린다’라고 생각하면 계산이 안 맞는다.
아까 내가 빚지겠다고 말도 했는데 계산상 빚지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어느 정도 수박 겉핥기라도 일체 공이나 무아를 알았기 때문에 ‘이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좀 보급해야 되겠구나.’ 해서 누가 신청도 안 했는데 본사마다 열권 씩 막 보내는 것이다.
언제까지 내가 보낼지는 모르지만 일단 계획은 81권을 다 보낼 계획이다.
그것이 끝까지 이뤄지기를 바란다.
이일대비미묘음(以一大悲微妙音)으로: 하나의 큰 자비의 미묘한 음으로 이것은 법문의 소리다. 법문의 소리로
보입세간이연설(普入世間而演說)이로다 :널리 세간에 들어가서 연설하는 도다.
법을 펴는 것, 발심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내용이다.
전에도 소개를 했는데 대반열반경에는 발심과 정각, 처음 출발과 어떤 일이 성공되었을 때와의 관계를 둘이 아니라고 해서 발심필경이불별(發心畢竟二不別) 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서 부산에서, 아니면 여러분 각자 자기 사찰에서 서울로 가겠다고 마음 낸 것과 서울에 도착한 것과 그 마음이 그 마음이다.
그런데 첫 마음이 어렵다. 여시이선심난(如是二先心難) 이다.
발심과 정각 이와 같은 두 가지 마음 중에 선심(先心)인 첫 마음이 오히려 어렵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사문유관해서 발심을 한 것과 정각을 이룬 것과의 관계가 그렇다.
사문유관해서 발심을 한 것과 정각을 이룬 것은 그 마음이 그 마음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그런데 사문유관해서 발심한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 근기로써 발심을 하면 정각은 저절로 이루게 되어 있다.
혹 중도 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대개 큰 성과를 이룬 것은 발심 때문에 그런 것을 이룬다.
그래서 정각보다 발심이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한다. 시작만 하면 벌써 반은 성취한 것이다.
그 시작이 곧 초발심이다.
우리도 이제 화엄경이 4분의 1권이 끝나갈 무렵이 되었다. 나는 항상 책 두께를 손으로 만져보면서 ‘얼마나 갔나’를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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