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명상이란 무엇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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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의 유래 명상暝想이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것” 혹은 “고요히 생각을 가라앉히는 것”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말은 영어 메디테이션meditation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고안된 것으로, ‘깊숙이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라틴어 메디타리meditar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전에 나타나는 설명 또한 “깊이 생각하는 것to think seriously or deeply”과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고정하고 유지하는 것... to fix and keep the attention on one matter,...”이라는 두 가지이다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 1983, 675쪽.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명상이라는 말은 이처럼 서구적 전통에서 유래한다. 메디테이션에 비교적 정확하게 일치하는 고대 인도의 산스끄리뜨Sanskrit 용어로서 디히야나dhyāna가 있다. 『요가수뜨라』에서는 이것에 대해 “의식의 작용이 한결같이 집중된 상태”로 풀이한다YS. 3-2 게송. 이러한 언급은 앞서의 서구적 해설을 하나로 압축해 놓은 듯한 간명함을 느끼게 한다. 즉 특정한 대상을 깊이 생각하는 것과 그것에 집중하여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은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초기불교의 경전어인 빨리Pali에서는 디히야나를 쟈나jhāna로 부르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선나禪那․선禪․선정禪定․참선參禪 등의 원어가 된다. 이들 한자식 표기는 빨리어 쟈나의 음역이다. 명상이라는 용어가 서구적 전통에 기인한 것이라면 선정이니 참선이니 하는 말들은 동양적 전통에 뿌리를 둔 유사어이다. 『빠띠삼비다막가』라는 경전에서는 쟈나에 “여실하게 숙고한다jhāyantīti dhammā”와 “번뇌를 태워 없앤다jhāpetīti kilese”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기술한다Ps. II, 44-45쪽. 바로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메디테이션의 두 가지 설명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여실하게 숙고하는 것”은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번뇌를 태워 없애는 것”은 부정적인 사고思考를 멎게 한다는 것으로 “고요히 생각을 가라앉히는 것” 혹은 “주의를 집중하여 고정시키는 것”에 부합한다. 차후 살펴보겠지만 메디테이션과 쟈나는 상이한 종교적 전통에서 배태된 것으로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다. 그러나 양자는 이와 같이 근접한 의미와 용례를 보이고 있다. 생각에 잠기는 것과 그것을 가라앉히는 것은 일견 상반된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는 쟈나를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해소․소통될 수 있다. 예컨대 초기경전에서는 낮은 단계의 선정初禪에서는 생각vitakka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명하는 반면에, 그 이후의 단계第二禪 이상에서는 언어적 움직임語行, vacīsaṅkhārā 즉 생각 자체가 정지한다고 가르친다Ps. I. 99쪽; MN. I. 296쪽; SN. IV. 217-218, 220, 227, 228쪽 등. 이것은 생각에 몰입해 들어가는 단계와 그러한 생각이 멈추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최초로 명상을 행할 때에는 인위적으로 특정한 생각을 일으켜 마음을 모아 나가지만, 명상이 무르익어 몰입의 상태가 되면 생각 자체가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자면 명상이란 “특정한 생각을 일으켜 거기에 몰입하고 마침내는 생각 자체가 멎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요가수뜨라』에서는 그렇게 해서 생각이 멈춘 경지를 삼매三昧, samādhi로 표현한다. 즉 “[집중의] 대상만이 홀로 빛나고 [집중하는 마음] 자체는 없어진 것 같이 된 상태가 바로 삼매이다.”라고 설명한다YS. 3-3 게송. 이러한 가르침들을 통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분야에 관련한 유사 전통들이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명상이든, 선정이든, 삼매든, 내면의 평안과 지혜를 얻기 위한 실천적 방법들이 이질적인 여러 문화권 속에서 계승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의 명상 서구적 전통에 따르면 명상meditation이란 신의 은총에 의해 신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지향한다. 이러한 상태를 나타내는 또 다른 용어로서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라는 말이 있다. 명상과 관상은 종종 혼용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전자는 후자의 상태를 이끌어 내기 위한 과정으로 묘사된다. 관상은 라틴어 컴cum, with과 템플럼templum, a consecrated place의 합성어로서 “명상의 실천에 의해 얻어진 신성한 영적 상태spiritual state”로 설명된다. 특히 일신교 전통에서는 이것을 “신의 은총에 의해 드러난 신비로운 축복의 비전vision을 누리는 상태”로 부르기도 한다Frederic B. Underwood, “Meditation”,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vol.9., 1987. 324-331쪽. 