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FROM VINNĀṆA ARISES NĀMARŪPA
Because of rebirth consciousness there arise mental phenomena associated with it such as feeling, remembering, perception, reflection, etc together with the three kalāpas or thirty rūpas.
26. 식(識)을 조건으로 정신· 물질[名色]이 일어난다
재생연결식 때문에 그와 관련된 느낌[受], 기억, 인식[想], 조사 등의 정신현상이, 30개의 물질들인 3개의 깔라빠들과 함께 생깁니다.
After the cessation of rebirth consciousness cetasikas (mental factors) arise in the wake of every activity of vinnāṇa and so do rūpas conditioned by citta, kamma, utu (heat) and āhāra (nutriment).
재생연결식이 소멸한 다음에 마음부수(cetasika)들이 식의 활동에 뒤이어 일어나고 마음(citta), 업(kamma), 온도(utu), 음식(āhāra)에 조건 지어진 물질들도 그렇게 일어납니다.
There is no doubt about the close connection between citta and cetasika. When citta is active, we feel, we remember, we think, there arise greed, anger, faith and so forth.
마음(citta)과 마음부수(cetasika)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음(citta)이 활동하고 있을 때 우리는 느끼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탐욕, 성냄, 믿음 등이 생깁니다.
Equally obvious are the physical phenomena that stem from cittas. We stand, sit, go or do anything that we wish to do.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citta)에서 물질적 현상이 생기는 것도 명백합니다. 우리는 서고, 앉고, 가거나, 하고자 하는 행동을 합니다.
According to the commentary, this obvious fact gives ground for our knowledge that the rebirth consciousness at the moment of conception leads to the three kalāpas or thirty rūpas.
주석서에 따르면 이 명백한 사실은 수태 순간의 재생연결식은 30개의 물질들인 세 가지 깔라빠들에 이른다는 우리의 지식의 근거가 되어줍니다.
In fact the arising of rebirth consciousness and rūpa at the moment of conception takes place in a split second and as such it is invisible even to the divine eye.
사실, 수태의 순간 재생연결식과 물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생기기 때문에 하늘 눈[天眼]으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The divine eye may see what happens shortly before death and after rebirth but it is only the Buddha’s omniscience that sees death-citta and rebirth-citta directly.
하늘 눈[天眼]은 죽기 바로 직전과 재생 뒤에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의 마음(cuti-citta)과 재생연결식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뿐입니다.
But from what we know about the cause of physical phenomena, we can infer the arising of rþpa from the rebirth-citta at the moment of conception.
하지만 우리가 아는 물질적 현상의 원인에 대한 지식을 통해 수태되는 순간의 재생연결식에서 물질이 생겨난다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Some physical phenomena have their origin not in citta but in kamma, utu (heat) and material food but without citta they will have no life.
어떤 물질적 현상은 마음(citta)이 아닌 업(kamma), 온도(utu), 물질적인 음식(āhāra)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마음이 없다면 생명도 없을 것입니다.
A corpse is lifeless although it is composed of utujarūpas. It is because of the contribution of citta that the rūpas based on kamma, utu and nutriment exist and form a continuous stream of life.
송장은 온도에서 생긴 물질(utuja-rūpa)로 이루어져 있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업(kamma), 온도(utu), 음식(āhāra)에 기반하고 있는 물질(rūpa)이 존재하고 지속적인 삶의 흐름을 이루는 것은 바로 마음(citta)이 있기 때문입니다.
Once death supervenes, cutting off the stream of consciousness, the cetasikas and living rþpas cease to exist. Hence the teaching that næmarþpa is conditioned of vinnāṇa.
일단 식의 흐름이 끊어져서 죽게 되면 마음부수와 살아있던 물질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에서 정신 물질이 식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다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Because of saṅkhāra (good or bad kamma) there is an uninterrupted flow of vinnāṇa in the new existence. Coupled with every citta is nāmarūpa which arises ceaselessly.
선하거나 불선한 상카라(saṅkhāra)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생에서 식(viññāṇa)의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각 마음(citta)과 결부된 것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신· 물질(nāma-rūpa)입니다.
The duration of næmarþpa depends on citta. If citta lasts an hour, so does nāmarūpa. If the stream of citta flows for 100 years, we say that the life of nāmarūpa is 100 years.
