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실천강의

[스크랩] 이규호 법우 `금강경과 마음공부` 핵심요약

수선님 2017. 12. 10. 14:07

대한불청 법운 이규호 법우 글

제목: 금강경과 마음공부
법상스님 지음. 무한 출판사
2008.1.2시작 2008.1.10완독


**소중한 말씀들

5-우리들의 삶과 부처님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똑같이 먹고 자고 걷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깨어있는 정신으로 오직 그것을 할 뿐이며, 오직 매 순간순간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매순간 다른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목적지에 도달해 있다.

10-인간의 어리석은 분별심을 깨기 위해 똑같은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또 다시 사람들은 그 언어를 자기 식대로 이해할 것이고, 자기 사량으로 금강경을 판단하고 말 것이다. 언어는 진리를 그대로 전달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편견과 선입견들이 개입되어 있다.
언어를 쓰면서도 언어를 초월하여 진리를 담아낼수 있는 ‘언어 아닌 언어’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24-금강이란 불교적 의미로 첫째로 불성을 의미하며, 둘째로 반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34-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아무런 분별도 없이 무분별의 행을 한다는 말이며,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뜻이다.

36-사실 우리들이 무엇을 말할 때 대부분 ‘내말’인 것처럼 이야기하기 쉽다. 물론 내 말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말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책에서, 스승님들에게서 얻어 들은 말들이다. 그런 것들을 우린 오직 내 잣대, 색안경에 비추어 걸러내어 ‘내 식대로’조합하는 역할 정도를 할뿐이다. 그리고는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얻어 들은 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집하며 ‘내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물론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온전한 내 생각인 줄로 착각하고, 옳은 생각인 줄로 착각을 하고 산다.

41-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밥 먹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밥 빨리 먹고 나서 좌선에 들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오직 밥 먹는 그것이 그대로 목적이다.

44-그러나 그렇듯 평범하고 똑같아 보이는 일상일지라도 내면에 중심을 세우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보내느냐 그저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느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66-이미 깨달음이 직전에까지 이른 보살만 보살이 아니라, 단지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초발심을 낸 모든 남녀 신도들이 그대로 보살마하살일수 있다는 점이다.

70-스스로 비뚤어진 생각과 분별로 괴로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속에 스스로 갇혀 있을 뿐이다. 괴로움도 스스로 만든 것일뿐, 본래 괴로움이란 없다.

73-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75-제도하고 제도받는 주체가 모두 공할진대 공한 가운데 일어난 불행이며, 괴로움이라는 관념ㅇ;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 ‘나’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의 괴로움도 공하고 보살의 구제 또한 공한 것일 뿐이다.

83-아상, 중생상, 수자상, 인상이라는 말은 모두가 고정된 실체적 존재로서의 ‘나’를 상정하지 말라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거의 동일한 개념, 동일한 의도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86-법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늘 있어야 할 자리에 인연 따라 정확하게 있을 뿐인 것을 사람들은 어리석은 아상으로 인해 ‘내것’이라고 하며 쌓고 집착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일 뿐이다.

87-우리가 ‘내 생각’이라고, ‘내 가치관이며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일체 모든 견해들은 모드가 다른 사람의 것들일 뿐이다. 배운 것이거나, 보고 들은 것이거나, 책에서 읽은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 좁은 경험으로써 몇 번 체험했던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듣고 배운 것들을 내 식대로 조합하고 짜 맞춘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래 놓고 그것을 ‘내 생각’ 이라고 고정짓고, 그것만이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90-보통 우리가 참나를 말할 때, 그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참나라는 말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고, 참나라는 개념의 인식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참나를 찾으라고 , 자성불을 , 본래 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방편설법을 하시지만, 많은 제자들은 ‘도대체 참나가 무엇일까’하고 참나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고, 인식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참나는 생각될 수 없고, 말로 표현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는 언어 그 너머에 있고, 생각 그 너머에 있으며, 우리의 인식과 분별의 그 너머에 있고 없음을 넘어서 있을 뿐이다. ‘생각 그 너머에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나’를 말로 표현했다고 했을 때 조차 그것은 그렇다고 말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은 여전히 참나가 될 수 없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인식, 말을 초월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중생들의 마음에서는 무언가 표현을 하길 바라고, 논의 되길 바라고, 설하여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논의의 대상도 아니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대한 그 어떤 상도 내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97-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아무런 분별도 없이 무분별의 행을 한다는 말이며,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뜻이다.

