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70칙 白丈倂卻咽喉 - 백장화상이 입과 목을 막고 말하게 하다

수선님 2018. 9. 16. 11:17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제70칙은 백장화상이 제자들에게 입과 목을 막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위산(山)과 오봉(五峯), 운암(雲巖)이 함께 백장화상을 모시고 서 있었다. 백장화상은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위산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백장화상이 말했다. “내가 사양치 않고 그대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훗날 나의 자손을 잃어버릴까 염려스럽다.”

 

擧. 山五峰雲巖. 同侍立百丈. 百丈問山. 倂咽喉唇吻. 作生道. 山云. 請和尙道. 丈云. 我不辭向汝道. 恐已後喪我兒孫.


이 공안은 <전등록(傳燈錄)> 제6권 백장전에 전하고 있으며, 원오는 ‘평창’에 백장과 위산, 오봉, 운암에게 나눈 선문답을 전부 인용하고 있지만, <벽암록> 제70칙에는 백장과 위산, 71칙에는 백장과 오봉, 72칙에는 백장과 운암과의 선문답을 나누어서 싣고 있다. 따라서 본칙에서는 백장화상과 위산스님의 선문답을 살펴보자.

 

백장화상은 마조문하의 정법을 이은 제자로서 <백장청규(白丈淸規)>를 제정하여 선원을 전통적인 율원에서 독립하고 수행교단을 확립한 선승으로 불교교단의 혁신을 이루었다. 선원에는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두지 않고, 주지가 설법하고 수행자들이 불법을 탁마하는 법당만을 건립하여 선문답을 나누며 정법의 안목을 갖춘 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선원의 대중 모두가 의무적으로 노동에 참여해야 하는 보청법(普請)을 제정하여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의 경제생활과 생산적인 수행교단의 생활을 확립하였다.

 

특히 법당에서 주지가 정기적으로 수행자들을 위해서 설법을 실시하였고, 주지와 학인들과불법의 대의를 체득할 수 있는 많은 선문답이 실행되었다. 그래서 주지의 설법과 선문답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지혜의 법문이었기 때문에 성전의 의미를 갖고 기록하게 되어 어록이라는 새로운 불교의 문헌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어록은 선승들이 경율론의 삼장을 통해서 체득한 불법의 정신을 일상생활의 언어나 행동으로 제자들에게 나눈 생활상의 설법이며 대화의 기록인 것이다. 사실 마조대사의 비문에 10대제자의 이름을 기록한 곳에 백장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마조문하에 너무나 뛰어난 선승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마조의 정법을 이은 제자로는 백장이 자주 거론되고 있으며, 소위 사가(四家)어록은 마조, 백장, 황벽, 임제어록을 말하는 것처럼, 마조의 정법을 상승한 후계자의 법통을 확정시키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로 볼 때 백장이 마조문하의 수제자로 등장하게 된 것은 위산영우(山靈祐:771~853)라는 위대한 선승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백장문하에 황벽이 정법상승자로 등장하게 된 것도 임제라는 선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종의 법통은 훌륭한 제자들에 의해서 밑에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본칙에 등장하는 위산은 <벽암록> 제4칙에 등장하고 있는데, 위산이 백장의 지도로 깨닫고 법을 잇게 된 선문답이 <전등록> 제9권 위산전에 전한다. 즉 백장화상이 위산스님에게 화로에 불씨가 있는지 살펴보라! 고 지시하자, 위산은 불이 없다고 대답한다. 백장은 몸소 일어나 화로의 잿더미 속을 헤쳐서 조그만 불씨를 찾아들고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그치자, 위산이 그 때 깨닫고 절을 하니, 백장이 다음과 같이 인가하는 설법을 했다.

 

여기가 아슬아슬한 갈림길이다. 경전에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시절 인연을 관찰하라”고 하였는데, 시절이 이르면 미혹했다가 깨닫는 것 같고, 잃어버렸던 일을 기억하면, 본래 자기의 물건이요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조사가 “깨닫고 나면 깨닫기 이전과 같고, 망심이 없으면 경계(法)도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다만 허망하게 범부나 성인 따위의 차별생각이 없으면 본래부터 망심과 경계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 잘 보호해 지니도록 하라.

