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75칙은 오구화상이 정주(烏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스님에게 정주(定州)화상의 불법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나눈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스님이 정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뒤에 오구화상을 참문하자, 오구화상이 물었다. “정주화상의 선법은 이곳의 선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다르지 않습니다.” 오구화상은 “만약 다르지 않다면 다시 거기로 가라!” 하면서 주장자로 곧장 후려쳤다. 스님은 말했다. “방망이에 눈이 있습니다. 함부로 사람을 후려치면 안 됩니다. ” 오구화상이 말했다. “오늘은 한 사람(一箇)을 친다” 하면서 또 세 번이나 후려쳤다. 스님은 곧장 승당 밖으로 나갔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억울한 방망이를 얻어맞은 사람이 있었구나!” 스님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국자 자루를 화상이 쥐고 있는데, 어떡합니까?” 오구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대에게 빌려주겠다. ” 스님은 앞으로 나아가 오구화상의 주장자를 빼앗아 세 차례나 치니, 오구화상이 말했다. “억울한 방망이야, 억울한 방망이!” 스님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맞습니까?” 오구화상이 말했다.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놈이군!” 스님은 곧 예배를 올렸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화상! 이렇게 하는 것이야!” 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나갔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니, 이렇게 할 수 있다니. ”
擧. 僧從定州和尙會裏, 來到烏臼, 烏臼問, 定州法道何似這裏.僧云, 不別. 臼云, 若不別更轉彼中去, 便打. 僧云, 棒頭有眼, 不得草草打人. 臼云,
今日打著一箇也. 又打三下. 僧便出去. 臼云, 屆棒元來有人喫在. 僧轉身云, 爭奈杓柄, 在和尙手裏. 臼云, 汝若要山僧回與汝. 僧近前奪臼手中棒, 打臼三下. 臼云, 屈棒屈棒. 僧云, 有人喫在. 臼云, 草草打著箇漢. 僧便禮拜. 臼云, 和尙. 恁去也. 僧大笑而出. 臼云, 消得恁, 消得恁.
본칙의 공안은 <종문통요집> 제5권, <오등회원> 제3권의 오구화상장에 전하고 있다. 오구화상은 마조선사의 선법을 이은 제자로 <전등록> 제8권에 선문답을 전하고 있지만,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본 공안은 정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어떤 스님이 오구화상을 참문하여 나눈 대화이다. 정주화상은 북종선 보적(普寂)선사의 법을 이은 석장(石藏)선사인데, 그에 대한 행적도 전하지 않는다.
오구화상은 그 스님에게 “그대는 정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했다고 했는데, 정주화상의 선법(法道)과 이곳(這裏) 나의 선법과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라고 물었다. 즉 정주화상은 북종선의 선법을 계승한 선승이고, 나(오구)는 남종선의 선법을 계승한 선승인데, 그대는 어떠한 차이점을 파악하고 있는가? 원오도 ‘견해가 깊고 얕은지를 판단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오구화상은 수행자의 안목을 점검해 보기 위한 상투적인 물음인 것이다. 그 스님은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라고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불법은 심법(心法)이고, 본래 고정된 한 법도 없는 공(空)이며, 무법(無法)인데, 정주화상의 선법과 오구화상의 선법이 다르다고 한다면 차별과 분별에 떨어진 중생이며,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한 안목 없는 선승이다. 그 스님은 오구화상이 던진 물음의 본의를 파악하고 민첩하게 한마디로 다름없다고 말한 점으로 볼 때 과연 정법의 안목을 갖춘 수행자이다. 석두의 <참동계>에도 “사람의 근기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지만, 불도는 남북의 조사가 없다”라고 읊고 있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 오구화상은 “만약 다르지 않다면 다시 거기로 가라!” 하면서 주장자로 곧장 후려쳤다. 정주화상의 선법과 나의 선법이 다르지 않다면 무엇 하러 이곳에 왔는가? 속히 본래 있던 그곳(彼中)으로 되돌아가라고 하면서 곧장 주장자로 때렸다. 원오도 “올바른 법령을 시행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스님은 그냥 물러서지 않고 “방망이에 눈이 있습니다. 함부로 사람을 후려치면 안 됩니다”라고 대꾸했다. 방망이에 눈이 있다는 말은 안목없는 놈은 때려야 하지만, 안목있는 납승을 함부로 때려서는 안 된다는 비판의 말이다.
