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功德의 平等
善知衆生時非時하야 爲利益故現神通호대
分身遍滿一切刹하야 放淨光明除世暗이로다
譬如龍王起大雲하야 普雨妙雨悉充給이라
觀察衆生如幻夢하야 以業力故常流轉이로다
大悲哀愍咸救拔하야 爲說無爲淨法性하니
佛力無量此亦然이라 譬如虛空無有邊이로다
爲令衆生得解脫하야 億劫勤修而不倦하며
種種思惟妙功德하야 善修無上第一業하며
於諸勝行恒不捨하야 專念生成一切智로다
중생들의 제 때와 때 아님을 알고
이익주려 신통을 나타내나니
분신(分身)이 모두 세계 가득히 차서
깨끗한 광명 놓아 어두움 제하니
용왕이 큰 구름을 일으키어서
좋은 비 흡족하게 내림과 같네
중생들이 요술 같고 꿈 같은 업력(業力)
언제나 삼계에서 헤매임을 보고
대자비로 슬피 여겨 구하시려고
하염없는 법의 성품 위해 말하니
한량없는 부처님 힘 역시 그러해
허공이 끝간 데 없음과 같이
중생들께 해탈을 얻게 하려고
억 겁 동안 수행하여 게으르지 않네
가지가지로 아름다운 공덕 생각하고
가장 높고 제일 가는 업을 잘 닦아서
여러 가지 훌륭한 행을 버리지 않고
오로지 일체지(一切智) 낼 것만을 생각하네
*
공덕(功德)의 평등(平等): 공덕의 평등
*
선지중생시비시(善知衆生時非時)하야 : 중생들의 때와 때 아닌 것을 잘 알아서, 지금 이 이야기가, 지금 저 사람의 상황에 맞는가? 안 맞는가? 이것을 잘 알아서 설법을 해야 되고, 교화를 해야 된다.
남방불교에서 공부한 스님을 초청해서 49재 법문을 하는데 ‘49재 이것 필요 없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 것도 없는 무아인데’하면서 이야기를 한 경우가 있었다.
무아지중(無我之中)에 유진아(有眞我)라는 말이 곧 나오는데 무아 가운데 진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치우친 소견인 셈이다.
유(有)를 알면 공(空)도 알아야 되고, 공을 알면 또 유를 알아야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무아(無我)가 진아(眞我)이고 진아가 무아다.
그런데 남방불교를 공부하고 온 이 스님은 49재에 와서 49재 지낼 필요가 없으며 영혼이 없다는 소리만 하는 것이다. 그 스님을 소개하고 초청한 스님이 그래서 하소연을 했다.
제자들이 정성들여서 7ㆍ7재를 모시고 마지막 날이어서 큰스님이 오셔서 근사하게 천도하려고 했는데, 49재를 올릴 필요가 없다는 소리만 법상에 올라가서 하더라고 그 하소연을 들은 스님이 또 나에게 와서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자기가 안 믿더라도 중생에게 수순해서 시비시(時非時)는 알아야 될 것이 아닌가? 그 말을 할 땐가 아닌가를 알아서 해야 될 것 아닌가? 하는 것, 이 말이 그 말이다.
선지중생시비시(善知衆生時非時)만 잘 알아도 부처님의 열가지 힘인 십력 가운데 처비처(處非處)를 아는 것이다. 도리와 도리가 아닌 것, 이치와 이치가 아닌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화엄경을 공부해 오다 보니 수많은 법수가 반복해서 나온다. 그 중에 제일 자주 나오는 법수가 부처님을 열 가지 힘으로 표현하는 십력이다.
그 첫 조항이 처비처(處非處)다. 도리와 도리가 아닌 것을 아는 것이 부처님의 자랑스러운 힘이다. 여기 나오는 말처럼 보살은 시(時)와 비시(非時)를 아는 것이 보살이 자랑할 힘, 능력 가운데 하나다.
위이익고현신통(爲利益故現神通)호대: 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한 까닭에 신통을 나타내나니
분신변만일체찰(分身遍滿一切刹)하야: 분신이 일체찰에 변만해서
방정광명제세암(放淨光明除世闇)이로다 : 청정한 광명을 놓아서, 진리의 설법을 해서 세간의 어둠을 전부 제거한다.
인과의 도리를 모르는 것이 세상의 어둠이다. 인과의 도리 몰라서 그렇게 캄캄한 것이다.
온갖 부정부패를 다 저지르니 불쌍한 일들이 그렇게 막 일어나고, 사기협잡이 난무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으로는 얼마나 풍요롭고, 많이 발전했고, 편리하게 사는가.
그런데 그야말로 눈만 감으면 코 베어가는 것이 아니라 눈 뜨고 있는데 코 베어가는 세상이다. 참 조심해서 살아야 된다.
사기협잡만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니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달했다 한들 무슨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고 할 것이 있겠는가. 청정한 광명을 놓아서, 진리의 설법, 인과의 이치라고 축소해서 이야기하자. 인과의 이치를 하나 잘 가르쳐서 세상의 어둠을 제거하도다.