98-돈에 집착해서 돈을 벌지 말고 사랑에 집착해서 사랑을 하지 말고, 일에 집착하여 일의 결과나 성취에 마음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주고도 준 바가 없이 함이 없는 보시를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은 도무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106-주고도 준 바가 없이 함이 없는 보시를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은 도무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112-그러니 한 생각도 분별할 것이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방편으로써 복덕을 이야기하고, 무주상보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주상보시를 하고서도 이것이 복덕이라고 생각하면 벌써 복덕을 잃을 것이고, 복덕이라는 생각조차 놓아버렸을 때 그 복덕은 실로 무량할 것이다. 이것은 흡사, 일체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오히려 얻을 것이고, 얻고자 하면 도리어 얻지 못하는 이치와 같으며, 무소유했을 때 전체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고, 소유하고자 하면 도리어 소유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면 벌써 깨달음은 저만치 달아날 것이지만, 깨달음조차 놓아버리고 났을 때 이미 무시무종 으로 언제나 깨달음과 하나 되어 있었던 것처럼.

120-진리 그 자체로서 법으로서 부처님을 보아야지 눈앞에 보여지는 형상으로의 거룩한 모습으로 부처님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형상을 통해 참 진리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123-사구게에 등장하는 ‘허망’이라는 단어는 ‘허무하다’거나 하는 등의 ‘허무주의’로 쓰인 말이 아니라 근본불교의 연기법과 삼법인의 진리를 의미하는 말과도 같고, 대승불교의 공사상이나 중도, 무집착이나 무소득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27-이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것들은 제 스스로 정확히 제 자리에 언제나 그렇게 있을 뿐이다. 내 안에서 순수한 ‘내 생각’을 찾아보라. 그 어떤 견해도 순수하게 내 생각일 수는 없다.

128-그 무명,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집착을 불러온다. 그리고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우리를 얽어 맨다. 그러니 바른 깨달음만 있으면, 바른 지혜와 안목이 열리면 더 이상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다. 살아가며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147-즉 선근이란 마음을 기울여 주의 집중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즉 수많은 부처님에게 악한 인연이 아닌 선한 인연을 심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에게 지혜로운 주의 즉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하는 수행의 인연을 심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150-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깨어있음이다. 모든 순간순간 더 이상 도달할 곳이라고는 없다. 그 순간이 가장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인 것이다.

151-과거 수많은 부처님과 마음집중의 관 수행인연을 지었으니 그 수행의 인연으로 인해 여래가 멸한 뒤 후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 같은 글귀,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가르침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수 있는 것이다.

