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77칙 雲門餬餠 - 운문화상의 호떡[餬餠]

수선님 2018. 9. 30. 12:44

관련 이미지 <벽암록> 제77칙은 운문화상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을 질문하자 호떡이라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입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호떡이다.”

 

擧. 僧問雲門, 如何是超佛越祖之談. 門云, 餬餠.


본칙의 공안은 지극히 간단한 선문답인데, <운문록> 상권에는 운문문언(864~949)화상이 상당법문하는 가운데 나눈 대화로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마디의 말을 겨우 들면 모든 천차만별의 발자국(궤적)이 같아지며, 미진(微塵)을 모두 다 포괄한다 해도 그것은 교화 방편문으로 하는 말이다. 만약 이러할 때 납승의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조사(祖師)의 의지나 부처의 의지를 가지고 사량분별(商量)한다면 조계의 일로(一路)에 빠지게 되리라. 누군가 (조사의 의지나 부처의 의지를 극복한) 경지에서 말할 사람이 있는가? 말할 수 있으면 나와라”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무엇이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입니까?” 운문선사는 말했다. “호떡()이다” 스님이 말했다.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운문선사가 말했다. “분명히 무슨 관계가 있다” 선사는 또 말했다. “그대는 알았다고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조사의 의지를 말하면 그것을 듣고는 곧장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을 물을 것이다. 우선 무엇을 부처라고 하며, 무엇을 조사라고 하기에 나아가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을 말하고 있는가?”

 

<조당집> 제11권 운문장에는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입니까?”라는 똑같은 질문에 “포주(蒲州)에는 마황(麻黃)이 익주(益州)에는 부자(附子)가 나지”라고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대답하고 있다. 또 <운문록> 상권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대들이 주장자를 걸머지고 나는 참선하여 도를 배운다고 하며,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도리를 찾는다. 내 먼저 그대에게 묻노라. 하루 종일 행주좌와하고 똥오줌 싸는 일과 거름 구덩이의 벌레에서 양고기 파는 탁자에 이르기 까지 부처나 조사를 초월할만한 도리가 있는가? 말할 수 있으면 나오라! 없다면 내 앞에서 거리적거리지 말라.”

 

<운문록>과 <조당집> 운문장에는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에 대한 법문이 몇 차례 등장한다. 즉 “어떤 스님이 목주화상에게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 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목주화상은 곧장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나는 이것을 주장자라고 하는데, 그대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대답이 없었다.

 

목주화상은 다시 주장자를 들고 말했다.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을 그대에게 묻노라’ 그 스님은 대답이 없었다” 목주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이라고 제시하면서, 또 질문자에게 그 질문을 되돌리고 있다. 선문답에서 대답은 질문에 있다는 말이 있다. 운문은 상당법문에서 조사의 의지나 부처의 의지를 가지고 사량분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운문의 설법은 학인들의 안목을 열어주기 위한 방편이다.

 

도대체 부처나 조사를 초월한 말이란 무엇인가? <임제록>에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있고, 선어록에는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매도하고’ ‘부처를 훼손하고, 조사를 훼손한다’는 말도 보인다. 그러면 부처나 조사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나 조사란 무엇인가?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이 부처인가?

 

부처나 조사란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으로 제시한 이름이며 가상으로 표현한 형상인 것이다. 부처나 조사를 초월한다는 것은 형체나 모양이 있는 부처나 조사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부처나 조사에 대한 권위의식이나 어떤 고정관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망념의 중생심을 텅 비워버리고 본래의 불심(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다.

 

즉 부처나 조사에 대한 고정된 상상의 이미지는 물론, 부처나 조사들이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하여 머무름이 없는 무주(無住)의 실천으로 무한한 자기 향상을 이루는 깨달음의 실천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나 조사라는 이름과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상(모습) 이미지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부처나 조사에 대한 명상(名相)과 고정관념의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본래심의 지혜로운 선의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조당집> 제4권에 단하천연선사가 행각하다 추운 날 혜림사에서 법당의 목불(木佛)을 쪼개어 불 피우고 추위를 막은 유명한 이야기도 형상의 불상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린 행동이다. 당시 원주는 단하선사를 욕하다가 눈썹이 빠지는 형벌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불상을 부처로 착각하고 있다. 참된 부처(眞佛)는 어디에 있는가?

 

선에서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면서 많은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마음이 곧 부처’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으면 외도’라고 많이 주장하고 있지만 많은 수행자가 마음 밖에서 찾고 있고, <금강경>에서도 모양과 형색, 소리를 통해서 여래를 친견할 수 없다고 주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수행자가 착각하여 모양과 형상을 통해서 부처를 친견하려고 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미묘한 법문을 해 주십시요” 라고 부탁하자, 운문화상은 “호떡()”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운문의 어록을 비롯해서 선승들의 선문답에 호떡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조정사원> 제1권에는 참기름으로 구운 일종의 중국 만두라고도 한다. 그런데 운문화상은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을 ‘호떡’이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등록> 제12권에 “진조(陳操)상서가 스님들께 공양하고, 호떡을 하나 집어 들고 스님에게 물었다. ‘강서나 호남에도 이런 것이 있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상서는 아까 무엇을 먹었지요?’ 진상서가 말했다. ‘종을 치니 메아리가 울린다’” 여기 진조상서가 호떡을 들고 제시한 것은 본래면목의 유무(有無)를 점검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스님이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먹었는가?’라고 하며 본래면목의 작용을 제시했기 때문에 진조상서가 칭찬한 것이다. 운문화상이 호떡이라고 대답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한다는 것은 부처나 조사의 이름과 형상에 미혹하는 중생심에서 불심인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다.

 

원오는 운문화상이 호떡이라고 대답한 말에 대하여 ‘혀가 입천장에 딱 붙었다’라고 착어했다. 이 말은 입을 다물고 좌선하는 모습이며, 말 할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한 입에 가득 찬 호떡을 먹으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는가?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진정한 법문이 말로서 가능할까?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言詮不及) 불립문자의 경지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며, 부처나 조사라는 망념을 초월한 경지이다.

 

말하자면 호떡을 먹은 일이 부처나 조사라는 분별의식과 고정관념도 없이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본래면목의 삶인 것이다. 조주화상이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라고 한 말도 마찬가지로 일체의 차별심을 초월하고 차를 마시는 불심(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을 자각하도록 하는 일상생활의 법문인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초월한 말을 묻는 선객이 매우 많다” 부처와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법을 묻는 수행자는 많다. “틈새가 여기저기 터진 것을 보았느냐?”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벌써 완전무결한 불심을 언어 문자의 차별로 상처투성인 중생심으로 만들었네. “호떡으로 털어 막았는데도 아직도 긍정치 못하네”

 

운문은 질문한 스님의 분별심 구멍에다 호떡으로 틀어 막았는데, 아직도 깨달음이나 현상에 집착하여 불법의 근본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도 천하의 모든 수행자들이 착각하고 있다” 운문이 스님을 위해 호떡으로 정법의 안목을 바꾼 방편법문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읊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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