*
비여용왕기대운(譬如龍王起大雲)하야 : 비유하자면 그것은 용왕이 큰 구름을 일으켜서
보우묘우실충흡(普雨妙雨悉充洽)이라: 아주 미묘한 비를 널리 내려서 모두모두 충만하게 하고 흡족하게 하는 격이다. 연기의 도리를 우리가 잘 알고, 인과의 도리를 잘 알아서 인과대로 가르치고 실천하면 마치 가뭄에 용왕이 큰 구름을 일으켜서 단비를 쏟아 붓는 것과 똑같다.
관찰중생여환몽(觀察衆生如幻夢)하야 : 중생들이 환영과 같고 꿈과 같은 것을 관찰해서
이업력고상유전(以業力故常流轉)이로다 :업력을 쓴 고로 항상 유전함을 잘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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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애민함구발(大悲哀愍咸救拔)하야 : 큰 자비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써 다 구제하고, 고통에서 뽑아내어서
위설무위정법성(爲說無爲淨法性)하니 : 위하여 함이 없는, 조작이 없는 청정한 법의 성품을 설하는 도다. 연기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연기의 이치는 본래 있는 이치지 누가 만든 것이나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오시기 전이나 부처님이 가신 이후나 항상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 인과의 이치고 연기의 법칙이다. 그래서 무위(無爲)이다. 무위의 정법(淨法), 청정한 법이다.
부처님이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든 것은 변하는 것이고, 변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계율 같은 것은 그 시대 그 상황 그 민족에게, 또 그 사람들에게 맞는 것이 다른 곳에 가면 틀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한 순간 하나의 방편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진리는 아니므로 무위정법성은 못 된다.
불력무량차역연(佛力無量此亦然)이라 : 부처님의 힘도 한량없고, 이 무위의 정법성도 또한 한량이 없다.
비여허공무유변(譬如虛空無有邊)이로다 : 마치 허공이 가없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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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중생득해탈(爲令衆生得解脫)하야: 중생들이 해탈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억겁근수이불권(億劫勤修而不倦)하며 : 중생들이 해탈을 위해서 억 겁 동안 부지런히 닦고 닦아서 게으르지 않으며
종종사유묘공덕(種種思惟妙功德)하야 : 가지 가지로 미묘한 공덕을 사유한다.
진정 아름다운 공덕, 미묘한 공덕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사유해서
선수무상제일업(善修無上第一業)하며: 가장 높고 제일가는 업을 잘 닦는다. 선수는 잘 닦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업(業)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업력난사의(業力難思議)라는 말이 있다. 불업보살이라는 말도 한다. 부처님도 업을 안짓고는 살 수가 없다. 부처의 업은 불업(佛業)이고 보살의 행은 보살업이다. 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업을 짓고 산다. 그런 업이 무상제일업이다. 위가 없는, 가장 높은 제일가는 업이다.
이런 용어들도 화엄경에서만 볼 수 있지 다른 경전에서는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이 대단하다.
어제승행항불사(於諸勝行恒不捨)하야 :모든 수승한 행, 아주 뛰어난 보살행을 항상 버리지 아니해서
전념생성일체지(專念生成一切智)로다 : 오로지 일제지를 생성하는 것을 생각한다. 일체지는 부처님이 가지신 지혜다. 이것은 평등지이고 차별지다. 차별하는 것도 환히 알고, 평등한 입장도 환히 안다. 공(空)의 입장은 평등이다. 공의 입장도 환히 안다. 색(色)의 입장은 차별이다.
현상은 전부 차별하다. 이것은 색의 입장인데 색의 입장도 환히 아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데는 더러 보면 일체지지(一切智智)라고 해서 지혜 지(智)자를 두 번 써 놓은 데가 있다. 지혜와 지혜를 말한다. 평등지,차별지다. 공(空)의 지혜와 유(有)의 지혜 이 모든 것을 전부 이룬다. 앞에 ‘보살은 아직 일체지(一切智)는 이루지 못했지만’ 하는 표현이 있었다.
22, 一身과 無量身
一身示現無量身하야 一切世界悉周遍호대
其心淸淨無分別하니 一念難思力如是로다
한 몸에서 한량없는 몸을 보이며
모든 세계 간 데마다 두루하여도
그 마음 청정하여 분별이 없고
한생각 부사의한 힘도 그러하네
*
일신(一身)과 무량신(無量身): 한 몸과 무량(無量)한 몸의 평등
*
일신시현무량신(一身示現無量身)하야: 일신이 무량신을 시현해서
일체세계실주변(一切世界悉周遍)호대 : 낱낱이 전부 한량없는 모든 내용을 다 가지고 있다.
앞에서 일모단현중찰(一毛端現衆刹), 한 터럭 끝에 온갖 무수한 세계를 나타낸다는 말이 나왔었다. 우리 한 몸에 60조의 세포가 있고, 60조 세포마다 각각 또 60조의 세포가 있으므로 우리는 최소한 3600조의 세포를 대중으로 동시에 모시고 다니는 거대한 세계며, 거대한 법당이다. 그러면 우리가 개인이 화엄경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3600조의 대중과 함께 화엄경 공부를 하고, 환희를 하든 슬퍼하든 화를 내든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
여기도 같은 이야기다.
