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82칙 大龍堅固法身 - 대룡화상의 견고한 법신

수선님 2018. 10. 7. 13:04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82칙은 대용화상이 법신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대룡(大龍)화상에게 질문했다. “색신(色身)은 부서지고 파괴되는데, 견고한 법신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룡화상이 말했다. “산에 핀 꽃은 비단결 같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다.”

 

擧. 僧問大龍, 色身敗壞, 如何是堅固法身. 龍云, 山花開似錦, 澗水湛如藍.


본칙의 공안은 어디서 채택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후대의 자료인 <오등회원> 제8권 대용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다. 대룡화상은 송대에 낭주(朗州) 대룡산에서 활약한 지홍(智洪)선사로 덕산의 법맥을 계승한 백조지원(白兆志圓) 선사의 선법을 이었다. 그의 법문은 <전등록(傳燈錄)> 제23권 지홍 홍제(弘濟)대사전 약간의 선문답을 전하고 있지만 전기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본칙의 선문답은 어떤 스님이 대룡화상에게 “육체인 색신은 시절인연에 의한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四大)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생노병사의 무상한 존재이며, 시절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부서지고 파괴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영원히 부서지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법신이란 어떤 것입니까?” 라고 질문한 것이다. 이 질문은 색신과 법신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며, 색신(色身)인 인간의 육체는 부서지고 파괴되는데,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견고한 법신은 어떠한 것인가를 문제로 삼고 있다.

 

사실 법신의 문제는 <벽암록(碧巖錄)> 제39칙과 제47칙에 운문선사에게 질문한 선문답을 비롯하여 선문답의 중심과제이다. 선문답의 핵심문제는 색신과 법신에 대한 철저한 안목을 체득했는가. 아니면 법신을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이 문제는 수행자들이 불법의 대의와 선사상을 철저하게 확립해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불법의 근본사상을 배우고 익히며, 법신을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기 위해 선지식을 참문하고 이러한 문제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불유교경>에 “일체의 세간에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존재는 모두 파괴(敗壞)되는 것이기에 불안한 모양인 것이다”라고 하는 일절과, <화엄경(華嚴經)> 노사나품에 “법신은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고 일체의 모든 법계에 두루 충만하고 있다”는 설법을 염두에 두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색신은 유위법(有漏法)이고 진리의 당체인 법신은 무위법(無漏法)이다. <대지도론> 제9권에 ‘부처는 두 종류의 몸(二種身)이 있다. 첫째는 법성신(法性身)이며, 두 번째는 부모생신(父母生身)이다’라고 설한 것처럼, 색신은 부모의 인연으로 몸을 받은 육체를 말하며, 법신은 불법을 체득한 지혜의 당체를 말한다.

 

색신과 법신은 부처가 구족하는 기능을 분류한 것이다. 육체가 없이 법신(마음)의 지혜작용을 전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육신은 인연으로 가합된 것이기 때문에 생노병사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을 거쳐 파괴되고 만다. 무상한 육신이 파괴되는 모습을 점차로 관찰하여 세간의 다섯 가지 욕망과 육신의 애착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도록 제시한 수행법이 구상관(九想觀)이며 백골관(白骨觀)이다. 그러나 불법의 진실을 체득한 당체이며 지혜작용을 전개한 법성신(法性身) 즉 법신은 영원히 파괴되지 않고, 시방의 허공에 가득 차고 무량광명과 무량의 수명이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다.

 