“방망이를 사용할 줄 아는 안목이 있는 선승이라면 어떻게 안목있는 납승에게 방망이를 함부로 가볍게 휘두르고 있습니까?”라고 날카롭게 꼬집는 말이다. 원오는 “정말 작가라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사자 새끼로다”라고 이 스님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오구화상은 “오늘은 한 사람(一箇)을 친다” 하면서 또 세 번이나 후려쳤다. 한 사람은 도안의 고사에 의거한 말로 한 사람의 성자(一箇聖者)를 말하는데, 오구화상은 오늘 비로소 정법의 안목을 갖춘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너무나 즐겁고 기뻐서 주장자를 멋지게 후려 칠 수가 있었다고 하면서 거듭 세 번이나 신나게 때리고 있다. 통쾌하고 유쾌한 오구화상의 만족한 지혜작용의 방망이이다. 그 스님은 곧장 승당 밖으로 나갔다. 오구화상의 묘용인 방망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오구화상이 그 스님에게 “억울한 방망이(屈棒)를 얻어맞은 사람이 있었구나!” 라고 말했다.
억울한 방망이(屈棒)는 스님이 오구화상이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비판한 말에 대한 조소(嘲笑)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국자 자루(방망이)를 화상이 쥐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지요” 오구화상은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대에게 빌려주겠다” 라고 말하자, 스님은 앞으로 나아가 오구화상의 주장자를 빼앗아 세 차례나 쳤다. 오구화상은 “억울한 방망이(屈棒)야, 억울한 방망이!” 라 말했다. 이 말은 방망이에 눈이 없군! 마주잡이로 방망이를 휘두르는가? 라고 반문하는 의미이다.
오구화상과 스님의 선문답은 주객 상호이며, 빈주(賓主)가 뒤바뀌는 지혜의 묘용을 자유롭게 펼치고 있다. 스님은 오구화상에게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맞습니까?”라고 묻자, 오구화상은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놈이군!” 이라고 하면서 앞에 스님이 한 말로 대꾸했다. 스님은 곧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구화상은 말했다. “그렇지, 이렇게 하는 것이야!” 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원오는 “작가 선객이 본래 있었다. 사나운 호랑이라야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훌륭한 수행자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래서 오구화상도 “이렇게 훌륭한 지혜를 펼칠 수가 있다니, 이렇게 할 수 있다니(消得)” 라고 감탄의 한마디를 남긴 것이다. 소득(消得)은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무애자재하게 지혜작용을 펼치고 있는 수행자를 훌륭하다고 극히 칭찬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부르기는 쉬워도, 보내기는 어렵다” ‘평창’에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뱀을 잡는 사람이 피리를 불어 뱀을 불러 모으기는 쉬워도 모인 뱀을 필요한 만큼 잡고 돌려보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잘못 취급 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다. 오구화상이 안목을 갖춘 스님을 점검하는 모습을 비유하여 읊고 있다. “서로 주고받은 기봉을 자세히 보라!” 오구화상과 스님이 나눈 선기작용은 주객이 서로 바뀌고, 빈주가 뒤바뀌며, 주고 뺏음이 자유자재하게, 준엄한 지혜를 주고받고 있다.
원오도 “일출일입(一出一入), 두 사람이 모두 작가로다. 하나의 주장자를 두 사람이 서로 붙잡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견고한 겁석(劫石)도 오히려 부서지네’ 오구화상과 스님이 나눈 절대적인 선기작용은 견고한 무한의 시간을 요구하는 겁석도 일시에 파괴되고 만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경지의 선기작용을 펼친 것이다. ‘푸른 바다 깊은 물도 디디자마자 곧 마른다’ 또한 무량한 대해(大海)의 바다도 한 순간에 메마르게 하는 기운이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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