화엄경 전체를 꿰뚫어보신 의상스님께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라고 간단히 두 구절로 표현을 했다.
한 몸에서 한량없는 몸을 나타낸다. 난초 잎 하나에서 수 백,수 천 포기의 난초를 배양해 내고, 인간의 세포하나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거기에서 다 복제해 내는 것이다. 오장육부 따로 복제하고, 머리카락 따로 복제하고, 뼈세포 피 세포 복제해서 넣는 것이 아니다. 한 세포 속에 그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소나 돼지를 복제할 때도 세포 하나를 가지고 그 한 마리를 통째로 복제하는 것이다. 일신에서 시현무량신이다.
내가 화엄경이 최첨단 과학이론이고, 최첨단 물리학이론이라고 하는 말을 자신있게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전문가도 아니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조금 아는 지식으로도 이렇게 딱 들어 맞는 이치를 어떻게 그 시대에 말해놓았는지 화엄경이 대단하다.
화엄경 한 권을 전자책으로 입력해 놓고 천 번 만 번 복사해도 하나도 흐트러지거나 잘못되지 않고 그대로 복사한다. 배양이라고 했든 복제라고 했든, 카피라고 했든, 다 같은 의미다.
일신이 시현무량신이어서 낱낱 세포마다 전부 인체라고 하는 모든 구조를 다 가지고 있다.
한량없는 모든 내용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심청정무분별(其心淸淨無分別)하니 : 그 마음이 텅 비어서 아무런 분별이 없다.
그래야 모든 것을 제대로 분별해 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고정관념에 딱 사로잡혀 있으면 더 이상 사고가 원활하게 돌아가서 천변만화를 할 수가 없다.
고정관념을 제일 싫어하는 것이 불교다.모든 것은 고정되게 되어있지 않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이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천변만화로 엮어내는 것이다. 계속 끊임없이 생각을 자아낸다.
오늘 하루만 가지고 생각해 봐도 하루 동안 우리가 마음 쓴 그 양이 얼마나 되겠는가.그야말로 천백억 화신으로 나툰다. 천백억 화신이 하나 하나 천변만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이 된다.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가능하면 고정관념 갖지 말고 텅 비워서 기심청정무분별(其心淸淨無分別)이 되는 길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화엄경을 공부할 때도 선입관을 가지고 글을 읽을 것이 아니라, 선입관 없이 그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
나 역시 성경을 읽어도 불교식으로 해석하려고 들고, 유교책이나 노자 장자를 읽어도 불교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탄허스님이 쓴 주역선해(周易禪解)라는 책도 있는데 주역도 불교인이 보면 불교식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역은 주역대로 해석해야 되고 장자는 장자대로 해석해야 되고 불교는 불교대로 해석해야 된다. 그런데 그쪽 사람들이 불교를 보면 또 그들 식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
어느 유명한 목사가 화엄경강의를 책으로 낸 것이 있었다.
내가 그분의 <화엄경 강의> 책을 당장 샀다.
목사가 교수들 학생들을 모아놓고 화엄경 강의를 했으니 여느 목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내가 읽어보니 화엄경을 기독교식으로 해석을 해냈다.
심기청정무분별이 안된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기가 참 어렵다.
그 전에 탄허스님도 “마음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하는 소리를 중국에서는 어떻게 번역했는지 아느냐?”고 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중국 성경은 못봤다고 하자 “허심자수복(虛心者受福) 마음이 텅 빈 사람은 복을 받는다로 번역했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을 받는다.’고 해석을 한 부분이다.
“허심자수복(虛心者受福) 마음이 텅 비었다면 당연히 복을 받는 것이지, 그대로 불교 아니냐? 복 받아도 받는 것도 아니고, 복 받음이 없이 받는 것이고, 이게 허심자수복의 도리다.근사한 번역이다” 하는 말씀도 하셨다.
일념난사력여시(一念難思力如是)로다 : 한 생각의 불가사의한 힘이 이와 같다.
우리 한 생각의 힘은 참 대단하다. 일념의 힘은 대단한 것이다. 순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천리만리 달려오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 내고 온갖 분야에 발전을 가져와서 불교이론 화엄경의 이론에 거의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다.