마음이 한 시간 동안만 지속한다면 정산과 물질도 그러합니다. 만약 마음(citta)의 흐름이 100년 동안 지속된다면 우리는 정신과 물질의 수명도 100년이라고 말합니다.
In short, we should understand that life is only the continuum of ceaseless causal relationships between næmarþpa and vinnāṇa.
간단히 말해서, 삶이란 정신· 물질(nāma-rūpa)과 식(viññāṇa)의 끊임없는 인과관계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To sum up what we have said so far. Avijjā causes saṅkhāra. Because of the ignorance of the four noble truths people exert effort (saṅkhāra) to be happy.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요약합니다. 무명이 상카라를 일으킵니다.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명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기울입니다[saṅkhāra].
They think that they will be happy if they get what they want. But the objects of their desire are impermanent and so they lead to suffering.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대상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에 이릅니다.
Not knowing the truth about dukkha, they think, speak and do things for their welfare in the present life and hereafter. These kammic actions lead to rebirth consciousness in the lower or the higher worlds.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모르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의 행복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업지음은 낮거나 높은 세계에서 재생연결식에 이릅니다.
Beginning with this rebirth consciousness there is a stream of citta that flows continuously until death and the nature of this mental life is determined by kamma.
이 재생연결식으로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마음(citta)의 흐름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이러한 정신적 생명의 본성은 업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The physical body too is conditioned by kamma as well as by citta, utu (heat) and nutriment.
물질적인 몸도 업(kamma)을 비롯한 마음(citta), 온도(utu), 음식(āhāra)에 의해서 조건 지어집니다.
The physical phenomena as conditioned by citta are obvious for all our bodily and verbal actions such as moving, speaking, etc., are rooted in citta.
움직이고 말하는 등의 모든 몸과 말로 하는 행동들이 다 마음에 근거를 두고 생기기 때문에 물질적 현상들은 마음(citta)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The yogi has to practise mindfulness on the basis of these cittajarūpas and it is important to know them empirically for himself.
수행자는 이러한 마음에서 생긴 물질(cittaja-rūpa)에 기반을 두고 알아차림(sati)를 닦는 수행을 해서 그것들을 체험으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Hence the Buddha’s teaching in Mahāsatipatthāna sutta; “The bhikkhu knows that he walks when he walks and that he stands when he stands.”
그렇기 때문에 「대념처경」(D.22)에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비구는 걸을 때 자신이 걷고 있음을 알고, 서 있을 때 서 있음을 안다.”
According to the commentary, if we know experientially the dependence of cittajarūpa on citta, we can know by inference the contribution of vinnāṇa to kammajarūpa, cittajarūpa, utujarūpa and aharajarūpa.
주석서에 따르면 마음에서 생긴 물질(cittaja-rūpa)이 마음에 의존함을 체험으로 안다면 우리는 식이 업에서 생긴 물질(kammaja-rūpa), 마음에서 생긴 물질(cittaja-rūpa), 온도에서 생긴 물질(utuja-rūpa), 음식에서 생긴 물질(āhāra-rūpa)에 기여함을 추론으로 알 수 있습니다.
Hence the teaching of Paticcasamuppada: Conditioned by vinnāṇa, there arises nāmarūpa.
그렇기 때문에“식(識)으로 인하여 정신· 물질[名色]이 일어난다.”라는 12연기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26. 식(識)을 조건으로 정신· 물질[名色]이 일어난다 (2)
The yogī cannot know empirically the rebirth-citta or for that matter any other citta in the past in its ultimate sense.
수행자는 경험적으로는 재생연결식을 체험으로 알 수 없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과거의 다른 어떤 마음(citta)도 그 궁극적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All that he can know is the reality about consciousness as it is functioning at present and he can know this only if he is always mindful.
식은 바로 지금 작용하고 있고 수행자가 항상 알아차리고만 있다면 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수행자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식에 대한 실체입니다.
If he focuses on present vinnāṇa, he comes to know næmarþpa fairly well. For if he notes “seeing, seeing” and knows the eye-consciousness, he also knows the nāmarūpa that is bound up with it.
수행자가 현재의 식에 주의력을 모으면 정신· 물질[名色]을 아주 잘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봄, 봄”이라고 주시하면 그는 안식을 알며 그 안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신· 물질[名色]도 알게 됩니다.
