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실천강의

9~12분 금강경 핵심강의

수선님 2017. 12. 10. 14:06

● 第九分 一相 無相分 (깨달음이란 상도 없다)

◯ “一相無相”의 의미는 아무리 궁극적인 실체의모양(일상)
   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모양으로써 취할수 있는 상
   이 아니라는(無相) 말이다. “一相” 이란 궁극적인 깨달    
   음의 경지 즉 해탈과 열반의 모습을 말한다 (199)

◯ 우리는 보통 해탈이다. 열반이다. 부처다 라고 하면 어
   떤 모습을 떠 올리곤 한다. 위엄 있고 근엄한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린다거나. 해탈의 세계. 열반의 세계를 떠올
   리면서 그것은 늘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천상
   일 것이라는 등의 모양을 세우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
   이란 모양 없음을 말한다. 일체의 모든 상이 타파된 자
   리를 해탈. 열반 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약속 했을 뿐이
   다. 그런데 상이 타파된 자리를 갖이고 또 다른 모양
   (해탈의 세계. 열반의 세계등)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
   은 일이다 (201)

◯ 깨달았다고 할 내가 없는것이 깨달음 이다. 我相을 비
   롯한 일체 모든 상을 여읜것이 깨달음 이며. 無我의 증
   득이 깨달음 일진대 “나는 깨달았다”고 했다면 그것은
   벌써 한참을 어긋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을 주체가 없
   다. 어리석은 중생과 깨달은 성인이 둘이 아니다. 생사
   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그러한 툭터진 텅빈 깨달음의
   자리에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끼어들 틈이 없다(201)

?� 三法印 : 이세상 모든 존재의 변하지 않는 세가지법칙
                                                (202)
  • 諸行無常 : 끊임 없이 변한다는 진리
  • 諸法無我 : 항상하지 않고 흐르므로 고정된 실체로서
               의 자아가 없다
  • 一切皆苦 : 항상하지 않고 실체적 자아가 없는것은 괴
              로움 이다

◯ 須陀洹 이란 말은 預流 혹은 入流라 번역 한다. 이는
   곳 흐름에 든자를 말한다. 흐름에 들었다는 말은 무엇
   인가. 流는 깨달음. 성도. 해탈. 열반을 의미 한다. 즉
   수행을 통해 이제 막 깨달음의 흐름에 든자를 수다원
   이라고 말한다 (202)

◯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저 있는 그대로 놔두라. 어떻
   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어떻게 바꿔보려고 다투지 말
   라. 그냥 변화라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대로 놓아 두기
   만 하면 된다. 그 흐름에 내 존재를 맡기고 함께 따라
   흐르라. 변하지 않는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 삶의 목적이 “변치 않음” 의 추구에 있다는것
   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세상을 그냥 놓아 두라.
   어떤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 하지 말라. 머물러 있지 말
   라. 그저 흐르도록 놓아 두라.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면
   저절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정
   확히 있어야 할 일이 있어야 할때에 있어야 할곳에서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세상을 法界 라고 하는 것이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흐르는 세계라는 뜻이다 (205)

◯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부처님의 수행은 오직
   이것이다.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변하
   는대로 그냥 두라. 다만 그 흐름에 들라 (205)

◯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주체와 대상은 무엇인가. 주
   체는 우리몸의 감각기관인 六根이다. 대상은 六境이다
   괴로움의 주체인 육근이 그 대상인 육경을 접촉 하면
   서 좋고. 싫고. 그저 그런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은
   연이어 애욕과 집착을 불러온다.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집착하여 머무는것은 모든 괴로움의 뿌리이다 (208)

‣ 육근이 유경을 촉하면서 그 육경에 대해 좋고 싫은 느
   낌과 애욕과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기 때문에 육근이 육
   경을 맏날 때 그 육경이란 대상에 끄달리지 않고 머물
   지 않는것이 수행의 핵심이 된다 (209)