23, 眞實한 智慧
於諸世間不分別하며 於一切法無妄想하야
雖觀諸法而不取라 恒救衆生無所度로다
一切世間唯是想이라 於中種種各差別하니
知想境界險且深하야 爲現神通而救脫이로다
譬如幻師自在力하야 菩薩神變亦如是라
身遍法界及虛空하야 隨衆生心靡不見이로다
能所分別二俱離하며 雜染淸淨無所取하며
若縛若解智悉忘하고 但願普與衆生樂이로다
一切世間唯想力이라 以智而入心無畏하며
思惟諸法亦復然하야 三世推求不可得이로다
能入過去畢前際하고 能入未來畢後際하며
能入現在一切處하야 常勤觀察無所有로다
隨順涅槃寂滅法하야 住於無諍無所依하며
心如實際無與等하야 專向菩提永不退로다
修諸勝行無退怯하고 安住菩提不動搖하야
佛及菩薩與世間과 盡於法界皆明了로다
欲得最勝第一道하야 爲一切智解脫王인댄
應當速發菩提心하야 永盡諸漏利群生이어다
여러 가지 세간에 분별이 없고
온갖 법에 대해서도 망상 없으며
모든 법을 보지마는 취하지 않고
중생을 구원해도 건진 것 없어
일체의 세간들도 오직 망상 뿐
그 가운데 갖가지로 차별하거늘
망상 경계 험하고 깊은 줄 알고
신통을 나타내어 해탈케 하니
요술쟁이 자재한 힘과 같아서
보살의 신통변화 또한 그와 같아
법계와 허공계에 가득한 몸을
중생이 마음따라 모두 다 보네
분별하고 분별할 것 둘이 다 없고
물들고 깨끗함을 취하지 않으며
속박이다 해탈이란 지혜도 잊어
중생에게 안락 주기를 원할 뿐이다
일체의 세간들이 망상의 힘 뿐
지혜로써 들어가 두려움 없고
모든 법 생각함도 또한 그러해
삼세에 구하여도 얻을 수 없네
지난 세월 끝까지 능히 들었고
끝없는 미래까지 다 들어가고
현재의 온갖 곳에 능히 들어가
부지런히 늘 살펴도 있는 것 없네
열반의 고요한 법 따라가면서
다툼 없고 의지 없는 곳에 머무니
실상과 같은 마음 짝할 이 없어
보리를 향해 나가 퇴전치 않고
훌륭한 행을 닦아 물러가지 않고
보리에 머물러서 동요 않으며
부처님 보살이나 여러 세간들
법계의 끝간 데를 분명히 아네
가장 좋고 제일가는 길을 얻어서
온갖 지혜 해탈왕이 되고자 하면
마땅히 보리심을 빨리 내어서
모든 번뇌 다 끊고 중생 이익케 할지어다
*
진실(眞實)한 지혜(智慧): 진실한 지혜
*
어제세간불분별(於諸世間不分別)하며 : 모든 세간에 분별하지 아니하며
어일체법무망상(於一切法無妄想)하야 : 망상없이 그대로 본다.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고 망상부리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세간에 불분별하고 일체법무망상해서
수관제법이불취(雖觀諸法而不取)라 : 비록 온갖 사실들을 다 보지만 그대로 취하지 않는다.
거기에 옳다 그르다 취사선택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야구게임을 하나 봐도 열을 내고 욕을 퍼붓고 감독을 욕했다가 선수를 욕을 했다가 욕을 한다. 그 자리에 있는 감독도 선수도 안 되는 것을 TV 화면을 들여다보고 욕을 한다고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심한 경우는 축구경기를 보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평정심을 갖는 것이 참 중요하다.
수관제법이나 불취다. 도인이라고 해서 안 보는 것이 아니다. 도인도 볼 것은 다 보고, 알 것을 다 안다. 다만 거기에 취사선택이 없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維嫌揀擇)이다. 지극한 도는, 완벽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유혐간택이다. 간택을 싫어할 뿐이다.
항구중생무소도(恒救衆生無所度)로다 : 항상 중생을 구제하지만 제도하는 바가 없더라. 중생을 열심히 끊임없이 제도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에까지 가서 중생을 제도한다. 그래도 제도하는 바가 없어야 된다.
여기에서 가관, 공관, 중생관이라고 하는 삼관(三觀)에 대해 설명이 된다.
가관(假觀)은 세속적인 관점으로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죄 많고 때 많고 얼른 떨쳐버려야 할 몹쓸 중생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관점이고 세속적인 관점이다.
사실은 잘못 본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중생들이 많으므로 이 모습에서 바라보고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공관(空觀)은 일체 중생은 다 공하다고 보는 소승인 성문, 연각의 관점이다. 텅 비어서 없는데, 모두가 무아(無我)인데, 중생이라고 굳이 그렇게 할 것이 무엇인가? 중생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처도 무아다. 부처도 공한 것이고, 부처도 근본이 텅 빈 것이 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승적인 일종의 편견이다.
그런데 사실은 유(有)를 싫어하고 무(無)를 취하는 것이나, 무(無)를 싫어하고 유(有)를 취하는 것이나 그 허물은 같다.
공관이나 가관이나 허물은 똑같으므로 중도관(中道觀)이 중요하다.
본래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부처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 제도를 하는 것이 중도관이다.
본래부처로 보고 제도하니까 항구중생(恒救衆生)이 무소도(無所度)다.
항상 중생을 구제하지만 제도하는 바가 없다. 중생이 본래부처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와서 온갖 중생들을 많이 제도했다고 하지만 하나도 제도한 바가 없다는 선가(禪家)의 말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아무것도 제도한 바가 없다. 본래부처인데 무엇을 제도한다는 것인가.