Here by eye-consciousness we mean not only the eye-vinnāṇa but the whole mental process of seeing (cakkhudvāra-vithi). The yogi notes it as a whole and not by piecemeal.
여기서 안식이라 함은 단지 안식만이 아니라 보는 전체 안문인식과정(cakkhu-dvāra-vīthi)을 뜻합니다. 수행자는 이를 한 단계별로가 아닌 전체과정으로 주시합니다.
Moreover, the vithi appears to the yogi as a single unit of consciousness. This way of introspection is in accord with Patisambhidāmagga which says: “The citta that focuses on rūpa arises and passes away. The yogi then contemplates the dissolution of the citta that has watched the dissolution of the rūpa.”
게다가 인식과정(vīthi)은 한 개 단위의 식으로써 수행자에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통찰 방식은 「무애해도(無碍解道)」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과 일치합니다.“물질(rūpa)에 주의력이 모아진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러면 수행자는 물질의 소멸을 주시한 마음(citta)의 소멸을 관찰한다.”
In other words, when the rþpa is manifest, the citta watches it; but since the citta has attained bhaṅga insight, it too sees impermanence in the rūpa and dissolves away.
다른 말로 하면, 물질(rūpa)이 나타나면 마음(citta)은 그것을 주시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를 증득했기에 마음은 물질의 무상함도 보고 사라집니다.
The dissolving vipassāna citta itself becomes the object of contemplation. This vipassāna citta is not a simple citta; it is composed of at least avajjāna and seven impulse moments.
사라지는 위빠사나의 마음(vipassana-citta)자체는 관찰의 대상이 됩니다. 이 위빠사나의 마음은 단순한 마음(citta)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의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과 7개의 속행(javana)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But these eight cittas cannot be watched one by one; the whole vithi is to be the object of attention.
하지만 이들 여덟 가지 마음(citta)은 하나하나씩 주시할 수는 없으며 전체인식과정(vīthi)이 주시의 대상이 됩니다.
Here the eye-consciousness means the whole mental process (vithi) of seeing and it includes good or bad kamma and impulses. So attentiveness to it leads to awareness of vedanā (feeling) sannā (perception) phassa (contact) manasikāra (reflection) cetanā (volition) and so forth.
여기서 안식은 보는 정신적 인식과정(vīthi) 전체를 뜻하며 선업이나 불선업, 그리고 속행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에 주의를 기울이면 느낌[受], 인식[想], 감각접촉[觸], 주의 기울임[作意], 의도(cetanā)등을 알게 됩니다.
But cetanā is more apparent in connection with thinking. Thus it comes into full play when at night we think of what we have to do the next day. It urges and agitates us and its function is unmistakable.
하지만 의도는 생각하는 것과 관련해서 더 확연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밤에 다음 날 하지 않으면 안될 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의도가 왕성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추키고 재촉하며, 그 기능은 명백합니다.
The yogī who constantly watches his nāmarūpa is aware of cetanā in action whenever he speaks or moves any part of his body. For example, if, while practising mindfulness, you feel an itch, you wish to get rid of it.
자신의 정신과 물질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수행자는 말하거나 자신의 몸의 어느 부분을 움직일 때마다 항상 의도(cetanā)를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알아차림(sati)을 닦는 동안 가려움이 느껴지면 그 가려움을 없애고자 할 것입니다.
You note the desire and you feel as if you are being urged to remove the itch. It is cetanā which urges you to do and so it is manifest in your everyday action, speech and thinking.
여러분은 그 의도를 주시하고 그 가려움을 없애려는 부추김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재촉하는 의도로, 이 의도는 매일의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표출됩니다.
In short, if you know the eye-consciousness through contemplation, you know the nāma (mental) khandhās that are born of it as well as the rūpas of the whole body that form its basis.
간단히 말해서, 관찰을 통하여 안식(眼識)을 알게 되면 안식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무더기[名蘊]들만이 아니라 안식의 토대를 이루는 전체 몸의 물질들도 알게 됩니다.
This is in accordance with the teaching; “From vinnāṇa there arises nāmarūpa.”
이는 다음 가르침과 일치합니다.“식(識)에서 정신· 물질[名色]이 일어난다.”
The same may be said of the consciousness in connection with hearing, etc., awareness of vinnāṇa means awareness of all the nāma and rūpa that are bound up with it.