 

기서 말하는 불씨는 불성을 상징한 것인데, 누구라도 불씨를 가지고 있다. <주자어류> 제4권에도 잿더미속의 불씨를 사람의 본성에 비유하고 있으며, 대혜도 “식은 잿더미속의 한 알의 콩알이 튀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불씨가 불로 연소되는 것은 시절인연이며, 시절인연을 관찰하는 자각의 지혜가 불성을 보고 깨닫는 일이다.

 

본칙은 백장화상이 위산스님에게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를 던져 위산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목구멍(咽喉)과 입술(脣吻)은 함께 말을 하는 인체기관이다. 언어는 여러 가지 소리가 있어 목구멍과 입술, 턱, 혓소리 등으로 나누고 있는데, 모두 이 목구멍과 입술의 기관을 통해서 발음이 가능하다.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서는 한 마디도 발음할 수가 없다. 백장은 언어 문자로 발음하기 이전의 소식(聲前一句)을 제시해 보라고 어려운 문제를 위산에게 던진 것이다. 원오는 ‘수시’에 “말하기 이전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라고 문제 제기한 것이다. 백장의 물음에 원오는 “백장과 같은 훌륭한 장수 한 명을 구하기 어렵다.”라고 착어했는데, 백장과 같이 훌륭한 장수 밑에는 반드시 위산과 같은 훌륭한 장수가 있기 마련이다. 위산스님은 백장의 물음이 끝남과 동시 찰나에 “화상께서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말해보라고 했는데, 먼저 화상께서 그렇게 말씀해 보십시오.”라고 반문했다. 문제를 제기한 그 사람의 근본당체로 문제를 되돌리고 있는 말이다. 문제의 갈등을 갈등이 일어나기 이전의 본래 상태로 되돌려 무효화 시키고 있다. 원오는 “적군의 길을 이용하여 적군을 격파한 작전은 교묘한 전술이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장화상은 “내가 그대에게 조금도 사양치 않고 말해주고 싶지만 내가 말해버리면 훗날 나의 법손이 없어질 것을 걱정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왜 그럴까? 원래 목구멍과 입술로 뱉은 말은 방편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말하자면 지혜작용이 없는 언어문자의 표현인데, 이 언어 문자에 끄달리고 집착하여 불법의 진실을 체득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될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언어 문자에 끄달린 참선공부를 사구(死句)참구라고 하며,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불성의 지혜작용을 살리는 참선수행을 활구(活句)참구라고 한다. 원오도 백장화상은 제자와 후대의 수행자들이 올바른 활구참구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참선수행을 하여 불혜명(佛慧命)이 단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파심이라고 평하고 있다.

 

설두화상이 게송으로 읊었다. “화상께서 말씀해 보시오.” 위산이 백장의 문제를 차단한 말을 들고, 위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뿔 돋친 호랑이가 울창한 숲 속에서 나왔다.”고 읊고 있다. 호랑이는 맹수인데 뿔까지 갖춘 호랑이가 숲 속에서 뛰어나왔기 때문에 어떤 것도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위산이 백장에게 되돌린 말 한마디 지혜작용은 뿔 돋친 호랑이가 되어 걸림이 없었다. “십주(十洲)에 봄이 저무니 꽃잎이 시들한데.” 십주는 중국인들이 상상한 이상세계인데, 원오는 ‘평창’에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이상세계라도 역시 봄이 저물면 꽃이 시들한 법, 인간세계와 다름없다. 불법을 체득하여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도 목과 입술을 사용하여 언어문자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면 똑같이 중생의 차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봄이 저무는 일도 없고 꽃이 떨어지는 일이 없는 상주불멸의 세계(본래심)는 어딘가? “산호 가지마다 햇살이 빛나는 구나.” 바다 속에 산호는 언제나 변함없는 아름다운 꽃나무로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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