158-이것만이 진리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일체 모든 집착과 고집은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뜻한다. 진리 또한 집착하고 머물게 되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159-진리라는, 종교라는 틀을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163-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 따라 응병여약으로 대기설법을 해 주신다. 그러니 어떤 한 가르침을 가지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그것만이 진리라고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수 없다.
또한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을 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집착하지 않음에 있는데 진리에 집착을 하면 ‘집착하지 않음’의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189-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경전의 가르침을 깨달아야만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최상의 법이라는 것도 상을 타파하는 금강경의 이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195-‘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즉 불법에도 집착하면 안되고, 불법이라고 고정된 어떤 실체도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불법이라는 틀, 불법이라는 상까지도 타파했을 때 비로소 참된 불법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불법을 불법이라고 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불법을 불법이 아니라고 바로 알았을 때 비로소 불법은 빛을 발할 수 있다.
그것이 설령 부처가 되었든, 불법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고정되게 실체화하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될 수 없다. 불교를 불교라고 하면 불교가 아니고, 진리를 진리라고 하면 진리가 아니며, 부처를 부처라고 하면 더 이상 부처가 아니다. 불교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진리가 아니며, 부처라는 상을 세워도 이미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은 스스로를 ‘불자’라는 틀에 가둬선 안 된다. 불법의 진리를 ‘불교’라는 틀에 가둬서는 안 된다. 가두어진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신앙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참된 불자라면 이렇게 활짝 열려있어야 한다. 그 어디에도 걸려선 안 된다.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불교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진리라는 틀에서도, 부처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불교를 , 진리를, 부처를 바로 보고 믿으며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를 버렸을 때 비로소 불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보편적이고 온전한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201-깨달음이란 곧 모양 없음을 말한다. 일체의 모든 상이 타파된 자리를 해탈, 열반이라고 이름붙이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상이 타파된 그 자리를 가지고 또 다른 모양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3-이 세상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하여 머물곳은 없다. 오직 변화라는 흐름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변한다. 업 또한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 본연의 모습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함께 변화하라. 그 흐름에 들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은 오직 이것밖에 없다.
214-하물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에게도 있지 않은 생각이 아라한에게 있겠는가. 아라한이라는 생각은 오직 중생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아라한은 아라한을 모른다.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 진리라고 이름지을 것이 도무지 없는데 애써 진리라는 이름을 내세울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이란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이다. 일체 모든 것이 진리 그 자체라면 따로 진리라고 이름 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고 하는 말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아라한은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는가. 이는 참 어려운 물음이다. 깨달았다고 해도 어긋나고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어긋난다.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오직 침묵만이 그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216-우리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바로 이것이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로 나아간다는 착각. 바로 그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깨달음은 멀어진다. 중생이고 수행이고 부처고 이 모든 나뉨과 분별을 다 놓아버렸을 때 깨달음은 향기롭게 피어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중생과 상반되는 부처가 아니다. 중생이 깨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은 없어지고 깨달음을 얻은 부처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직 텅 빈 뿐이다. 부처도 중생도 다 사라지고 오직 텅 빈 충만이 현현할 뿐이다.
225-정토를 장엄한다거나, 불교를 수행한다거나, 중생을 구제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을 깨버릴 것을 강조한다.
228-금강경은 일체의 모든 방편을 파하고 근본을 드러내는 경전이다. 금강경앞에는 일체의 그 어떤 방편도 설 자리가 없다.
229-간단하다.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한 데 있다. 일체를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얻어진다. 그냥 놓아두면 된다. 놓아버리는 순간 영원한 대자유가 찾아온다. 그것은 얻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본연의 고요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230-그냥 놓아두라. 애쓰지 말라. 애쓰려는 마음을 놓으면 그냥 얻어진다. 이미 얻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얻을 것’이 생기면 결코 얻을 수 없다. ‘얻고자 하는 것’이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얻게 된다. 아니 그냥 ‘얻음’이란 말 자체가 끊어지고 지고한 평화만이 현현한다.
234-수행의 첫 번째 덕목은 하심이며 겸손이다.
