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붓다는 무엇을 가르쳤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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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삶과 붓다 붓다는 무엇을 가르쳤나. 일반적인 대답은 무상(無常)․무아(無我)․연기(緣起)․사성제(四聖諦) 등이다. 그런데 이들이 과연 현실의 삶에 어떤 보탬이 되는가. 이러한 가르침들로 인해 오히려 머릿속만 복잡해지는 것은 아닌가. 알쏭달쏭한 해설서들은 오히려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서 내려지곤 하는 결론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저 높은 곳에 계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기란 정말 힘들다.” 우리는 이러한 자포자기를 흔히 목격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붓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가르침을 펼쳤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처방책을 제시한(臨機應變 應病與藥)’ 자상한 상담가이었다. 쭐라빤타까(Cūlapanthaka)라는 머리 나쁜 출가수행자가 있었다. 그의 기억력은 단 한 구절의 경전도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먼저 출가하여 이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형님이 계셨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형조차 그의 어리석음에 실망하여 환속을 종용했다고 한다. 절에서 쫓겨나 울고 있는 그를 발견한 붓다는 우선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으라고 일렀다. 그런 다음 ‘먼지 닦음(rajoharaṇaṁ)’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도록 하였다. 그러자 쭐라빤타까는 먼지가 닦이어 없어지듯이 마음의 번뇌와 어리석음도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그는 무상의 도리를 깨우치게 되고 마침내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다.(DhA. IV. 180쪽 이하;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vol.1. 897쪽 이하) 이 이야기는 궁극의 깨달음이 머리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붓다는 이지적인 능력(intellectual capacity)보다는 심리적인 안정(mental stability)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즉 어떠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는가 혹은 그렇지 못하는가의 문제보다는 심리적인 태도와 마음가짐의 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이점은 「브라흐마상윳따」의 다음 구절에서도 분명하게 묘사된다.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가르침을 깨닫기 어렵다..... 어둠에 싸여 욕망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한다.”라는 언급이 그것이다.(SN. I. 136쪽) 이 시구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 붓다가 처음 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욕망이나 분노와 같은 심리적인 문제가 걸림돌로 부각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쭐라빤타까가 깨달은 무상의 도리는 결코 난해한 것이 아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곧 변화한다는 것으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삶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재산이나 명예 혹은 가치 따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는 의연하게 대처하다가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평정심을 잃는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무상의 가르침에 투철하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현실의 삶에서 그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갖가지 문제들에 노출되어 괴로움을 겪곤 한다. 그러나 탐욕 따위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막다른 길로 치닫는다. 따라서 각자 내면적인 감정에 속지 않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그러한 연후에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마음의 안정을 의미하는 사마타(止, samatha)와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觀, vipassanā)는 그것을 위해 준비된 불교적 실천법의 전형들이라 할 수 있다. 무아의 가르침 무상의 가르침이 그러하듯이 무아(無我) 또한 실천적인 맥락에서 접근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이 연루된 상황이나 사태에 대해서는 초연한 마음을 갖지 못한다. 개인적인 바람이나 의지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입장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거나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현실이 우리의 의지대로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다. 잘 못 생각한 정도만큼의 혹독한 대가가 기다리기 십상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배제한 상태에서 사물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더 이상 ‘나’를 개입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를 직시해야 한다. 무아설은 현실적인 삶의 맥락에서 벗어날 때 일종의 형이상학이 된다. 그리하여 일상적인 자아마저 부정하는 사변적 논리로 탈바꿈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주변에는 무아를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단멸론(斷滅論) 즉 ‘모든 것은 단절되어 소멸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그러한 단멸론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용인하지 않으며 허무주의로 귀착되기 쉽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자니사경」에 나타나듯이 붓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생(轉生)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상세하게 전한다.(DN. II. 200-219) 무아는 육체적인 죽음으로 종결될 수 없는 개인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나타내는 메시지로 이해됨이 마땅하다. 무아설의 본래 취지는 나의 것(mama)․나(aham)․나의 자아(me att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하는 데에 있었다. 예컨대 재산이나 명예 혹은 신분상의 손실이나 불이익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다. 특히 ‘나의 것’ 혹은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에게는 그 괴로움이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다. 살아있는 그대로 지옥의 세계를 경험하는 듯 한 고통이 뒤따를 수도 있다. 명상가이자 심리학자인 마크 웹스타인(Mark Epstein)은 육도(六道)의 윤회 세계를 바로 그러한 상황에 대한 불교적 은유(metaphor)로 해석한다. 그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모든 범부들은 윤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일종의 신경증적(neurotic)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본다.(Mark Epstein, 전현수 옮김, 「붓다의 심리학」, 2006) 그에 따르면 지옥계(地獄界)는 공격적이고 편집증적인 상태로서 격노와 불안의 심리에 지배되는 영역이다. 축생계(畜生界)는 식욕과 성욕 따위의 생리적 욕구에 압도된 상태로서 감각적 쾌락만을 목적으로 하는 상태이다. 아귀계(餓鬼界)는 끝없는 공허감에 사로잡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신경증적 상황을 반영한다. 천상계(天上界)는 감각적․심미적 쾌락에 경도되어 즐거움만을 탐닉하려는 성향에 연계된다. 아수라계(阿修羅界)는 공격적 본성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거슬리는 일체의 장애물을 파괴하려는 가학적 심리를 반영한다. 