부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부처인 사실을 가르쳐 줬을 뿐이다.
그것을 그대로 수긍하면 수긍한 사람은 그것을 교화다 제도다 할 것이지만 본래 사람을 바꾸고 변화시켜서 제도했다거나 교화를 했다거나 하는 사실은 없다. 무소도다. 제도한 바가 없다는 말이다.
*
일체세간유시상(一切世間唯是想)이라 : 일체세간 모두가 상상이다. 전부 우리의 생각놀음이다.
어중종종각차별(於中種種各差別)하니 : 그 가운데 이 생각을 하고 저 생각을 하고 가지가지가 차별하다.
관점이 얼마나 다양한가. 우리나라만 봐도 진보니 보수니 가지가지 사상이 존재한다. 생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므로 생각 놀음은 그런 판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다 인정해야 된다. ‘생각놀음이니까. 그저 서로 생각이 다르니까.’하고 다른 것을 수긍해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지상경계험차심(知想境界險且深)하야: 생각의 경계라고 하는 것은 험하고 또한 깊다.
세상의 일체사상, 인연, 문명의 발달도 마찬가지다. 상(想)의 경계, 생각의 경계라고 하는 것은 험하고 또한 깊다. 자유 세상이 되다보니 세상이 험하다.
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몸은 구속할 수 있지만 생각은 구속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으로 서로 주장하기로만 하면 너무나도 험하고 험하다.
위현신통이구탈(爲現神通而救脫)이로다: 그런 사람을 위하여 신통을 나타내서 구제하여 해탈하게 한다. 너무 험하게 세상을, 인생을 살아가니까 그런 사람들을 그런 데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도 수용하고 저것도 수용하고, 이것도 좋은 입장이고 저것도 좋은 입장이고, 다 수용하고 다 용납한다.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기어이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 상태가 구탈(救脫)의 상태다.
*
비여환사자재력(譬如幻師自在力)하야 : 마치 마술사가 자유자재한 힘이 있는 것과 같이
보살신변역여시(菩薩神變亦如是)라 : 보살의 신통변화도 또한 그와 같다.
앞에서도 마술사이야기를 했지만, 마술사가 준비한 보일거리는 이미 다 보인 것이다.
물론 한계가 있지만 불도 보이고, 비둘기도 보이고, 카드도 보이고, 비둘기 알도 보이고, 사람도 보이고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다 보였다. 그것이 자재력이다.
신변법계급허공(身遍法界及虛空)하야: 이 몸은 지신(智身)이다. 지혜의 몸이 법계와 그리고 허공계에 두루 해서
수중생심미불견(隨衆生心靡不見)이로다 : 중생심을 따라서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다. 보지 못함이 없더라. 자기 깜냥대로 보살의 신통변화를 본다. 보살 대신 그냥 부처님이라고 하자.
부처님이 신통변화를 했지만, 부처님에 대한 이해, 부처님을 나름대로, 들은 대로 자기 아는 상식만치만 보는 것이다.
법성게에는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이라는 말이 있다. 근사한 말이다. 우리 인생은 사실 인생 그 자체가 그대로 하늘에서 끝없이 황금보화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보익생만허공이다. 허공 가득히 다이아몬드가 사정없이 쏟아지는 것이 인생이다.더 이상 보탤 것도 없고, 보태서 그렇게 풍요로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다만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누리느냐에 따라서, 중생이 자신의 그릇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
천하에 명문들이 많지만 의상스님의 법성게 같이 명문이 없다.
의상스님은 공부 많이 하신 분인데 세상에 270자 법성게 하나만을 내놓았다. 그것이 천하의 명문이다. 많고 많은 80권 화엄경을 그 몇 글자 속에, 한 폭의 글 속에 다 담았다.
그 말 하나만 하나가지고도 몇 날 며칠을 설법해도 남는다.
하늘에서 보석이 가득히 쏟아져서 중생을 이익하게 한다.
요즘에 운석은 가끔 떨어지지만, 경에서 말한 보석은 어디에고 떨어진 적이 없다.
옛날에 운석이 많이 떨어져서 한 소리도 아닐 것이다.
우리 인생은 현재 이대로 완전무결한 존재이다.
임제스님은 흠소십마(欠少什麽)오, 부족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네가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느끼고 말할 줄 알고 침묵할 줄 알고 화낼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목 놓아 울음을 터트릴 줄도 아는데, 도대체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그런 신통변화를 일으킬 줄 아는 그대가 무엇이 부족한가?
우리는 사실 완전무결한 존재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느끼고 얼마나 누리느냐에 따라 그릇에 따라서 그 이익을 얻는다.
‘그런 이론에 대해서 나는 전혀 관심 없다. 인생은 속상하고 울화통 터지는 것인데 무슨 그런 소리가 있느냐?’ 하는 사람은 그릇을 엎어놓은 것과 같다. 폭우가 쏟아져도 물 한 방울도 고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 중이 뭔 소리를 하는가? 불교에서 뭔 소리를 하는가?’ 하고,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래도 가랑비에 물 한 방울 두 방울이 자기 그릇에 고이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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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분별이구리(能所分別二俱離)하며 :능(能)과 소(所)는 주관과 객관이다. 나와 너, 있다 없다, 남자 여자, 이 모든 것을 불교는 능, 소로 표현한다.