236-수행을 하고서도 수행했다는 바에 머물지 않아야 하며, 베풀고서도 베풀었다는 상을 일으켜 베풇에 마음을 머물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머물게 되면 썩고 만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 마음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237-마음을 내고 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이고 머물러 집착한다. 착한 일을 행하고도 거기에 마음이 머문다. ‘선행을 했다’는 상을 남기게 된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했다는 데 마음이 머물러 상을 남기게 되면 연이어 거기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보상을 기대하는 그 어떤 바람도 우리를 괴롭게 할 뿐이다. 기대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이고, 바람이 있을 때 그것의 성취 유무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극단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켜 착한 일을 행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말이다. 선행을 하고도 선행을 했다는 상을 버려야 하다.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돈을 열심히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돈에 머무르는 마음으로 벌면 안된다. 그것은 곧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에 대한 집착으로 돈을 벌면 많이 벌었을 때와 못 벌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극단으로 치닫는다.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린다. 즐거움에 휘둘리는 것은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즐거움도 일종의 괴로움이다. 즐거움에 크게 휘둘리는 사람일수록 괴로움에 크게 휘둘리게 마련이다. 즐겁거나 괴롭기보다는 그 양 극단을 다 놓아버린 여여한 평화를 찾아야 한다.
수행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했다는 상을 내지 말고, 이만큼 수행했으니 곧 결과가 있겠지 하는 바람도 놓아버리고, 수행이라는 그 자체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수행을 했으니 곧 깨닫겠지, 혹은 이렇게 수행을 했는데도 왜 깨달음은 오지 않을 까 하고 탓할 것은 없다. 다만 수행을 할 뿐이지 수행의 결과를 바란다거나, 내가 행한 수행에 대해 바라는 바를 가져선 안 된다. 그것은 집착이며 집착은 괴로움이다. 수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 행하는 것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이 미래의 어떤 깨달음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직 할 뿐, 바람을 놓아라. 수행이라는 말 자체가 머물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이 함이 없이 하는 도리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법이다. 금강경의 모든 구절은 바로 이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행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245-법신부처님의 나로써 온전하게 나툴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몽땅 부처님께 맡기고 가라. 완전하게 내맡기고, 완전하게 바치며,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법신부처님의 향기가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246-만약 어떤 사람이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그 몸이 큰 것인가 하는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는 크다고 답변을 드린다. 방금 설법한 것에 의하면 본래 크고 작을 것이 없어야 하는데 수보리는 왜 크다고 했는가. 이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법이다. 분별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아무런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할 것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며,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저 산의 나무처럼, 저들의 돌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옳다 그르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고, 좋다 싫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러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크다는 마음도 내고 작다는 마음도 낼 수 있다. 그러나 크고 작음에 걸려 집착하면 안 된다. 옳고 그른 마음도 낼 수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불교는 산중에 홀로 들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말려 은둔해서만 살아야 하는 그런 종교인 것은 아니다. 큰 것은 크다고 마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좋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을 키우다 보면 집착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249-큰 이유는 몸이라는 것은 몸이 아니기에 큰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큰 몸이라는 데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큰 몸일수 있는 것이다.
257-얼핏 들어서는 물질적인 수많은 보시보다 법보시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금강경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공덕보다 스스로 올바로 이해하고 수지하여 단 한 사람에게 그 뜻을 나누고 이해시키는 것이 더욱 큰 복덕이 된다는 말이다.
270-그 모든 분별을 놓아버려라. 이 세상엔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 일도 없다. 깨달음을 얻을 나도 없으며, 내가 해야 할 그 어떤 수행도 없다. 오직 쉬기만 할 뿐이다. 이무것도 할 게 없다.
271-바른 수행자라면 금강경독경을 통해 지관을 닦고, 금강경 해석과 공부를 통해 바른 이해와 실천을 함께 해 나가야 할 것이다.
273-용성스님
내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님이요, 내 마음이 고요하면 법이며, 내 마음이 청정하면 수행자
279-어리석은 우리들은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말을 들을 수 있고,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281-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고 독송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금강경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훕사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리의 가르침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는 말과 같다.
