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 중에 하나가 '식온(識蘊)'으로 '아뢰야식'은 8가지 식으로 이루어진 식온의 여덟번째 식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많이 쓰는 '의식'이란 용어도 본래 불교의 유식설에서 나온 것인데,
8식의 여섯번째 식(6식)을 말합니다. 근대심리학이 근래에 발견한 '무의식'을 불교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죠.
따라서 불교를 달리 말하자면 '심층심리학'이라고도 부를수 있을 겁니다.
8식은 크게 '전오식(眼,耳,鼻,舌,身)'과 '후삼식(意識, 末那識, 阿賴耶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오식을 통해 들어온 사물이나 외계의 정보를 종합처리하는 곳이 6식인 '의식'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7식인 '말나식'에 의해 '나'에 집착해서 '나'를 중심으로, '나'에게 유익한
것인지, 유익하지 않은 것인지를 판단하고 처리하게 돼죠.
또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는 6식인 의식이 말나식에 의지해서 전오식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온 정보에 의해 나타나는 다양한 느낌이나 감정까지를 포함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수시로 입력되는 외부 정보에 의해 '수시로' 변하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가 느끼진 못하지만 8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도 의식과 말나식이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마음'이란 것이 그야말로 복잡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칼 융은 이른바 '집단무의식'을 얘기하는데, 이것이 '아뢰야식'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융은 '자아(ego, 나)'와 '자기(self)'를 구별했는데요...
'자아' 즉 ego는 말나식에 의해 지배되고 집착하는 '이기적인 나'를 의미하고,
'자기'는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보편적인 나'를 의미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느 날 칼 융이 강연회에서 강연을 마치자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융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자기란 무엇인가요?"
그러자 융은 아주 간단한 말로 답했습니다.
"자기란 당신들 모두입니다."
불교의 '일즉다 다즉일' 개념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죠.
아뢰야식의 '아뢰야'란 말은 범어의 '아라야'에서 온 말인데, 보통 '저장하다'란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때론 '장식(藏識)'이라고도 부릅니다.
무엇을 저장하냐면,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 즉 몸으로(身), 입으로(口),
마음으로(意) 짓는 모든 업(業, 행위 또는 종자)이 자동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됩니다.
8식은 이처럼 전오식과 후삼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지며, 각각의 식은 육신의 각 기관에 근(根)을 두고 있습니다. 전오식은 눈, 귀, 코, 혀, 몸에 근을 두고 있으며, 말나식은 신체의 모든 곳이 근입니다. 그래서 이 몸을 '나'라고 집착하게 되죠. 하지만 아뢰야식은 특별히 신체의 어느 부위에 근을 두고있지 않습니다.
보통 종자(업, 행위)가 아뢰야식에 '훈습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향냄새가 몸에 스며들듯이 몸이나 몸주위에 향냄새가 스미는 것처럼 아뢰야식도 이와같이 육신과 그 주변에 훈습된다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육신이 죽어 사라지면 8식 중에 육신에 근을 두고 있는 전오식과 의식, 말나식은 사라져 버리지만, 아뢰야식만은 없어지지 않고 육신이 살아있을 때 행한 종자들(업,행위,정보)만 고스란히 더한채로 또 다른 인연이 화합해서 다른 몸을 받을 때까지 평온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우리들이 보통 '영혼'이라고 말하는게 '아뢰야식'이라고 이해해도 별 무리는 없겠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같은 개념은 아니라고 봅니다. 영혼이란 어떤 '보이지 않는 신체' 라는 육신의 형태가 있는 것으로 연상하는데 아뢰야식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죠.
아무튼 아뢰야식은 육신이 죽은 후에 남아서 머물게 되는데,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장소나 공간 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기 전의 물리적인 육체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아뢰야식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곳에 있을 수도 있고,
동시에 다른 특정한 곳에 존재할 수도 있게 되는 거죠. 경전에서 설하는 정토세계나 지옥은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마련한 방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윤회하는 것도 살았을 때 지은 삼업(身口意)이 인이 되어 또 다른 연을 맺게 되기
때문이죠.
따라서 윤회하는 주체는 '나'가 아니라 '업(행위,종자, 정보)' 입니다. 연기법에 의해 인연따라 몸을 받은 중생이 받은 몸을 말나식에 의해 '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윤회하는 주체도 '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아뢰야식
유식학을 구성하는 주요 사항 가운데 아뢰야식이 있읍니다. 실로 유식학은 이 아뢰야식을 구심점으로 하여 집약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아뢰야는 범어로서 '영원히 존재하며 없어지지 아니한다', '저장한다'라는뜻입니다. 일시적으로 현재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 전생에도 있었고 미래 내생에도 있을 이 아뢰야는,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으로서 중생의 근본 생명이며 삶과 죽음을 윤회하는 주체인 식체(識體), 즉 영혼인 것입니다.
이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아뢰야식 중의 종자가 전변하여 생긴 것이 '말라식(意)'이며, 이 말라식에 의지하여 파생한 것이 의식(意識)입니다.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을 제8식, 말라식을 제7식, 의식을 제6식이라고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또한 8.7.6식을 심(心).의(意).식(識)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아뢰야식은 바닷물과 같고 기타의 여러 식은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물결과 같이 아뢰야식의 바다 위에서 7식, 6식의 모든 식(識)이 생깁니다.
제6식과 제7식은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思量)을 속성으로 하되, 제6식은 사이에 끊어짐(間斷)이 있고 제7식은 간단(間斷)이 없습니다. 제5식과 제8식은 사량(思量)하는 속성이 없되, 제5식은 간단(間斷)이 있고 제8식은 간단(間斷)이 없읍니다.
특히 제8식, 즉 아뢰야식은 활동이 상속하여 끊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몸을 바꾸어서 다른 생사를 받게 될 때가지도 간단(間斷)이 없읍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의식이 전부 그치고 제7식은 작용을 못하지만 제8아뢰야식만은 생명을 마칠 때까지 남아 있다가 생명이 끊어질 때, 즉 윤회할 때 최후까지 남아서 따라갑니다.
또 사람이 다시 몸을 바꾸어 환상할 때에 제6의식이나 제7식은 작용하지 않지만 제8아뢰야식은 제일 먼서 와서 그 중생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8아뢰야식은 대단히 미세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보통의 심식으로서는 지각할 수 없읍니다. 그래서 제7식의 작용이 멈추고 제8식만 남게 되면 중생은 무의식에 빠져버리게 됩니다.중생은 제8식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의식이 각성되어 제8식을 지각할 수 있는 사람을 8지보살이라고 합니다. 8지보살은 생사의 단계에서도 끊어짐이 없는 제8식을 항상 지각하기 때문에 생사를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8지보살의 생사해탈은 유여열반이며, 불지(佛地)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무여열반에 들게 됩니다.
진여불성님의 http://blog.daum.net/amitabhapureland/140 블로그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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