나와 너, 있음과 없음 그렇게 둘로 나누는 분별을 다 떠나고
잡염청정무소취(雜染淸淨無所取)하며 : 잡염과 청정을 함께 떠나고. 뭐가 물들고 뭐가 청정하다고 따질거린가, 엄격하게 분석해 들어가면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다.
똥은 철저히 냄새가 나야 되고 철저히 잘 썩어야 진짜 좋은 똥이다. 똥이 덜 썪었으면 온전한 똥이 못된다. 잡염과 청정을 나눌 일이 아니다. 취할 바가 없다.
이것은 불이성(不二性)을 말한다. 본래 둘이 아닌 도리다.
남녀도 사실은 둘이 아니다. 그것을 일상 생활에서 자유자재하게 활용할 수 있으면 그 가정 이 화목하고 평화롭다.
‘남자가 어떻게, 여자가 어떻게 그것을 하냐’하면 그 가정이 깨지는 일이 멀지 않았다.
진여생명에는 불이성이 있다. 둘이 아닌 성질을 꺼내서 쓰는 것이다.
설거지든 밥이든 청소든 육아든 내가 하면 된다. 못을 쳐야 할 일이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못을 치고 현관문을 갈 일이 있으면 아무나 가는 것이다.
그런 불이성(不二性)이 우리 인간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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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마다 불이문(不二門)이 있고, 유마경의 절정은 불이법문이다. 불이법문품도 있는데, 문수보살과 수많은 보살들이 유마거사와 불이(不二)에 대해서 각자 아는대로 토론을 한다.
많은 보살들이 이야기를 하고나서 마지막에 문수보살이 우리는 다 했으니 이제 유마거사에게 불이에 관한 소견을 피력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마거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거슬 막을 두, 입 구 자를 써서 두구(杜口)라고 한다. 입을 딱 막고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니까 문수보살이 있다가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문자와 언어가 없는 것이 참으로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우리 모든 존재는 불이성(不二性)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만 불이고 보살만 불이가 아니다.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닌 성품을 본래 지니고 있는 도리다.
그런데 뭘 달리 이야기 할 것이 있는가?
굳이 유마거사의 입을 막은 소식, 그 멋진 법문에 내가 환칠을 하자면 그런 것이다.
본래 다 불이인데 뭘 불이를 설명할 게 뭐 있느냐?
붓글씨에서는 다시 개(改)자를 써서 그걸 개칠이라고 한다.
붓글씨의 제일 금지 사항이다.
옛날 선비들은 한 번 획을 그은 데에 다시 덮어 긋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한 번 딱 그으면 아무리 글씨가 잘못 갔어도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전부 개칠이다. 잘 그려놓은 그림에 환칠을 한 것이다.
하지만 또 강사는 그런 임무를 부여 받았으니까 어쩔 수 없다.
약박약해지실망(若縛若解智悉忘)하고 : 속박됐거나 속박에서 해탈된 것을 지혜로써 다 잊어버리고,
단원보여중생락(但願普與衆生樂)이로다 : 다만 널리 중생에게 더불어 즐겁기를 원한다. 중생에게 즐거움 주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행복한 것이 중요하다. 옳다 그르다는 아무 의미가 없다. 중생락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만 중생과 더불어 즐겁기를 원하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를 가지고 친구들 사이가 벌어지고, 가족의 사이가 벌어지는데 옳고 그른 것이 무슨 상관있는가, 친한 것이 제일 우선이다.
친화가 제일이기 때문에 선정후교(先情後敎)라는 말이 있다.
선비가 제자를 가르치는데 먼저 정을 담뿍 담고 그리고 나서 가르치는 것이다.
정을 먼저하고 가르치는 것을 뒤로한다. 소견 좀 다르고 관점 좀 다른 것을 가지고 우겨서 ‘너하고는 밥도 같이 안 먹는다’고 되면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남의 일이나 쓸데없는 정치,종교 이런 것을 가지고 그렇게 사이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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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세간유상력(一切世間唯想力)이라 : 일체 세상사는 오직 생각의 힘이다.
이지이입심무외(以智而入心無畏)하며 : 지혜로써 들어가서 마음에 두려운 바가 없어야 한다. 생각과 지혜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불교에서 서양철학 같은 것을 크게 높이 사지 않는 이유는 아주 총명한 사람들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론 같은 것은 머리 좋은 사람들은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 하더라도 다 읽어서 이해를 한다. 그러나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은 사람의 직관에 의해서 툭 툭 던져놓은 말은 아무리 총명한 머리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사는 오직 생각의 힘이다. 이것이 세속의 길과 열반의 길이 나눠지는 한계선이다.
세속의 길은 생각의 길이고, 열반의 길은 지혜의 길이다.