◯ 수다원이 되어 진리의 흐름에 들게 되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머물
   지 않기 때문에 이미 십이 연기의 명색-육입-촉-수-애
    -취 라는 흐름을 끊어 버렸다 (210)

?� 業이 있는 이상 輪廻의 사슬을 완전히 끊을수없다(211)
  . 業 :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 業識 : 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와 말과 생각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 우리는 깨닫지 못해서. 부처가 되지 못해서 괴로운것이
   아니다. 중생과 부처를 둘로 나누어 놓고 이쪽의 중생
   이 저쪽의 부처로 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괴로운 것
   이다. 이쪽저쪽은 없다. 중생과 부처도 없고. 생사와 열
   반도 없다. 오직 무분별로서. 무차별로서 큰 하나 일뿐
   이다. 전체로서의 하나일 뿐이다. 나눌 것이 없다. 나누
   지 않으면 그대로 부처 이지만 거기에는 부처라는 생각
   조차 없다. 어리석게 생각 하지 말라. 어리석게 깨닫고
   자 애 쓰지 말라. 깨닫고자 애쓰면 벌써 다툼이 생긴다.    
   깨닫지 못한 나와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나 사이에 간    
   격이 생겨나고 차별이 생겨 난다. 그때 그들은 서로 끊    
   임 없이 다투게 된다. 그랬을때 깨달음은 멀어진다. 깨    
   닫고자 애쓰면 애 쓸수록 다툼은 더욱 커져만 간(216)

◯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로 나아 간다는 착각. 바로 그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깨달음은 멀어진다. 중생이고 수
   행이고 부처고 이 모든 나뉨과 분별을 다 놓아 버렸을
   때 깨달음은 향기롭게 피어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중생과 상반되는 부처가 아니다. 중생이 깨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은 없어지고 깨달음을 얻은 부
   처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직 텅 빌뿐이다. 부처도 중
   생도 사라지고 오직 텅빈 충만이 현현할 뿐이다 (216)

◯ 깨달은 자가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다라고 할수 있겠는
   가. 그럴수 없다. 깨달을 주체가 없다. 깨달은 자가 없
   는데  어찌 “나는 깨달았다” 라는 생각이 있을수 있겠
   는가. 그래서 깨달은 자는 없고 오직 “깨달음의 행위”
   만 존재 한다고 했다. 깨달은 자는 매 순간 순간 깨어
   있는 행위를 할뿐이지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다”라는
   생각이 없다. 다만 깨어 있는 행위가 그 모든 것을 대
   변 해주고 있다 (218)


● 第十分 莊嚴 淨土分 (정토를 장엄 하다)

◎ 不應住 色生心. 不應住 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한데 있다. 일체를 가만히 놔두
    면 저절로 얻어 진다. 그냥 놓아두면 된다. 놓아버리는
    순간 영원한 대 자유가 찾아 온다. 그것은 얻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일체의 고요를 되 찾게 되
    는 것이다 (229)

◯ 푹 쉬었을때 이 가짜의 나는 활동을 멈추고 내면의 “그
   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한마음 이라고 해도 좋고. 참나
   부처. 자성 이라고 해도 그 어떤 표현을 써도 좋지만
   거기에 머무르지는 말라. 그 표현에 집착 하지 말라. 다
   만 다 놓아 버리고 그 어떤 것도 붓잡지 말며. 그저 푹
   쉬기만 하면 된다 (230)

◯ 공덕은 없다.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를 받을뿐. 아무
   리 복을 짓더라도 그것은 천상에 태어나거나. 조건 좋
   은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하는 그런 작은 과보만을 받을
   뿐이다. 물론 사람들 에게는 그런 과보처럼 크고 좋게
   보이는게 없을 테니 큰 공덕이라고 좋아 하겠지만 그것
   은 有漏의 공덕일뿐. 無漏의 공덕에 미칠수 없다 (234)