284-불교의 역사가 30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아직까지 논쟁의 불씨가 되는 것이 바로 윤회와 무아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가 도대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말에 얽매이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는 윤회가 이니기에 윤회이고, 무아는 무아가 아니기에 무아라는 그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289-어떤 특정한 모습이 수행자의 참모습일 것이라고 스스로의 틀을 만들어 두지 말라, 그렇게 되면 갇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부처는 중생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히지 않는다. 다만 갇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290-‘누구처럼’ 살고자 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목표치가 있고,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내가 있기 때문에, 그 간격만큼 마음은 괴롭고 무겁게 마련이다.
291-‘부처님처럼’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처럼’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처님처럼 사는 길이 될 수 있다. ‘부처님’처럼 살지 말고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면 된다.
295-중요한 것은 놓아버리는 것이다. 본래 공한 줄 알고, 본래 실체가 없는 줄 알며, 본래 그 어떤 상도 상이 아닌 줄 알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놓는 공부는 복덕이라는 유위를 뛰어넘는 무량복덕이 되는 것이다.
308-여기에서 ‘실상’을 깨달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상을 깨닫는다는 말은 따로 실상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깨닫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이 본래 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실상이다. 상을 여의 게 되면 일체 그 어떤 상도 남지 않게 되는데 그것을 이름 붙여 실상이라고 방편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래서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실상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이름을 방편으로 붙였을 뿐이지 실상이라는 상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표현에 어떤 모양을 짓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벌써 실상에서 벗어나 있다. 실상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실상일 수 있는 것이다. 흡사 이 말은, 불성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불성일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람들은 불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느냐고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에는 ‘내가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어떤 불성이라는 모양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불성이라는 상을 어떻게 만들어 둘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불성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는 말이다. 그랬을 때는 그 어떤 답도 내려줄 수 없다.
309-깨달음이 어떤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모양 없는 모양을 어찌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315-금강경에서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고,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다’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내것이다’라고 할 만한 소유도 실제는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옳다’고 여겨왔던 내 사상, 견해, 생각에 대한 것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목숨 걸고 가지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소유의 일들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33-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ㅇ르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발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 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345-불교는 그런 종교이다. 어디에도 치우지지 않는 종교. 어디에도 고집하지 않는 종교.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종교이다.
361-금강경 수행을 통해 일체의 상이 타파되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이 사라지고, 일체는 모두가 ‘전체로서의 하나’가 된다.
365-도무지 모르겠는, 그래서 막막하여 오리무중인 그것이 바로 화두다. 그 화두를 따지거나 분석하는 것으로 풀고자 한다면 앞으로도 10년이 아닌 100년을 두고도 그 답은 얻을 수 없겠지만, ‘오직 모르는’ 그 속으로 들어가 ‘모르기만 할 뿐’다른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모르기만 할 때 그 때 완전히 알게 되는 수가 있을 것이니 그것이 화두인 것이다.
370-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란 앞서도 설명했듯이 전부 ‘아견’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견에 대한 다른 표현이고 서술방식이기 때문이다.
375-기도 수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수행하고 있고, 마음을 관하고 있으며, 순간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영락없는 깨달음의 향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한쪽으로 고정 지으면 안된다. 내가 바라는 쪽으로, 좋은 일만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행 잘 하고, 마음 관찰 잘 하면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고정을 지으면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 깨어있음의 향기는 곧 사라지고 만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더라도 업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지어 온 온갖 행위이기 때문에 그 업의 힘은 여전히 남아서 우리의 현실을 투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마음을 비추어 보고, 수행하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업의 문제까지 다 소멸시킬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이다.
384-완전히 나를 놓아버리고 아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으로써 내가 곧 전체가 되었을 때 그 때 이 뜻이 그대로 내가 되고 전체가 되는 것이다.
385-아상을 완전히 타파했을 때, 그 자리가 금강경 수지의ㅣ 자리가 되며, 그 때 헤아릴 수 없는 뜻도, 헤아릴 수 없는 과보도 그대로 하나로 어우러져 광대한 법해를 이룰 것이다.
393-그렇기에 ‘나’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엔 괴로움을 가져오며, ‘상대’에 집착하는 것도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이나 명예, 지위, 권력, 이성, 사랑, 학벌, 소유물등 그 어떤 것이 라도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의미한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항상 하거나 실체적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내가’라는 상도 붙어서는 안 된다.