한편 동양 전통의 선정jhāna은 일체의 동요가 가라앉은 내면의 평정 상태를 목적으로 한다. 앞서 『요가수뜨라』를 통해 밝혔듯이, 그렇게 해서 얻어진 동요 없는 마음 상태를 일컬어 삼매samādhi라고 한다. 초기불교나 요가학파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여러 층이 존재한다고 본다. 즉 범부들의 생각과 의식은 탐욕과 성냄 따위의 부정적 정서에 끊임없이 노출되며 또한 거기에 오염되어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그러한 의식의 지평을 넘어선 연후라야 비로소 참된 실재reality를 깨달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동양적 전통에서는 번뇌에 물든 마음을 일단 가라앉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긴다. 선정 혹은 명상이란 바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방법이며 삼매란 그 결과로서 얻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서구적 전통에서 볼 때, 생각이 멈춘 경지를 의미하는 삼매란 단순히 무기력해진 심적 상태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삼매 체험은 단순히 생각이 가라앉은 상태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존재의 실상을 꿰뚫는 지혜般若, prajñā의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 즉 일체의 오염된 생각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발현되는 진리의 체험에 최종 목적을 둔다. 한편 불교나 요가학파에서 볼 때, 신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관상이란 일종의 들뜬 상태로서 무언가에 홀려 있는 상황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관상 체험을 전하는 문헌들에서는 그러한 와중에 주․객의 대립이 사라지고 자아의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는 무아無我의 상태가 나타난다고 언급하곤 한다Bernadette Robert, 박운진 옮김, 『어느 관상수도자의 무아체험』, 2006. 이러한 사실은 양자가 상이한 전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취급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명상은 동․서양 모두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적 가르침을 내면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승․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교리적․문화적․형이상학적 입장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특히 서구적 전통에서는 인격적 유일신을 전제로 하는 반면에, 동양적 전통에서는 그러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경향이 짙다. 그러나 양 전통은 현실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선 경지의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나아가 명상의 실천을 이기적 자아 관념의 해체 과정에 결부시킨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남긴다. 명상이란 결국 자기 본위적인 사고의 족쇄로부터 벗어나 궁극의 실재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행위임에 다름이 아니다. 명상과 종교 전통 명상 관련 가르침은 인류 정신사를 통해 계속되어 왔으며,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밟았다. 이들에 대해서는 각자의 독특성을 고려하여 유형별로 구분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세계의 주요 종교 전통을 명상이라는 테마에 결부시켜 이해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주요 종교들의 실천 양식을 특징별로 구분하여 엮게 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명상의 갈래가 드러난다. ① 내향적 명상, ② 외향적 명상, ③ 초월적 명상이 그것이다정태혁, 『명상의 세계』, 1994, 165쪽 이하. ‘내향적 명상’이란 일상에 대한 반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앞서의 “고요히 생각한다to think seriously”는 사전적 정의와 일치하는 명상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현존하는 종교적 가르침에 연관시키면, 현실의 삶 속에서 도덕적․윤리적 반성을 강조하는 경우를 꼽을 수 있다. 예컨대 유교에서는 특정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중요시한다. 즉 일상에 대한 반성을 통해 자신을 다스리고克己 바로 이것을 기반으로 인간의 보편성天命을 추구한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는 초기불교의 윤리적 가르침이라든가『증일아함경』, 제1권; Dhp. 183 게송 등, 사회적인 의무와 명예를 강조하는 힌두교의 『바가바드기타』에 나타나는 행위 윤리도 이러한 내향적 명상에 연결시켜 볼 수 있다BG. 2-33 게송 등. 한편 ‘외향적 명상’의 전형적 사례로는 기독교․이슬람교․유태교 등의 유일신교와 대승불교의 정토교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 전통에서는 절대적 존재에게로 귀의해 들어가는 방법론적 특징이 부각된다. 이러한 외향적 명상에서는 기도나 염불 혹은 춤 따위의 의례적 행위가 수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아미타불Amitābha-Buddha에 대한 염불을 위주로 하는 정토교에서는 현실의 고통마저 아미타불에게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일체의 모든 것이 아미타불의 화현化現, avatāra으로 체험되는 경지를 지향한다M. Kiyojawa, 이현주 옮김, 『겨울부채』, 2003. 이러한 외향적 명상은 타자에게 몰입하는 속에서 스스로의 의미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면모를 지닌다. 