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76칙은 단하천연화상이 찾아온 한 스님에게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단하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산 밑에서 왔습니다.” 단화화상이 말했다. “밥은 먹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밥은 먹었습니다.” 단화화상이 말했다. “그대에게 밥을 먹도록 한 사람은 안목을 갖추었는가?” 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장경선사가 보복선사에게 물었다. “밥을 먹도록 한 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자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을까?” 보복선사가 말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두 사람 모두 눈먼 놈이다.” 장경선사가 말했다. “본분의 선기를 다했다면 눈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보복선사가 말했다. “나를 눈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擧. 丹霞, 問僧, 甚處來. 僧云, 山下來. 霞云, 喫飯了也未. 僧云, 喫飯了. 霞云, 將飯來與汝喫底人, 還具眼. 僧無語. 長慶問保福, 將飯與人喫, 報恩有分, 爲什不具眼. 福云, 施者受者二俱漢. 長慶云, 盡其機來, 還成否. 福云, 道我得.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4권과 <전등록> 제14권 단하천연장에 전하고 있으며, 장경과 보복의 문답도 수록하고 있지만, 약간의 문구와 내용이 다르다.
단하천연(丹霞天然 : 738~824)화상은 석두희천의 선법을 이었고, 등주 단하산에서 행화를 펼친 선승이다. 행각하다가 추운 날 혜림사에서 목불을 쪼개어 태워 추위를 막은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조당집>에 의하면 단하화상은 어릴 때 유교와 묵자(墨子)를 공부하였고, 9경(經)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평창’에도 <전등록>에 의거하여 단하화상의 전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출가하기 전에 <벽암록> 제42칙에 등장한 방거사와 과거시험을 보러 가다가 행각하는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강서 마조선사의 선불장(選佛場)을 참문하여 마조의 안내로 석두선사와의 인연을 맺었다.
단하화상이 어떤 스님이 참문하러 왔기에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라고 인사말로 물었다. ‘어디서’라는 질문에는 수행자가 온 장소와 본래면목의 출처에 대한 두 가지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방심하면 차별심에 떨어지고 만다. 즉 수행자의 안목을 점검하기 위해 가볍게 던지는 문제인 것이다. 스님은 “산 밑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강서나 호남이나 약산이나 백장이나 특정한 장소나 선원을 말하지 않고, 산 밑에서 산위에 있는 선사를 참문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 원오는 “수행자가 산 아래서 왔다는 이 말은 약간의 선기작용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 한마디 말로서는 안목을 갖춘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착어했다. 그래서 단하화상은 “그대가 산 밑에서 왔다고 했는데, 배가 고프겠구나, 밥은 먹었는가?” 라고 두 번째 물음을 던졌다. 이 질문에는 불법을 깨달은 선열식(禪悅食)으로 배를 가득 채웠는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지혜가 있는가? 원오도 “두 번째 발 씻은 더러운 물을 뿌렸다”고 착어했다. 그 스님은 “예! 밥은 먹었습니다” 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깨달음을 체득하여 일대사의 불법공부를 끝내고 마쳤습니다. 불법수행에 졸업이 있을까? 깨달음이 졸업인가? 한 소식을 얻었다고 하는데, 얻은 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어떤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중생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지혜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왜냐하면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말이나 깨달음의 세계는 무소득, 무소유의 경지이며 본래무일물의 경지라는 불법의 진실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법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망념의 환상에 빠진 한 소식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화화상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밥을 먹도록 공양한 사람도 있구나. 그는 눈이 제대로 박힌 인간인가?” 라고 날카롭게 비꼬며 반문하였다. ‘너 같이 멍청하고 안목없는 수행자에게 선법을 지도하고 깨달음이라는 식사를 제공한 놈 역시 정법의 안목이 있는 녀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눈먼 인간이 아니냐’라고 조소한 말이다. 그 스님은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단하화상이 던진 세 번째 화살(말)은 스님의 심장에 깊이 박혔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할 수 없는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상이 본칙 공안의 제 일단이다. 약 100년 후 설봉문하의 장경혜릉과 보복종전선사가 이 문제의 공안을 제시한 대화를 설두는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장경선사가 보복선사에게 물었다. “스님에게 공양한 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자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을까?” 수행승에게 공양하는 것은 삼보의 은혜와 사회의 은혜를 갚는 의미이며,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훌륭한 공덕의 일인데, 왜 단하화상은 안목없는 놈이라고 하며, 안목없는 놈이 안목 없는 놈에게 공양했다고 하는가? 그대는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하면서 동문인 보복선사의 견해를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자 보복선사는 “공양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두 사람 모두 눈먼 놈”이라고 말했다. 깨달음의 경지인 불심은 공양을 베푸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공양물도 모두 청정하여 주객도 없고 안목있고, 없는 차별의 눈도 없다. 보복은 불법의 근본(第一義)은 공양하는자나 받는자나 보은의 자격이 있고 없음에 대한 이원(二元) 대립의 차별심도 없다고 한 말이다.