395-그러면 그렇게 일체가 다 공이고, 무아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렇게 움직이는 ‘나’는 무엇이고,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무아라면 내가 없다는 말인데, 분명 우리 눈앞에는 내가 있고 상대가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다 인연(연기법)의 나툼일 뿐이다. 수많은 크고 작은 인연들로 인해 잠시 ‘나’도 만들어지고, ‘대상’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이 다 하면 누구든 사라지고 또한 다시 인연이 모이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내 눈앞에 펼쳐지는 생사와 윤회 또 이 모든 존재들과 그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으며 환영과 같은 것일 뿐이다. 일체 모든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 허망한 상이 여러 모양으로 나투는 법칙이 바로 연기법, 인연법, 인과응보인 것이다. 바로 이점, 일체 모든 존재는 다 환영과 같이 허망한 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을 바로 관하는 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상이 허망하며 무아이고 공하여 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
399-불교를 공부하는 수행자는 단수하고도 명확하게 잘 회통할 줄 알아야 한다.
403-깨달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깨달은 나’에 대한 환상은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도무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깨달음에는 ‘나’가 없다. 깨달을 ‘나’가 없었을 때, 얻어야 할 어떤 ‘깨달음’이 없었을 때 참된 깨달음은 드러남도 없이 드러난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환상을 버리라. 이것이 첫 번째 부처님의 무아 법문이다.
404-내가 금강경을 좀 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금강경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만 글로써만 받아들일 뿐 내 안에 그 의미가 온 존재로서 와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406-참된 수행자는 어떤 틀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틀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409-고정 지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항상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부처님 말씀이고 법일진대, ‘고정 지을 것이 없다’는 진리를 고정화할 것인가, ‘항상 하는 것이 없다’는 진리를 항상 하는 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자아가 없다는 무아법을 받아들이는 ‘나’를 내세울 것인가,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말씀에 집착할 것인가.
411-여여하다는 것은 어떤 법에도 집착함이 없고, 어떤 법에도 머물지 않지만 그 모든 법을 나투고 그 어떤 법도 자유자재하게 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415-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스스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나’에 갇혀 있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아는 깨닫지 못한다. 무아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아는 말 그대로 무아, 내가 없음이며 텅 비어 있음이고 무상과 무아, 무자성과 공이기 때문에 주체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깨달았다’는 말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깨달을 내가 없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일진대 스스로를 깨달음의 주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스스로의 무명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424-무아이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무아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435-어떤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고, 진리의 견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진리가 아니다.
439-그러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인 것이다. 마음이라고 명명한 이름이 있을 뿐이지 마음의 실체는 없다.
444-마음 없음. 무심의 이 도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무심하게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무심하여 걸림 없을 수 있어야 한다. 본래 없던 마음을 애써 만들어내어 그 만들어 낸 것에 한껏 휘둘리다가 수행을 통해 그 마음을 없애고 비워야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무심이었음을 보면 된다.
텅 빈 허공은 허공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허공의 실체는 찾아볼 수 없다. 허공은 허공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공을 크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허공이라는 것이 실제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떤 실체를 찾아볼 수 있고 눈으로 그 크기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을 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공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을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453-유위의 복덕으로는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많고 적음을 나누어 놓은 가운데 그 중 많은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많음이지만, 무위의 복덕은 많고 적음도 사라진, 복덕이 있고 업음도 사라진 절대적인 많음일 수 있는 것이다.
456-우리는 그 법당의 형상불에 예배한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잘못되었으니 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임을 완전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459-불교라는 종교 안에서만 부처가 있다거나, 진리가 있는 것일 수 없다. 불교는 다만 온 우주의 진리를 ,법을 ,도를 , 참을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이 불교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불교인 것일 뿐이다.
465-설하되 설한 바 없는 이치를 설함 없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466-다만 이렇게 세상에 나도 있고 너도 있으며 세상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연기하기 때문인데, 수많은 인연들이 모여 잠시 물거품처럼, 꿈처럼, 잠시 만들어졌다 사라질 뿐인 것이다.
469-법을 설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법을 설하면서도 내가 법을 설했다는 그런 아상에 갇히지 않는다. 설함 없이 법을 설한다. 함이 없이 모든 것을 다 하신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함이 없는 행이다.