마지막의 인간계(人間界)에서는 타인과의 관계 문제가 부각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성향이 문제시된다. ‘나의 것’ 혹은 ‘나’에 대한 집착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새로운 삶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서, 마크 웹스타인은 스스로의 심적 상태와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스스로의 공격적 성향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가학적 심리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체험이 고정된 실체로 믿어왔던 ‘자아’ 혹은 ‘행위자’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신경증적 상태의 해소를 통해 문제의 상황에 처한 자신을 원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아 해석은 윤회계에 머무는 자아가 본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매우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연기의 실천적 이해 우리는 연기의 가르침 또한 실천적 맥락에서 접근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연기설은 대부분 형이상학적 대립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제시된다. 예컨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극단적인 언급이요,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도 극단적인 언급이다. 여래는 이들 두 가지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진리를 드러낸다. 즉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지음(行)이 있고,....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등이 있다.”는 구절이 그것이다.(SN. II. 17쪽) 이러한 방식으로 연기를 설하는 경전들에서는 상반되는 견해들을 일단 내세운 연후에 본론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상주론(常住論)에 속하고,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단멸론(斷滅論)에 해당된다. 이들은 비록 간단한 형식으로 기술되지만 당시의 사상계를 대변하는 양대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이들과의 사변적 유희에 빠져들지 않고서 다만 우리의 삶이 괴로움에 처하게 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그렇게 해서 제시되는 12단계의 연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명(無明)→지음(行)→의식(識)→정신․육체(名色)→6가지 감각영역(六入)→접촉(觸)→느낌(受)→욕망(愛)→집착(取)→있음(有)→태어남(生)→늙음․죽음․근심․고통․번민(老死憂悲苦惱)이 그것이다. 실천적 관점에서 연기설이 지니는 의의는 현실 여건의 발생 과정과 그것에 대한 대처의 방안을 제시한다는 데에 있다. 1번째 지분인 무명에서부터 7번째 지분인 느낌까지는 이전에 지은 행위(業力)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예컨대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좋은 환경을 성취하여 편안한 느낌을 향유하면서 산다고 치자. 노력은 지음(行)에 해당되고 의식(識)에서부터 느낌(受)까지는 생각하고 접촉하고 느끼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 이들은 과거생에서든 현재생에서든 이전에 뿌려 놓은 씨앗들이 현실의 삶으로 드러나는 과정들에 해당한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느낌은 현재의 바람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다가오는 삶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느낌이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3가지로 구분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내용들은 이러한 3가지 느낌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있다. 어찌 보면 우리 범부의 삶이란 괴로운 느낌을 멀리하고 즐거운 느낌을 추구하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느낌의 발생과 관련하여 연기의 가르침이 전하는 일단의 교훈은 스스로 처한 삶의 조건이 이전에 지은 행위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접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들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각자의 현실을 인정하고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8번째의 욕망(愛)에서부터는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바꾸어 나갈 수 있다. 예컨대 특정한 느낌에 노출되는 상황은 강제적으로 막을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느냐는 의지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들에 대해 욕심을 내거나 집착할 수도 있고 혹은 절제된 마음으로 초연하게 대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욕망 이하의 단계에서부터는 스스로의 의지를 적극 발현하여 개입시킬 수 있다. 즉 동물과 같이 본능에 지배되어 살아갈 수도 있고 자신을 조절하면서 고귀한 삶을 가꾸어 나갈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연기설은 인간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가르침이 된다. 우리는 매 순간의 느낌을 곧바로 알아차려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초기불교의 위빠사나(vipassanā) 명상은 바로 그것을 위해 고안된 실천 방법이다. 우리는 느낌 자체를 있는 그대로 주시함으로써 그것이 야기하는 무의식적 반응들을 자제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의 가르침을 전한다. “즐거운 느낌(受)을 느낄 때 즐거운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면 탐욕의 부림(使)을 받아 거기에서 떠날 길을 보지 못한다. 괴로운 느낌(受)을 느낄 때, 괴로운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면 성냄의 부림을 받아 거기에서 떠날 길을 보지 못한다.... 모든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면 현재의 법에서 온갖 번뇌가 아주 다하게 된다.”(「잡아함경」 권37, 1028경) 위빠사나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모든 느낌이 일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감각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체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선택적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즉 느낌(受) 이하의 단계에 속한 욕망(愛)과 집착(取)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존재(有)로의 변신이나 탈바꿈(生)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무명을 종식시키고 연기의 순환 자체를 멈추게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실천적 관점에서 접근해 들어간 십이연기(十二緣起)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연기 해석은 남방불교(Theravāda)의 전통적 이해로서, 위빠사나의 실천을 통한 현실 삶의 변화 가능성에 역점을 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The Doctrine of Paticcasamuppāda, U Than Daing, 1966) 12단계에 이르는 연기의 진행에서 각각의 단계는 뒤따르는 단계의 조건으로(緣, paccaya) 기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무명에서부터 늙음․죽음 등의 괴로움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 부른다. 또한 무명의 소멸로부터 일체의 괴로움이 소멸하게 되는 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고 일컫는다. 유전문은 괴로움이라는 실존적 상황과 그것의 원인을 밝힌다는 점에서 사성제의 고성제(苦聖諦) 및 고집성제(苦集聖諦)에 해당한다. 한편 환멸문은 괴로움의 소멸 과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고멸성제(苦滅聖諦)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에 해당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연기의 가르침과 사성제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표리의 관계를 이룬다. 붓다의 깨달음에 관련해서는 예로부터 여러 이견들이 존재해 왔다. 그들 중에는 연기를 깨달았다는 견해와 사성제를 깨달았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실천적 관점에서 연기설에 접근해 들어갈 때 양자는 결국 하나로 소통된다. 즉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괴로움을 극복케 하고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것(離苦得樂)’에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상적유경」에 묘사되듯이 연기설을 비롯한 여타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라는 거대한 코끼리 발자국 안에 포섭될 수 있다.(MN. I. 184쪽 이하)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현실적인 이유 또한 고(苦)․집(集)․멸(滅)․도(道)라는 사성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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