◯ 마땅히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마음을 낼것
   인가가 중요하다. 마땅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청정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며.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
   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어디
   에도. 어떤 바깥의 대상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고 마음
   을 내라는 것이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다 (237)

◯ 착한 일을 행하고도 거기에 마음이 머문다. “선행을 했
   다”는 상을 남기게 된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했다는데
   마음이 머물러 상을 남기게 되면 연이어 거기에 대한
   보상을 기대 하게 된다. 보상을 기대하는 그 어떤 바램
   도 우리를 괴롭게 할뿐이다 (237)

‣ 기대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이고. 바램이 있
   을때 그것의 성취 유무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 이라는
   두가지 극단의 마음이 이러나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이르켜 착
   한 일을 행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말이다. 선행을 하고
   도 선행을 했다는 상을 버려야 한다. 거기에 마음이 머
   물러 집착 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237)

◯ 열심히 수행을 하되 마땅히 머무는바 없이 수행을 할수
   있어야 한다. 수행 했다는 상을 내지 말고. 이만큼 수행
   했으니 곧 결과가 있겠지 하는 바램도 놓아 버리고. 수
   행이라는 그 자체에 머물러 집착 하지 말라는 말이다.
   수행을 했으니 곧 깨닫겠지. 혹은 이렇게 수행을 했는
   데도 왜 깨달음은 오지 않을까 하고 탓할 것은 없다.
   다만 수행을 할뿐이지 수행의 결과를 바란다거나. 내가
   행한 수행에 대해 바라는 바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
   은 집착 이며 집착은 괴로움 이다.
   수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 행하는 것으로써 완성 되는
   것이지. 그것이 미래의 어떤 깨달음을 위한 준비 과정
   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직 할뿐 바램을 놓아라.
   수행 이라는 말 자체가 머물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이
   함이 없이 하는 도리이다.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일으
   키는 법이다 (239)

◯ 좋고 싫은 느낌에 따라 모든 집착이 생겨 난다. 애욕이
   생겨 나고 증오가 생겨 난다.
   좋은 것을 더 갖고 싶은 것도 집착이며. 싫은 것을 버
   리 고자 애쓰는 것도 집착이다. 우리들이 괴로움을 느
   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육근과 육경이 접촉 하
   고 연이어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며 그에 따라 온갖
   집착이 생기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 집착이 바로
   “머무름” 이다 (240)

◯ 육경이란 대상에 대한 일체 그 어떤 분별도 다 우리들
   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거짓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세
   상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늘 如如하다. 다만 변
   할뿐 그 어떤 차별도 있지않다. 본질은 무엇이든 다 부
   처이며 청정한 것이다 (243)

※ 法身 부처님이 나로써 온전하게 나툴수 있도록 나의 모
   든것을 몽땅 부처님께 맏기고 가라. 완전하게 내맏기고
   완전하게 바치며 완전히 놓아 버렸을때 비로서 법신 부
   처님의 향기가 내 안에서 피어 오른다 (245)

◯ 머무는바 없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도 분별
   하거나 차별 하지 말아야 한다. 양극단을 설정해 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 대상을 분별 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은 세상을 올바로 정견으로 보는 눈이 아니다.
   오직 中道 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준다. 이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이나. 집
   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나. 분별을 버려야 한다는말이
   둘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말이 그대로 중도의 가르침
   이며. 緣起의 가르침 이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
   고인 三法印의 가르침 이다 (246)

  ‣ 육근(六入)과 육경(明色)이 접촉(觸) 함으로써 느낌(受)
    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좋고 싫은 애욕과 증오(愛)가
    일어 나고 그러므로 써 집착(取)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온갖업(有)을 짖게 되어 생노병사(生.老死)의 괴로움이
   시작 된다는 十二 緣起의 가르침 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246)
◯ 應無所住 以生起心 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을 놓아야 한다. 아니 머무는바가 없으면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 나지 않는다. 그 어떤 마음도 일어날것이
   없다. 바로 그때 일체 모든 분별이 타파 되며 그랬을때
   비로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보는 正
   見의 눈이 열린다 (246)