나 없음을 깨달은 자가 여래인데, 나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470-중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이지 진리라는 이름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 그 내용 자체에 있지 그것을 가두는 불법이라는 틀에 있지 않다.
478-바로 그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는 그 이치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 것에 불과하다.
480-스스로 욕심을 만들고 집착을 만드니 그로 인해 괴로운 것인데,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고 부처님께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빈다고 그것이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504-부처님께서 말로써 표현하신 모든 것은 하나같이 방편이다. 입을 열었다 하면 그것은 모두 방편일 뿐이다.
511-깨달음은 논리 그 너머에 있다. 논리적 증명 그 너머에 있는 것이다.
520- 법으로 여래를 보아야 한다.
참된 여래는 법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의 본성은 분별로 알아지지 않는다.
그것은 분별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526-이러한 금강경 전체에 걸친 상의 타파에 대해 목 어떤 이는 공허감이나 허무주의에 빠질 수 도 있을 것이다. 금강경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다 허망하고 텅 빈 것이라면 이 세상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고, 진실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 갈 의미도 없고, 잘 살 필요도 없으며, 깨달음도 다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기에 빠질 수 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분 무단무멸분은 그러한 생각에 치우친 이들을 위한 설법이다
. 단멸이라는 상, 아무것도 없다는 상, 모든 것이 다 끊어져 아무것도 없다는 상에 빠진 이들을 위해 이 분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이는 그 어떤 단멸상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529-틀을 깨면 내 이웃도, 친구도, 가족도, 어린 아이도, 대자연의 변화도 모두 내 스승 아닌 것이 없고,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내 스스로 상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부처요 참빛이다.
531-斷見이란 常見과 대립되는 말로 상견은 불멸하는 어떤 실체가 잇어 항상 하여 무너지지 않는다는 생각이고 반대로 단견은 일체 모든 것이 끊어져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두가 극단으로 중도에 어긋나는 치우친 견해다. 그러니 단멸이란 일체 모든 것은 다 허망하고 진실 되지 못한 것이므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주의적인 생각이다. 불멸하여 항상 한다는 상견론이나 단멸하여 항상 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다는 단멸론이나 모두가 치우친 견해이기에 양 변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면 실재로 이런 단멸론에 빠지기 쉽다. 또 사회에서 불교를 보는 관점도 불교는 허무주의라고 하고 무의미한 종교라고 하는 말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불교를 단멸론으로 잘못 생각한 탓이다. 여기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며 치우친 단멸론에 빠지지 않을 것을 주문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법도 없고 법 아닌것도 없으며, 아상도 없고, 여래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고 설하고 있다. 끊임없이 그 어떤 고정된 실체도 없으니 어떤 것에도 매달려 집착하지 말라고 설하고 있다. 이렇듯 계속된 게시허망의 가르침을 듣다보면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하는 단멸상에 빠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말하듯 불교는 단멸론이 아니다. 다만 금강경에서 일체 모든상이 허망함을 말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상에 빠져 집착하고 욕망하며 나아가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투쟁과 전쟁까지 일삼는 그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일체 모든 상이 허망함을 알지언정 어떤 법의 단멸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며 공허감에 무기력해 지지도 않는다. 다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뿐이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현실이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현실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라 현실을 생동감있게 살아나가면서도 그 현실에 집착하거나 얽매이거나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좀 더 쉽 게 말해 세상을 살아가며 사랑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돈도 벌고, 이웃과의 관계도 가지고, 수행도 하며 살아가지만 그 모든 것이 궁극에는 비실체적인 줄 알기 때문에 전적으로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다. 사랑을 하되 사랑에 집착해 상대방을 괴롭게 하고 나 자신을 괴롭히며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하여 돈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그런 어리석은 믿음을 갖지는 않는다. 돈이 고정된 실체가 아닌 줄 알기에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지 않고, 돈을 벌더라도 이웃에게 베풀 줄 알며, 돈에 목숨까지 거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자칫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단멸상에 빠지게 되면 너무 공에 집착하여 눈에 보이는 형상과 세계의 질서, 사회의 관습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본래 아무것도 아니다. 다 텅 빈 것이다.’라는 생각만 앞세워 행동도 마음대로 하고, 현실을 무사안일하게 보내게 되는 수도 있다. 또한 더 나아가‘ 수행도 다 필요 없다’거나, ‘경전도 다 필요 없다’거나, ‘절하고 염불하고 좌선하는 것도 다 쓸데없는 짓이다’거나 하면서 형상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 자신이 완전히 다 깨달은 양 스스로 착각에 빠지는 수도 있으며 또한 그런 신념이 강해지면 그러한 신념으로 인해 보여지는 몇몇 가지 환상에 빠져 정법과 멀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단멸상에 치우치면 세상사는 일이 갑자기 공허해질 수도 있다. 돈 버는 일이며, 사업하는 일이며, 사랑하는 일이며, 심지어 깨달음을 얻는 일까지 모든 것이 다 공허한 것 같고, 다 필요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아등바등 사는 모습이 어리석게 보이고 다 소용없는 일이라 여긴다. 그렇게 되면 삶은 빛을 잃는다.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에 겹다. 모든 의욕이 상실되고 만다. 스스로는 공을 깨달아서 그런다고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공이라는 것은 그렇게 빛바랜 희뿌연 퇴색이 아니다. 오히려 공을 깨닫고, 무아상을 깨닫게 되면 우리 삶은 더욱 ‘지금 이순간’에 선명하게 집중된다. 과거나 미래에 치우친 생각과 분별들을 오직 ‘지금 여기’에 투영함으로써 온전히 100% 생동감 있게 순간을 살게 된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임으로써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불필요한 잡념과 편견과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는가. 그러나 과거나 미래가 텅 빈 것인줄 알고, 고정된 관념이나 편견들이 허깨비인줄 알게 되면,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생동감 있게 빛을 발한다. 우리의 삶이 한층 순간순간 새로워지고,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정견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상계가 모두 공하여 텅 비어 있지만 그러한 텅 빈 가운데 충만한 빛을 못하고 앞의 텅 빈 소식만 알음알이로 알게 되면 이렇듯 깊은 침체에 빠지고 만다. 삼라만상 우주법계가 모두 텅 비어있다는 것, 공하다는 것, 실체가 없다는 것, 일체 모든 상이 다 허망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도리어 충만하다는 것, 꽉 차 있다는 것, 저마다 실체요 저마다 제각기 다 부처라는 것.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참 빛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540-탐내어 집착하지 않으면 받아도 받는 것이 아니고, 받지 않더라도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44-보살을 복덕을 받지 않는다. 이 말은 보살은 복덕을 받으려는 생각이 분별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보살은 복덕을 받거나 받지 못한다는 일체의 분별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복덕을 받아도 받는 것이 아니요, 받지 않더라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미 충만한 복덕으로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복덕을 받아도 받는 것이 아니며, 받지 않더라도 이미 받아 지닌 것과 다름없다.