들음 등과 관련된 식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식을 아는 것은 식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모든 정신· 물질[名色]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The awareness of contact is bases on pleasant and unpleasant sensations, when these sensations are manifest; it is based on contact when motion and rigidity are manifest; when you note the desire to bend the arm, you know the volition (cetanā) behind it.
감각접촉을 아는 것은 즐겁고 괴로운 느낌들이 생길 때 그것들을 기반으로 합니다. 감각접촉은 움직임과 딱딱함이 드러날 때에도 그들에 기반을 둡니다. 팔을 굽히고자 하는 욕구를 주시할 때는 그 뒤에 있는 의도(cetanā)를 압니다.
When you contemplate the vinnāṇa which thinks, you know the nāmarūpa that is coupled with it.
생각하고 있는 식을 관찰할 때에는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정신과 물질(nāma-rūpa)을 압니다.
When you find yourself committing something to memory, you know sannā; when you note your intention to do or speak something, you become aware of cetanā; when you note your desire for something, you know that it is your lobha.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것을 알 때는 인식(saññā)을 압니다. 어떤 것을 하거나 말하려는 의도를 주시할 때는 의도를 압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을 주시할 때 그것이 자신의 탐욕(lobha)임을 압니다.
When you note your irritation, you know that it is dosa; you know moha when you note your view of a being in terms of a permanent and happy individual.
자신의 짜증을 주시할 때 그것이 성냄 (dosa)이라고 알며, 존재(有)를 영원하고 행복한 자아로 보는 자신의 견해를 주시할 때 어리석음(moha)임을 압니다.
You know alobha when you know the lack of desire in you. Moreover, your intention to do or say something is followed by bodily behaviour or verbal expression! and so through contemplation you become aware of vinnāṇa-citta as the cause of rþpas in the body.
내 안에 바라는 것이 없다고 알 때 탐욕 없음(alobha)을 압니다. 게다가, 무언가를 행하거나 말하려는 자신의 의도에 뒤이어 행동이나 말을 하면, 관찰을 통해 몸에 있는 물질의 원인으로서 식과 마음(viññāṇa-citta)을 알게 됩니다.
Vinnāṇa and nāmarūpa are interdependent. Just as vinnāṇa gives rise to nāmarūpa, so also nāma-rūpa leads to vinnāṇa. Nāmarūpa contributes to vinnāṇa by way of simultaneous arising (sahajāta-paccaya) foundation (nissayapaccaya) and so forth.
식과 정신· 물질[名色]은 상호 의존합니다. 식이 정신· 물질[名色]을 생기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 물질[名色]도 식의 원인이 됩니다. 정신· 물질[名色]은 함께 생긴 조건(sahajāta-paccaya), 의지하는 조건(nissayapaccaya)등으로 식에 기여합니다.
It is only through the contribution of all cetasikas collectively or the body (rþpa) as the physical basis, etc that vinnāṇa comes into being.
모든 마음부수들의 집합적으로 기여함이나 물질적 기반인 몸(rūpa)의 기여로써만 식이 존재에 일어납니다.
Mahāpadāna sutta tells us how the bodhisatta reflected on dependent origination just before he attained enlightenment. He found nāmarūpa, six bases of mental activity, impression, feeling, craving, clinging and becoming (bhava) to be the links in the chain of causation leading to old age and death.
「대전기경(大傳記經 Mahapadana sutta)」(D.14)은 깨달음을 얻기 바로 직전에 보살이 어떻게 12연기를 숙고했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보살은 정신· 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 갈애[愛], 취착[取]과 존재[有]가 늙음과 죽음[老死]에 이르는 인과의 사슬이 됨을 발견했습니다.
Then it occurs to him that nāmarūpa is conditioned by vinnāṇa and vice-versa. The sutta ascribes this statement about the correlation between vinnāṇa and nāmarūpa to Vipassi bodhisatta but we should understand that it is a fact discovered by all bodhisattas before they attained supreme enlightenment.
그리고는 정신과 물질은 식을 조건으로 하며, 거꾸로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대전기경」은 위빳시(Vipassi)보살이 식과 정신· 물질[名色]의 상호관계에 대해 숙고한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모든 보살들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발견한 사실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Although vinnāṇa and nāmarūpa are interdependent, the former is the determining factor and hence it is described as the cause of nāmarūpa. In fact, when vinnāṇa arises because of saṅkhāra, its concomitant cetasikas as well as the rūpas resulting from saṅkhara come into being at the same time.