◯ 분별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아무런 마음도 내지 말아
   야 할것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행동도 하
   지 말며.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저 산의
   나무처럼. 저 들의 돌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가. 옳
   다 그르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내야 한다. 그러나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크다는 마음도 내고. 작다는
   마음도 낼수 있다. 그러나 크고 작음에 걸려 집착 하면
   안 된다. 옳고 그른 마음도 낼수 있어야 한다. 안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 갈수 있겠는가 (247)

  ‣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 하지 않아야 한다. 좋고 싫
   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수는 없다. 그러나 그 어느
   한쪽에 머물러 집착 하는 마음을 키우다 보면 집착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라 (247)

?� 十二緣起 (괴로움이 일어나는 열두 과정)

   . 無明 : 사제 (苦集滅道)에 대한 무지
   . 行 : 무명으로 일으키는 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식작용
   . 識 : 식별하고 판단 하는 의식 작용. 인식 작용
   . 名色 : 육근의 대상이 되는 육경
   . 六入 : 대상을 감각하거나 의식하는 안이비설신의작용
   . 觸 : 육근. 육경. 육식의 화합으로 일어나는 마음작용
   . 受 :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을 느끼는 감수 작용
   . 愛 : 갈애. 애욕. 탐욕
   . 取 : 탐욕에 의한 집착
   . 有 : 욕계 색계 무색계의 생존 상태
   . 生 : 태어나는 의식
   . 老死 : 늙고 죽는다는 의식


● 第十一分 無爲 福勝分 (무위의 복은 수승하다)

◯ 금강경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四句偈의 핵심은 무
   엇인가. 그것은 我相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그 어떤
   집착도 가져선 안 된다는 말이다. 일체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임을 알아 어디에도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
   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수지
   한다는것은 스스로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금
   강경의 핵심 가르침을 수지한 사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아상이 타파 되어 있다 (253)

◯ 물질적인 보시를 하면서도 無爲로써 행 할수 있고. 금
   강경 사구게를 들려주는 등 法보시를 하면서도 有爲로
   써 할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시
   하느냐가 아니라 無爲로써 했느냐 하는 점이다 (256)


● 第十二分 尊重 正敎分 (바른법을 존중 하라)

◯ 모든 존재는 六道를 윤회 한다. 육도는 다시 地獄. 餓鬼
   畜生 이라는 三惡道와 天. 人. 阿修羅 라는 三善道로 나
   뉜다 (264)

◯ 잡념과 욕심과 번뇌를 다 버리기 힘들다고 하니 금강경
   이든. 관세음보살 이든. 화두든 그 한가지에 집중 하고
   관함으로써 다른 일체의 모든 잡념을 한꺼번에 끊고 깨
   어 있을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금강경 독경을 통해
   얻을수 있는 첫 번째의 수헹은 바로 止觀, 定慧. 寂寂惺
   惺의 깨달음 인것이다 (267)

※ 그 모든 분별을 놓아 버려라. 이 세상엔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고 지금 이 순간 에도 아무 일도
   없다. 깨달음을 얻을 나도 없으며 내가 해야할 그 어떤
   수행도 없다. 오직 쉬기만 할뿐 이다. 아무것도 할게 없
   다 (268)

◯ 불교 에서는 信解行證의 네가지 단계로서 깨달음에 이
   른다고 보는데. 굳은 믿음(信)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해(解) 하고 가르침을 삶속에서 실천 하고 행(行)함으      
   로써 결국 깨달음을 증득(證) 할수 있다고 본것이(270)

◯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 自燈明. 法燈明 하라고 하
   셨다. 자등명은 自身 스스로를 법의 등불로 삼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기 안에
   서 깨달음을 얻는것이고. 법등명은 진리의 가르침이 담
   긴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270)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http://blog.daum.net/buda1109/13353923 블로그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