지혜로써 들어가서 마음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사유제법역부연(思惟諸法亦復然)하야: 제법을 사유하는 것도 또한 그러해서
삼세추구불가득(三世推求不可得)이로다 : 과거,현재,미래를 추구해봐야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생각으로 아무리 과거, 현재,미래를 파헤쳐봐야 그것이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겨우 한쪽을 연구해서 다음으로 옮기면 그 앞에 연구해 놨던 것이 벌써 변해있다.
그 다음 것을 연구하면 앞의 것이 또 변해있다. 생각으로 한 것은 그렇게 끝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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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입과거필전제(能入過去畢前際)하고 : 능히 과거가 끝내는 그 앞에, 미래에 들어가고
능입미래필후제(能入未來畢後際)하며: 능히 미래가 끝내 후제에 들어간다.
이것을 익숙한 말로 떠올리면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이라고 한다.
과거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현재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미래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거기에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현전일념(現前一念)이 있다.
그래서 십세(十世)다. 그것이 구세와 십세가 서로 즉해있다, 연결되어 있다,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불이성이다, 둘이 아니다, 호상즉이다, 하는 것이다.
시간을 아무리 쪼개고 쪼개서 과거의 과거 현재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 미래, 미래의 과거ㆍ현재ㆍ미래, 그리고 현전일념까지 십세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 불이성으로 돌아간다.
호상즉(互相卽)이다.
과거가 끝내는 미래에 들어가고, 미래는 또한 끝에 가서는 후제에 들어간다.
호상즉은 시간의 호용성이다.
중국 사람의 평균 수명이 40세였고 오래 살아야 50세를 살았던 시대에 조주스님은 120을 사셨다. 영가스님 같은 위대한 도인도 48세까지밖에 못 살았고 우리나라 고려 보조국사 같은 위대한 성인도 60을 못 채우고 58세인가를 사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스님, 어찌하여 그리 오래사십니까?” 하니까 “너희들은 시간의 부림을 당하지만, 나는 내가 시간을 부린다.” 고 하였다는 말이 있다.
시간의 호용성을 마음껏 활용한 도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런 것들도 우리가 생활 속에 활용을 하려고 하면 가능한 일이다.
능입현재일체처(能入現在一切處)하야 : 능히 현재 일체처에 들어가서
상근관찰무소유(常勤觀察無所有)로다 : 항상 부지런히 관찰해도 있는 바가 없더라. 열심히 정진하지만 그 무엇인가 꼬투리를 남기고, 조작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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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순열반적멸법(隨順涅槃寂滅法)하야 : 열반의 적멸법을 수순해서.
열반이나 적멸 참 좋은 말이다. 세상 골치 아프고 시끄럽고 괴롭고 하는 데는, 열반이 제일이고 적정이 제일이기 때문에 인도의 초기불교에서는 열반이니 적멸이니 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활발한 보살행을 크게 권장하지도 않았다.
우선 괴로운 것부터 해결하고 봐야 하니까 괴로운 것 해결하려면 열반밖에 없다. 열반적멸 법을 수순해서,
주어무쟁무소의(住於無諍無所依)하며 : 갈등이 없고 다툼이 없는 데 머물러서 의지하는 바가 없다. 마음이 텅 빈 상태. 아무 것에도 의지함이 없는 상태다. 그것은 아주 편안하긴 하다.
그래서 소승불교에서 자기 편안을 추구하는 데는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약이다.
사법인(四法印)에도 열반적정이 있다.
심여실제무여등(心如實際無與等)하야 : 마음이 실제와 같아서, 실리와 같아서 더불어 같을 이가 없어서
전향보리영불퇴(專向菩提永不退)로다 : 오로지 보리를 향해서, 깨달음을 향해서 영원히 물러서지 않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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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승행무퇴겁(修諸勝行無退怯)하고:모든 수승한 행을 닦아서 물러서거나 겁내지 아니한다. 수승한 행이란 보살행이다. 이것은 열반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증엄스님 이야기를 자꾸 하는데, 그 스님이 이 시대의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은 실재하는지 안하는지 알 길이 없다. 지장보살도 마찬가지고 문수,보현도 마찬가지로 거의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보살이지만 실제로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은 증엄스님 같은 분이다. 스님이 교회를 지어주는 것은 우리 한국 같은 소승불교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한국 불교는 거의라고 할 수 있는 8, 90퍼센트가 소승불교다.
증엄스님 같은 이들은 보살행을 하느라 위파사나니 힐링이니 마음다스림이니, 관찰이니 할 시간이 없다.
‘내가 편안해야지,내가 열반해야지,내가 행복을 찾아야지’ 하는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일이지, 진정 보살은 봉사 활동하느라고 보살행을 하느라고 그런 것을 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되어야지 정상적인 불교다.
모든 승행을 닦아서 물러서거나 ‘내가 저렇게 봉사하고 희생하면 내가 손해보고, 나는 뒷일을 어떻게 하라고?’ 하고 겁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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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에서는 춘성스님 이야기를 자주 한다.