비록 식(識)과 정신· 물질[名色]이 상호의존 하기는 하지만 식이 결정하는 요인이므로 정신· 물질[名色]의 원인으로 설해집니다. 사실상, 상카라로 인하여 식이 생길 때 식의 부수물인 마음부수들과 상카라에서 생긴 물질들이 동시에 존재[有]로 들어옵니다.
So vinnāṇas and nāmarūpas arise together from the moment of rebirth. Moreover, vinnāṇa and nāmarūpa include the six āyatanas (the six bases or sense-organs) as well as phassa (sense-contact) and vedanā (feeling).
그러므로 재생의 순간에서부터 식들과 정신· 물질이 함께 생깁니다. 게다가 식과 정신· 물질[名色]은 여섯 감각장소[六入]과 감각접촉[觸]과 느낌[受]을 포함합니다.
But since vinnāṇa is the cause of nāmarūpa and nāmarūpa the cause of salhāyatana and so forth, the Buddha says: Vinnāṇa paccaya nāmarūpa, etc to distinguish between cause and effect.
그러나 식은 정신· 물질[名色]의 원인이고 정신· 물질[名色]은 여섯 감각기관[六入]이 원인이므로 부처님께서는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식(識)을 조건으로 정신· 물질[名色]이 일어나며...”
Likewise a verse in the Dhammapada describes the mind (mano or vinnāṇa) as leading the cetasikas: manopubbaṅgamā dhammā; if a person acts or speaks with an evil mind, suffering follows him as a result, just as the wheels of a cart follow the ox which draws it.
마찬가지로 「법구경」은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마음(mano 또는 viññāṇa)이 마음부수(cetasika)를 앞서간다. 불선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소의 뒤를 따르듯이.”
In point of fact citta and cetasikas arise together but because of its predominant role citta is described as leading the latter. If a man’s mind is evil, he does evil deeds, utters evil words and harbours evil thoughts.
실제로는 마음(citta)과 마음부수(cetasika)가 함께 생기지만 마음의 지배적인 역할 때문에 마음이 마음부수들을 앞서 간다고 설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악하다면 그는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말을 하고 나쁜 생각을 품습니다.
These three kinds of kammas are saṅkhāras born of ignorance. They become potential for evil kammic effect. Every deed, speech or thought is accompanied by seven impulse-moments that flash forth several times. If the first impulse-moments are favourable, the kamma is productive in the present life; otherwise it becomes sterile.
이 세 가지 종류의 업은 무명에서 생긴 상카라들입니다. 그것들은 악한 과보의 잠재력이 됩니다. 모든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의 뒤에는 몇 번씩 나타나는 일곱 개의 속행이 따라옵니다. 만약 첫 번째 속행이 우위에 서면 현생에서 업은 효력을 발생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효력을 상실합니다.
If one of the seven impulse-moments is favourable, it gives rise to kammic images or visions of afterlife on death-bed and produce kammic effect in the next life.
만약 일곱 개의 속행중 하나가 우위에 서면, 임종의 순간에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을 일으키며, 내생에 업의 효력을 발생합니다.
Otherwise it is sterile. As for the other five impulse-moments, they produce kammic effect from the third existence till the last existence (the existence when Nibbāna is to be attained) under favourable circumstances. It becomes sterile only after the attainment of Nibbāna.
그렇지 않으면 그 효력을 상실합니다. 다른 다섯 개의 속행들은 적절한 환경을 만났을 때 세 번째 생에서부터 마지막 생(열반을 성취할 때의 생)까지 업의 효력을 발생합니다. 열반을 성취하고 나서야 비로소 효력을 상실합니다.
Before the attainment of Nibbāna its potential remains intact for innumerable lifetimes, ready to bear fruit when circumstances permit. It bears fruit in terms of suffering, both mental and physical, in the lower worlds.
열반을 성취하기 전에는 수많은 생애 동안 업의 잠재력이 원래대로 남아 있어서, 환경이 조성되면 과보를 맺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다 낮은 세계에서 정신적 육체적인 면에서의 고통을 가져옵니다.
If by virtue of good kamma the person is reborn in the human world, he will be
dogged by evil kamma and suffer regardless of his station in life.
선업의 공덕으로 인간계에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삶의 지위와 상관없이 악업이 따라와서 괴로움에 시달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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