<유마경(維摩經)>에 유마힐이 아난에게 “여래의 몸은 금강과 같이 파괴되지 않는 것을 본체(金剛之體)로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법신은 파괴되지 않는 금강불괴(金剛不壞身)이다. 왜냐하면 법신은 육신과 같이 생멸법과 생사의 인연법을 초월한 지혜의 법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도 “불자여! 비유하면 허공과 같이 일체의 모양과 형상이 있는 경계(色處)나 모양과 형색이 없는 곳(非色處)에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래서 이르지 않거나 이르지 아니한 곳도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법신도 이와 같다. 일체의 경계에 이르고 일체의 국토에 이르고, 일체 법이나 일체 중생에게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의 몸은 고정된 몸이 아니기 때문에 곳에 따라 변화하여 그 몸을 나투어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또 <화엄경(華嚴經)> 여래현상품에도 “불신은 법계에 가득 충만하여 널리 일체 중생들 앞에 나투고 있다. 안연에 따라 나아가 감응하여 두루하지 아니한 곳이 없지만 항상 깨달음의 당처에 앉아 있도다”라고 읊고 있다. <유마경(維摩經)> 방편품에 “불신(佛身)은 곧 법신이다. 무량의 공덕과 지혜를 이룬다”라고 하고, “무량하고 청정한 법을 이루기 때문에 여래신(如來身)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진여의 지혜를 법신이라고 한다”는 것처럼, 불법의 진실을 체득한 지혜가 법신이다. 법신은 모양도 형상도 없기에 파괴되지 않고 영원한 지혜광명과 무량한 공덕을 이루는 당체이다.

 

<열반경(涅槃經)> 등 대승경론에서는 여래의 법신을 허공에다 비유하는데 허공은 태어나거나 죽는 생사와 생멸이 없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며, 무량무변하며, 일체의 만물을 포용함과 동시에 생성하도록 하고 있는 무한한 지혜광명의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스님은 경전에서 주장한 색신과 법신에 대한 말을 듣고, 법신에 대한 의미를 확실히 체득하기 위해 대용화상에게 질문한 것인데, 원오는 “이 스님이 색신과 법신이라는 두 가지 차별에 떨어졌다”라고 착어했는데 이러한 차별에 떨어진 스님의 질문에 대용화상은 “산에 피어 있는 많은 꽃들은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이 아름답고, 개울의 시냇물은 파란 색깔에 너무나 맑기만 하다”라고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게송으로 읊고 있다. 대용화상은 사량분별을 여읜 만법의 진실한 모습이 그대로 법신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청정법신은 산에 꽃이 피고 개울물이 흐르는 그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 소동파도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이고, 산의 모양이 청정한 법신”이라고 읊고 있다. 중생의 사량분별을 초월한 무심한 산의 모습이나 개울물이 그대로 청정한 법신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본칙의 공안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었다. “질문도 알지 못하고”, 이 스님은 색신과는 달리 법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법신과 색신에 대한 불법의 대의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질문하였다. “대답해도 알지 못하네”, 법신은 언어도단의 경지라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대용화상은 차별심을 초월한 입장(不會)에서 제법실상의 세계를 게송으로 읊었는데, 스님은 대용화상의 대답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네. “달은 차갑고 바람은 드높은데, 옛 바위의 쓸쓸한 전나무여”, 달은 하늘에서 비추고 바람은 천지를 상쾌하게 하네. 그곳에 천년의 세월에 이끼가 낀 바위 옆에 푸른 전나무가 사철 변함없이 묵묵히 솟아 있다. 한적하고 청정한 법신 풍경의 유경(幽境)을 대용화상은 언어도단(不會)의 차원에서 읊고 있다. 일찍이 향엄지한선사는 “길에서 도인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꾸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우스운 일’이로다. 대용화상은 말이나 침묵으로 상대할 때도 있고, 상대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것을 상대하지 말라고 규칙으로 정한 것은 우스운 일이다.

 

대용화상은 말이나 침묵, 양변(兩邊)을 여의고 더군다나 그 양변의 차별을 버리지도 않고 산에 핀 꽃과 개울물 흐르는 게송으로 견고한 법신을 제시하였다고 찬탄하고 있다. “백옥(白玉)의 채찍을 손에 잡고, 검은 용의 구슬을 모조리 부숴버렸네”, 대용화상이 대답한 “산에 핀 꽃”이라는 백옥의 채찍(법신의 지혜)으로 용의 구슬을 사정없이 때려 부셔버렸다. 만약 대용화상이 용의 구슬이 아깝다고 “쳐부수지 않았다면, 흠집만 더했으리라”, 이 스님은 영혼을 불성이라고 착각하고 영원히 번뇌 망념이 증가하여 불법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법률이 있는 것처럼 그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법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삼천조목의 죄로서 다스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선의 세계에도 선수행자는 불법을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서 중생을 구제해야 하는데, 정법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졸승은 삼천 가지 죄를 적용해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송이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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