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52. 교외별전(敎外別傳) 12

수선님 2018. 10. 7. 13:06


앞의 글에서 서양학자들은 우상타파적(iconoclastic)인 점을 선종의 특성으로 꼽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여기에서 우상타파란 불상, 보살상, 신상 같은 것을 때려 부순다는 뜻이 아니라 가짜를 진짜로 착각하여 애지중지하는 그릇된 숭배를 타파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선종에서 어떤 우상을 그토록 강력하게 타파하기에 선종을 두고 우상타파적이라고 하는 걸까? 선종에서 가장 강력하게 타파하고자 하는 우상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분별이다. 분별이 우상이라고? 그렇다. 중생은 세상의 진상인 불이법(不二法)에 어긋나는 분별, 구별, 차별을 지어내고는 진리인 양 숭배하고 살아가니 그것을 두고 우상숭배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선사들이 가장 힘주어 경계하는 분별은 나 자신과 부처는 다르다고 하는 분별이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부처가 아니며 부처는 나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하는 생각이다.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하도 유명해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으리라 짐작된다. “도를 닦는 이들이여! 참다운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사람에 속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대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말 그대로 보자면 섬뜩한 얘기이다. 특히 요즘처럼 자기 친척뿐 아니라 심지어 부모까지 살해하는 패륜까지 제법 흔히 저질러지는 흉흉한 세태에서는 정말 섬뜩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살인을 하라는 뜻이 물론 아니다. 부처, 조사, 아라한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가 지어내는 온갖 분별을 떨쳐버리라는 뜻이다. 부모는 부모이고 나는 나이며, 친척은 친척이고 나는 나라는 분별을 떨쳐버리라는 뜻이다. 고유한 개체로서의 나(아我)를 전제하고 보면 부처고 조사고 아라한이고 부모고 친척권속이고 간에 모두가 남이다.
 
하지만 그 모두가 서로 다른 개체, 즉 불일(不一)일 뿐만 아니라 연기(緣起)의 관계, 즉 불이(不二)의 존재라는 것이 불교에서 역설하는 세상의 진상이다. 그 진상을 보려면 부처, 조사, 아라한, 부모, 친척권속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지어내는 분별의 허상, 분별의 우상을 타파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임제록>의 그 구절은 부처, 조사, 아라한, 부모, 친척권속을 정말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와 그들을 구별하는 내 속의 아집, 망상을 부수라는 뜻이다.

 

선사들은 특히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라는 얘기를 자주 힘주어 하였다. 여기에서 부처라 함은 그 말의 원래 뜻대로 깨달은 이를 가리키기도 하고, 나아가 깨달음 그 자체라든가 깨달음의 내용이 되는 세상의 진상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부처라는 개념을 가지고 나 밖에다가 어떤 휘황찬란한 인물의 이미지를 그려놓고는 숭배할 것이 아니라, 내가 곧 부처라는 불이법을 깨달으라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선에서 내리는 모든 진단과 처방이 다 분별의 문제로 수렴된다. 경전의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태도도 바로 그 분별 때문에 어그러져 버린다고 보는 것이 선의 입장이다. 부처니 조사니 아라한이니 하는 개념도 그렇거니와 경전에서 개진되는 모든 가르침이 불이법을 가르치기 위해 짐짓 설한 방편인데, 그것을 가지고 오히려 분별만 일으키고 있으면 되겠느냐는 것이 교외별전의 구호에 담긴 또 하나의 뜻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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