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아뢰야식3

수선님 2017. 12. 10. 14:39

아뢰야식

 

아뢰야식의 의미

 

 阿賴耶alaya音寫이다. alaya에는 저장하는 곳()이라는 의미와 집착의 대상이라는 의미의 두 의미가 있다. 아뢰야식 속에 모든 과거 행위의 영향이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으므로 저장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되며, 7식인 마라식이 아뢰야식을 自我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된다. 한편 아뢰야식 속에 모든 종자가 들어 있기 때문에 아뢰야식을 모든 종자를 가진 것(sarva-bijaka)’ 一切種子識이라고도 부른다.

종자의 기능

 

 종자(bija)란 본래는 식물의 씨앗을 의미하는데, 아뢰야식 속의 특수한 심적인 힘’(功能差別)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특수한 심적인 힘이란 과거의 에 의해 아뢰야식에 훈습된 氣分 내지 印象習氣를 말하며, 이 습기가 바로 현재와 미래의 모든 현상을 산출하는 가능력 내지 잠재력으로서의 種子이다.

 이 종자는 크게 현재의 제현상을 산출하는 종자인 名言種子 혹은 等流習氣와 미래세의 자기를 형성하는 종자인 業種子 혹은 異熟習氣로 나누어 진다. 현재의 제현상을 산출하는 종자를 명언종자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심적 활동의 본질을 名言 즉 언어를 써서 행하는 개념적 사고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을 포함한 제1식에서 제8식까지의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 즉 습기가 직접원인()이 되고, 그것에 간접원인()이 작용하여 생겨난다. 이와 같이 생겨난 심적 활동()은 곧 아뢰야식 속에 그 영향을 習氣로 남기고, 그렇게 남겨진 습기는 바로 미래나 현재 행위의 種子가 된다. 이와 같이 모든 즉 현상이 심층적 심활동과 표층적 심활동의 상호 인과관계위에서 성립하는 것을 아뢰야식 연기라고 한다.

아뢰야식의 대상

 

 아뢰야식은 심층심리이기 때문에 일상의식으로는 그 활동을 지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 이상, 주관(akara, 行相, 見分)과 객관(alambana, 所緣, 相分)의 이원적 대립 위에서 어떤 인식작용을 하고 있다.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은 내적으로는 유지되는 것’(upadana, upatta, 執受)이고, 외적으로는 장소’(sthana, , 器世間)이다.

 ‘유지되는 것에는 육체와 종자가 있다. 감각기관을 불교에서는 (indriya)이라고 하며, 그런 기관을 가진 육체를 근을 갖는 신체有根身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지각력과 사고력을 가진 생명체의 신체를 유근신이라 하는 것인데, 인간으로 말하면 육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육체는 마음에 의해 그 기능이 유지된다는 관점에서 육체를 유지하는 것執受라 부른다. 유지하는 마음으로서는 초기불교 이래 眼識 내지 意識6식이 인정되어 왔는데, 유가행유식파에서는 부단히 활동하는 아뢰야식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적 維持體라는 것을 발견했다. 아뢰야식은 육체를 형성해냄과 동시에 형성해낸 육체에 내재하여 그것을 생리적으로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계속하여 인식하고 있다.

 또 하나 아뢰야식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종자이다. 종자는 육체와 달리 아뢰야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 속에 내장되어지는 행위의 습기이다. 하지만 아뢰야식과 종자와의 관계를 본다면, 아뢰야식은 종자를 담는 그릇일 뿐으로서 종자가 없다면 아뢰야식도 없게 되는 不一不二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본체라하고 종자를 그 작용이라고 한다.

 ‘장소란 우리가 그 안에서 서식하는 자연계를 말한다. 이것을 하나의 그릇에 비유하여 器世間이라고도 부른다. 외계인 자연계도 물론 식으로서 근본식인 아뢰야식의 종자에 의하여 창조되며, 동시에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이 된다.

 

아뢰야식에 언제나 동반하는 다섯 가지 심작용

 

 아뢰야식에는 다음의 다섯 가지 심작용(五遍行心所)가 언제나 동반한다.

 

(sparsa) : 감각기관()과 인식대상()과 인식주체()3자가 결합할 때에 최초로 생하는 미세한 심작용이다. 즉 인식대상으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감각기관에 변화가 생기고, 그 결과 , 이라는 감수작용이 일으나는데, 구체적으로 苦樂의 감정이 생기기 이전에 감각기관의 변화에 감촉되어 그 변화를 인지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作意(manaskara) : 마음을 구체적으로 활동시키고 마음을 어느 일정한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작용이다.