추운 겨울 날, 길도 아주 험할 때였는데 춘성스님이 종로역에서 기차를 타고 망월역에서 내리는데 노숙인이 기차역에서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다 벗어주고 내복 바람으로 그 높은 망월사까지 올라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선사의 기개다. 제대로 된 선사는 그렇게 겁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올라가다 내가 얼어 죽을 텐데.’ 하는 생각이 없다.
하루는 춘성스님에게 어느 신도가 49재를 지낸다고 돈을 잔뜩 갖다 주니까 거지들에게 다 나눠줘 버리고, ‘아이고 오늘 49재 잘 지냈다’ 했다는 것이다.
신도들이 와서 따지면 하면 그 체면을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 소인들은 그런 겁부터 내서 도저히 못하는 일인데 춘성스님은 거리낌 없이 그런 일을 했다.
신도가 49재를 지내러 오니 아무 것도 차린 것이 없이 냉수 한 사발 떠놓고 ‘엊그저께 49재 잘 지냈어요’하였다는 것이다.
거지들에게 재비를 다 나눠주고 ‘아이구 오늘 49재 잘 지냈다. 그 동안 제일 잘 지냈다.’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미담으로 내려오는 것은 다 이런 경전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보살의 수승한 행은 소인들에게 참 겁나는 일이다.
안주보리부동요(安住菩提不動搖)하야 : 깨달음의 이치에 안주해서 동요하지 않는다.
불급보살여세간(佛及菩薩與世間)과:부처님과 보살과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진어법계개명료(盡於法界皆明了)로다:모든 법계를 다 환하게 꿰뚫고 있다. 이것은 초발심한 보살이 부처님세계도 보고, 일반보살의 세계도 보고, 세상세계도 본다. 온 세계를 명료하게 환히 꿰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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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득최승제일도(欲得最勝第一道)하야 : 가장 수승한 제일의 길. 최고가는 삶의 길을 얻어서
위일체지해탈왕(爲一切智解脫王)인댄: 일체지해탈왕이 되고자 할진댄.
일체지해탈왕은 바로 부처의 삶이다. 부처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부처님의 경지를 최승제일도, 일체지해탈왕이라고 표현했다.
응당속발보리심(應當速發菩提心)하야 :마땅히 빨리 보리심을 발하라. 제발 보리심부터 발하라.
그래서 초발심공덕이 이렇게 장황한 것이다. 빨리 보리심을 발해서
영진제루이군생(永盡諸漏利群生)이어다 :영원히 온갖 번뇌 다 떨쳐버리고 군생을 이롭게 하라. 보살행으로 나아가면 온갖 번뇌가 싹 사라진다.
하루에 열 시간씩 좌선하고 무릎이 닿도록 절하고 해서 번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으로 직행하는 사람에게 번뇌가 바로 그 순간 사라진다. 보살행하기 바쁜데, 언제 마음을 다스리고 무슨 예의주시하고, 호흡을 관찰하는가? 세상은 이렇게 불타고 있고, 고통 받는 중생이 그렇게 많은데, 그러한 시시한 소리를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응당 빨리 보리심을 발해서 번뇌니 하는 것을 다 무시해버리고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할지어다.’하는 구절이 ‘진실한 지혜’라고 하는 과목밑에 달려있다.
오늘 화엄경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박수소리)
하강례
문수선원의 팔각등
문수선원에 다시 새로운 등이 걸리기 시작했다.
인터넷 염화실을 아는 분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찬하는 은은한 한지등이다.
모양이 늘 정해져 있으니 올 해는 무슨 색깔 등에 내 이름이 붙을까, 인터넷 염화실에 사진이 올라오면 제일먼저 궁금해 하기도 한다.
어느 분이 아름다운 글씨로 이름표를 붙여줄까, 가끔 서울에서 모인 염화실 분들은 등표에 붙은 글씨를 찬탄하기도 한다.
이번에 새로 글씨 쓰기에 참여한 분이 있어서 보살님들이 등표 글씨를 큰스님께 보여드렸다.
“음 잘 썼다.” 하고 큰스님께서 그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확인하셨다.
*
등은 일년동안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는데, 다시 뜯어 새 종이를 붙인다.
전제적으로는 둥글지만 작게작게 나뉘어 각이 진 팔각등은 화학시간에 배운 분자모형을 닮았다. 구가 아니라 각이 져야 더욱 강력한 결합을 할 수 있다고도 배웠던 것 같다.
*
법회가 끝나고 다음날의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여러 언론사의 불교담당 기자들이 큰스님의 방에 모여서 질문들을 했다.
“스님은 큰병고를 겪으셨는데요. 그 전과 그 이후 달라지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스님 돈이 권력인 이 세상에 화엄경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하는 질문들도 있었다.
그 때 그 예기치 않았던 큰 병고가 큰스님에게는 등갓도 날라가고 등표도 날라간 캄캄한 어둠이었을까?
*
어둠속에서 등불은 오직 빛이 되거나 어둠이 될 뿐이다.
모르면서 우리는 서로의 빛을 좇아 이 자리에 모였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빛으로 오신 부처님
천상천하유아독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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