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

[스크랩] 禪門拈頌 35. 남을 위하지 않는 설법(不爲說法)

수선님 2018. 9. 9. 13:11

깨침과 깨달음

 

본칙


백장(百丈)에게 남전(南泉)이 와서 뵈니 백장이 물었다. “옛부터 선지식 가운데 남을 위하지 않는 설법이 있었소?”

남전이 말했다. “있었소.”

선사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남을 위하지 않는 설법이오?”

남전이 대답했다.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닙니다.”

선사가 말했다. “말해 마쳤구나.”

남전이 말했다. “저는 그렇거니와 화상은 어떠하십니까?”

선사가 말했다. “나는 선지식이 아니거늘, 어떻게 말하고 말하지 않음이 있음을 알겠소?”

남전이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내가 지나치게 그대를 위해 말했구나.”

염·송·어

설두현(雪竇顯)이 송했다.

“조불(祖佛)이 본래부터 남을 위하지 않거늘
납자들이 고금에 앞을 다툰다.
밝은 거울이 경대에 놓이자 온갖 물건 앞을 다투어 비추니
낱낱이 남쪽을 향해 북두성을 보려네.
북두 자루 드리워 찾을 길이 없으니
콧구멍을 잡고서 입을 잃는다.”

송원(松源)이 송했다.

“공자는 글자를 모른다 했고
달마는 선을 모른다 했건만,
대당(大唐) 천자님 나라는
여전히 삼천(三千) 세계를 다스린다.”

법진일(法眞一)이 염(拈)했다.

“이 머리만 있고 꼬리 없는 두 스님에게 제각기 20방망이를 갈겼으면 좋겠다. 지금 누군가 갑자기 나에게 묻기를 ‘옛부터 여러 성현들 가운데 남을 위하지 않는 설법이 있습니까?’ 한다면, 그에게 대답하기를 ‘있다’ 하리라. 그가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남을 위하지 않는 설법인가요?’ 하면 ‘제 각기 성인들에게 물어보라’고만 하리라.”

감상

남을 위하지 않는 설법이 있는가.

그렇다. 어떤 설법도 남을 위하는 것은 아니다. 조불(祖佛)은 원래 남을 위하는 자가 아니다. 그 스스로 맑을 뿐이다. 맑기 때문에 맑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추어 깨닫게 하는 것이다.

조불이 맑은 것은 본연의 심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글을 모르고 달마가 선을 모른다는데 어디서 가르침을 구할 것인가. 법진일이 염한대로 제 각기 성인에게 물어보라. 더 이상 발설하는 것은 위험하다. 지나치게 말하지 말라. 남을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최동호/고려대 국문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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