(vedana) : 불쾌한 대상을 괴롭다()고 감수하는 작용과 즐거운 대상을 즐겁다()고 감수하는 작용과 불쾌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대상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不苦不樂)고 감수하는 작용을 말한다. 의 감수작용으로부터 집착이 일으난다. 왜냐하면 불쾌한 대상으로부터는 달아나고 싶고, 즐거운 대상에 대해서는 그것을 언제까지나 유지해 두고자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뢰야식에 동반하는 不苦不樂인 것 즉 (upeksa)이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의 인식작용(行相)과 인식대상(所緣)은 지각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것이기 때문이다.

(samjna) : ‘이것은 청색이며 황색이 아니다라는 등의 대상의 특수성 내지 특질을 인지하는 지각작용이다. 바꿔 말하면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진 감각적 소재를 통합하여 하나의 상으로 구체화시키는 작용이다. 대상이 무엇인가를 인지하는 데에는 언어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상이라는 심작용을 통하여 말이 시작된다. 앞의 수가 정적인 심리작용의 근본이라면, 이 상은 지적인 심리작용의 근본이다. 불교에서는 이 두 가지의 심작용을 특별히 기피한다. 왜냐하면 가 근본원인이 되어 情的으로 속박되고, 이 근본원인이 되어 知的으로 속박되어, 윤회를 계속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cetana) : 구체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의지작용을 말한다. 이 의지작용을 통하여 행위가 선 혹은 악이 된다.

 이상의 오편행심소는 아뢰야식과 마찬가지로 다음의 성질을 갖는다.

異熟識이다.

인식작용(行相)과 인식대상(所緣)은 지각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다.

어느 하나의 心所는 그 자신 이외의 네 가지 심소 및 아뢰야식과 언제나 함께 작용한다.

번뇌에 덮혀 있지 않으며(無覆),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별되지 않는다(無記).

 

無覆無記인 아뢰야식

 

 아뢰야식은 번뇌에 덮혀 있지 않으며(無覆), 선과 악의 어느 것으로도 기별되지 않는다(無記). 아뢰야식이 無覆(anivrta)라고 하는 것은, 아뢰야식과 함께 작용하는 것은 앞에서 본 五遍行心所뿐인데, 이 다섯 가지 심소는 더러운 마음(煩惱)이 아니기 때문에, 아뢰야식이 더러움으로 덮여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더러움으로 덮여진 것(有覆)해탈에 이르기 위한 성스러운 수행(聖道)’을 방해 하지만, 아뢰야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뢰야식이 無記(avyakrta)라고 하는 것은, 아뢰야식은 과거의 선한 행위 혹은 악한 행위를 원인으로 해서 今世에 형성된 것으로 그 형성의 원인이 된 선업 혹은 악업은 그 영향력을 모두 소비하여 현세의 아뢰야식에는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뢰야식 그 자체는 함께 작용하는 五遍行心所와 함께 선도 악도 아닌 無記이다. 선업 혹은 악업만이 내세를 결정하는(異熟識을 낳는) 종자를 형성하므로, 아뢰야식 및 함께 작용하는 오편행심소는 선도 악도 아니므로 내세를 결정하는 힘을 갖는 이숙식의 종자를 낳지는 않는다. 8식 가운데 이숙식의 종자를 낳는 것은 6식 까지의 경험세계 내의 善惡業이다.

 

아뢰야식의 相續

 

 아뢰야식은 고정적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매 찰라마다 멸하고 생하며 相續(samtana, samtati)해가는 찰라멸적인 것이다.

 

아뢰야식의 소멸

 

 아뢰야식이 아뢰야식으로서 계속 활동하고 있는 한 우리는 생사를 반복하면서 계속 윤회해 간다. 따라서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고자 하면 아뢰야식은 수행과정을 통해 멸해져야 한다. 아뢰야식은 아라한위에서 소멸된다. 阿羅漢(arhat)이란 소승에서 설하는 최고 성자의 위치이다. 이 위에서는 더이상 배워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 배움이 완성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無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유식설은 대승이므로, 성유식론에 의하면 이 경우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은 성문독각보살의 3승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아라한위에서 아뢰야식이 소멸한다(vyavrtti, )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아뢰야식 속의 잠재적인 악(dausthulya, 麤重)이 모두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잠재적인 악이란 번뇌를 일으키는 종자를 가리킨다. 아라한이 되면 그러한 종자가 사라지는데 이것을 두고 아뢰야식이 소멸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뢰야식이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존재가 허무로 돌아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단지 마음으로부터 더러움(煩惱)을 생하게 하는 잠재력이 완전히 제거되어 아뢰야식이 이미 아뢰야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러움으로 가득찬 마음()이 청정한 마음()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을 轉識得智라한다. 아뢰야식에서 더러움을 제거하여 無垢의 상태로 닦아내는 것, 이것이 유가행유식파에서 지향하는 궁극의 !







진여불성님의 http://blog.daum.net/amitabhapureland/140 블로그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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