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의 글 끝부분에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여기에서 ‘가르침’이란 좁은 의미로는 경전에 담긴 가르침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교외별전이라 하면 경전에 담긴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다는 뜻이고, 그 다른 방식이라는 것이 바로 이심전심이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이심전심이라 하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속마음이 전달되어 알아준다는 뜻이고,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편 목적이 가르침을 전하는 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야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도 새삼스럽게 그 점을 힘주어 얘기하는 하는 것이 좀 우습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선종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교인들이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 점을 망각하고 엉뚱한 데에다가 힘을 다 쏟고 있었다. 아무튼, 마음을 전하다니, 그게 도대체 뭘까? 그것은 아마도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종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 석가모니로부터 가섭(迦葉)으로, 그 다음에는 아난(阿難)을 거쳐 쭉 내려와 달마(達摩)로 이어지고 달마가 중국으로 와서 또 계속해서 등불을 전했다는 이른바 전등(傳燈)의 역사이다. 그 전등과 전심(傳心)은 아마 같은 것일 터이고, 그렇다면 이심전심이라는 구절에서 말하는 마음은 곧 부처님으로부터 쭉 전해진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선종에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구호, 즉 ‘가르침 밖에서 따로 전한다’는 구호에 흔히 따라 붙는 구절이다. 전한다고 하면 대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뜻인데, 가르침 밖에서 따로 전한다 하면 과연 무엇을 전한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교외별전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요, 언어문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즉, 부처님이 가르침을 편 취지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이지 가르침을 펴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즉, 경전의 문구를 가지고 씨름하는 데 몰두하다보니 정작 경전에 담긴 가르침의 취지를 실천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그 많은 설법을 통해서 전하려고 한 것은 그 숱한 까다로운 개념이나 교리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신의 깨달은 체험이 아니겠느냐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선종 사람들이 힘주어 되풀이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부처님의 어떤 마음? 부처님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 나를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 우리가 이심전심이라고 하면 흔히 그런 마음 또는 의기투합된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선에서 말하는 이심전심의 마음은 아무래도 그런 것만은 아닐 듯하다. 선사들의 설법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음이라는 말이고,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아무래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과는 일단 좀 다른 듯하다.
예를 들어 <마조록(馬祖錄)>에서 ‘모든 존재와 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유래하며 모든 명칭 또한 마음의 다른 이름이고, 모든 존재와 현상이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니 마음이야말로 모든 것의 근본’(一切法皆是心法 一切名皆是心名 萬法皆從心生 心爲萬法之根本)이라고 한 그런 뭔가 심각한 의미의 마음인 것 같다. 그건 과연 어떤 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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