원오도 “이 한마디로 전부 다 끝냈다”고 한칼에 일체의 차별을 차단한 것이라고 착어했다. 장경선사는 “본분의 선기(禪機)를 다했다면 눈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라고 말했다. 즉 이 말은 나는 보은이나 안목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불심의 지혜작용을 펼친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나를 눈먼 놈이라 할 수 있는가? 단하화상이 스님에게 한 말을 빌려서 자기의 식견을 제시하고 아울러 보복의 안목을 점검하는 말이다. 원오는 “무슨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가”라고 착어한 것처럼, 장경은 무분별하게 까닭모를 소리를 하고 있다. 장경 자신이 아직 철저하지 못한 경지를 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보복선사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는 나를 눈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힐문하고 있다. 즉 나는 선기를 다하거나 다하지 않거나 그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자신이 눈먼 놈이 아니다 라고 혼자 과시하면서 ‘나보고 눈먼 놈이라고 말하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원오는 “두 사람 모두 풀 속에 있다’며 분별의 중생심에 떨어져 있다고 착어하며,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산승이 그러한 경우라면, (장경이) ‘본분의 선기를 다했다면 눈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할 때, 그에게 ‘눈먼 놈’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애석하다. 당시 보복스님이 나처럼, “이 눈먼 놈”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설두화상의 허다한 잔소리를 모면할 수 있었을텐데.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선기를 다했다면 장님이 되지 않았을텐데’ 장경과 보복의 대화를 하나의 게송으로 읊었는데, 원오는 두 사람 모두 온전한 경지를 들러내지 못하고 “단지 절반을 말했을 뿐”이라고 착어했다. “소를 끌고 와서 풀을 먹이네”
이것은 <대지도론>과 <중경찬잡비유경(衆經撰雜譬喩經)>에 죽은 소에게 풀을 먹이려는 동자의 이야기에 의거한 말이다. 단하화상이 스님에게 공양한 사람이 안목이 있는가? 밥을 받아먹은 자는 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게송으로, 이것은 마치 죽은 소에게 풀을 먹도록 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읊은 것이다. ‘서천 28대 조사. 동토의 모든 조사의 보배 그릇(寶器)을 가져와 허물을 이루었네’ 조사의 보배 그릇은 조사의 심인(心印)으로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한 불심의 지혜 그릇이다. 이 보배그릇을 활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식사를 제공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는 사람 모두 안목이 없는 눈 먼 사람은 큰 죄인이 된다. 단하산의 스님은 물론, 장경과 보복도 허물을 면할 수가 없다. 장경과 보복이 보배의 그릇을 상처 낸 허물은 ‘허물이 깊어 찾을 곳이 없다’ ‘천상 인간, (삼계 육도의 모든 중생이) 모두 다함께 허물에 침몰되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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