545-그러면 왜 그렇게 이미 충분한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욕심과 집착을 일으켜 스스로 고통을 불러오는가. 그 원인은 ‘나’라고 하는 아상 때문이다. ‘나’라는 것이 진짜로 있는 줄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무아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것’을 더 늘려 나가려 욕심 부리고 집착을 하며, 언제까지고 ‘나’를 유지시켜 나가려는 생각 때문에 죽음을 괴로운 것으로 받아들으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무아를 깨닫고 나면 죽고 죽는 것도 없는 무생은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571-모든 미진들이 서로 다른 미진의 생성과 소멸에 의존하는 상호의존, 상의 상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 미진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 또한 ‘이웃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이웃이 없으면 나도 없는’관계로 이어지고, ‘자연이 있으므로 인간이 있고, 자연이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지는’관계로 이어지며, ‘삼천대천세계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삼천대천세계가 사라지면 나또한 사라지는’ 동체적인 연기와 자비의 실천적 삶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573-이로써 금강경에서는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집착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먼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중생들의 기본적인 상을 깨도록 이끌고 있으며, 부처님의 육신인 32상 80종호에 대한 상도 깨뜨리고, 부처님이 법을 설했다는 것에 대한 상도 깨뜨리며, 정토를 장엄한다는 상도, 수행한다는 상도, 깨달았다는 상도, 보시했다는 상도, 나아가 법이 있다 없다 하는 상도 깨뜨리고, 결국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구성요소인 미진에서부터 가장 큰 요소인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것을 모조리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577-그러한 알음알이내지 지식들은 본질적인 참된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음알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말인데, 지식이 많으면 자연스레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등의 판단과 분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등의 판단, 분별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기만 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절대적인 ‘선’이나 절대적인 ‘악’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체 모든 판단과 분별, 즉 알음알이 지견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차별적인 생각일 뿐이다. 존재 본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그 어떤 차별이나 분별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보기만 할 뿐인 것이다. 그랬을 때 어떤 대상도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분별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여하게 다만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알음알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세계관이며 가치관이 투철하다. 그 말은 다시말하면,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아는 것에 대한 집착도 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생각’ ‘자기 지견’에 집착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본질적인 지혜와는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582-불교 수행이라는 것이 이와 같다. 집착을 버리라고 하지만, 버릴 것이 있어서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편으로 버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혼탁한 마음을 닦으라고 하지만 닦을 것이 있어서 닦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 스스로 혼탁하다고 상을 짓고, 견해를 일으킨 바로 그 생각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는 말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얻을 것이 있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열반이란 것이 있어서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 견성을 했다는 사람, 무엇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전혀 진리와는 동떨어진 착각 속에 빠진 사람이요, 삿된 법을 따르는 사람일 뿐이다. 얻을 것이 없음을 바로 보고 아는 것이 깨달음일 터인데, 어찌 얻을 어떤 ‘법’이 있을 것인가.
85-진리는 이와 간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심지어 ‘진리에도 극단적으로 집착하지 않는’ ‘법상도 버려야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불교는 ‘불교적 가치관’으로 살도록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물론 방편으로 ‘불교적 가치관’ ‘불교적 지견’을 설하고는 있지만, 궁극에 가서는 그 또한 놓아버려야 함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람들에게 ‘부처님답게 사는 것’을 주장하거나 따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자기 자신답게 사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소감문:조계종 소의 경전인 금강경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청년불자로서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처음 금강경이라는 책을 접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은 모든 이들과 비슷한 의문일것이다. 어려운 말로 변증법이라고 하나? 도대체 이 책은 무엇이 진리이다 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라고 하면 그때부터 이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물며 부처님의 말씀 그 자체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끊임없는 상의 파괴,철저한 파괴- 이것을 말로 표현하다보니 언뜻 읽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금강경 해설서로 법륜스님, 틱낫한 스님, 김용옥교수, 전영화피디의 책을 접했다. 이 중에서는 가장 이해하기 쉽고 훌륭한 책이 아니었나 쉽다. 언어 그 자체에 한계가 있지만 그 언어로 풀어낸 깨달음의 해설서로는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네팔 여행중 찍은 사진을 책에 곁들였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도 좋은 풍경을 감상할수 있다. 특히, 아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출처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글쓴이 : 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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