여기에서는 절대적 존재와의 관계 즉 믿음信, faith, bhakti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으로 부각된다. 마지막으로 ‘초월적 명상’은 일상적인 사고의 지평을 번뇌에 오염된 상태로 규정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요가학파와 초기불교의 경우를 전형으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요가란 마음작용의 가라앉힘이다.”는 『요가수뜨라』의 유명한 경구를 통해 집약될 수 있다YS. 1-2 게송. 요가학파에서 제시하는 여러 유형의 호흡법prāṇāyāma 및 집중법dhāraṇā 따위는 바로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이다. 한편 위빠사나vipassanā로 대변되는 초기불교의 실천․수행 또한 갖가지 망상과 아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것을 위해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의 사실만을 관찰하라고 가르치며, 알아차림知, sampajañña과 마음지킴念, sati이라는 고유의 심리적 기능들을 강조한다. 이상과 같이 세계의 주요 종교를 명상이라는 명칭으로 구분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르며 다른 분류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비베까난다Vivekānanda, 1863-1902와 같은 현대의 힌두교 사상가들은 『바가바드기타』와 『요가수뜨라』에 근거하여 세계의 정신적․종교적 가르침을 네 가지 요가Yoga로 갈래 지운다. 그들에 따르면 요가란 이상에서 논의한 명상 개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 지혜의 요가Jñāna-yoga, ㉡ 헌신의 요가Bhakti-yoga, ㉢ 행위의 요가Karma-yoga, ㉣ 라자요가Rāja-yoga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이태영, 『요가철학』, 2004, 40쪽 이하. 이러한 네 가지 요가는 앞에서 언급했던 세 가지 명상과 유사한 맥락이며 또한 직접적으로 대비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지혜의 요가’는 무지無知, avidyā의 타파를 통한 구원의 방법으로서 앞서 언급한 ‘초월적 명상’과 친화적이다. 즉 깨달음을 강조하는 초기불교와 요가학파에서는 일상의 거친 생각과 의식을 가라앉히는 데 주력하며,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참된 지혜를 얻는 것을 실천․수행의 중심 과제로 상정한다. 한편 ‘헌신의 요가’는 신에 대한 믿음과 헌신 그리고 은총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 본 ‘외향적 명상’과 거기에 속한 종교 전통들에 부합한다. 또 한편으로 ‘행위의 요가’는 일상에 대한 성찰과 사회적 의무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내용은 ‘내향적 명상’에 상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유교적 가르침 등에 연결시킬 수 있다. 마지막의 ‘라자요가’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전체를 아우르는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요가수뜨라』에 등장하는 고유의 실천론을 별도의 체계로 내세워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요가수뜨라』에서는 금계禁戒, yama권계勸戒, niyama좌법坐法, āsana조식調息, prāṇāyāma제감制感, pratyāhāra응념凝念, dhāraṇā선정禪定, dhyāna삼매三昧, samādhi 등의 8가지 단계적 실천 항목을 내세운다. 이들 중에서 최초의 금계와 권계는 다시 청정śauca, 만족saṁtoṣa, 자재신에 대한 기원Īśvara-praṇidhāna 등을 세부 내용으로 한다YS. 2-30 게송부터 45 게송까지. 이러한 세부 내용들은 ‘내향적 명상’ 및 ‘외향적 명상’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좌법에서부터 삼매에 이르는 일련의 단계들은 ‘초월적 명상’에 이르는 체계적 과정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결론적으로 ‘라자요가’는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명상 유형 모두를 단일한 체계 안에 포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 또한 다분히 도식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 더욱이 모든 종교를 일반화하여 명상이라는 명칭만으로 포섭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향적 명상’이라든가 ‘외향적 명상’ 등은 그들이 속한 종교 전통 안에서 주된 실천 방법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교라든가 기독교 등에서 앞서 언급한 명상 관련 내용들은 중심적인 실천적 지위를 차지한다고 보기 힘들다. 그들에 의해 행해지는 명상은 윤리적 행위라든가 신에 대한 믿음 등에 편중되어 있는데, 이들은 사실상 명상 수행의 본령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즉 명상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종교적 실천을 특징짓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초월적 명상’이라든가 ‘지혜의 요가’ 그리고 ‘라자요가’ 등은 사정이 다르다. 특히 이들 개념을 실천적 가르침의 중심에 두는 초기불교와 요가학파는 전형적인 명상 종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들은 거친 의식의 지평으로부터 그것이 가라앉은 고요한 마음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인 단계들을 설정한다. 예컨대 초기불교의 ‘아홉 가지 선정 단계九次第定, nava-anupubbavihārasamāpatti’라든가AN. IV. 410쪽; SN. II. 222쪽 등, 요가학파의 여러 선정 혹은 삼매의 단계들이 그러하다YS. 1-17, 18, 44 게송 등. 초기불교와 요가학파에서는 이와 같이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과정을 통해 진리를 꿰뚫는 지혜prajñā라든가 참된 자아를 식별하는 지혜viveka-khyātir가 발생한다고 가르친다. 이들이 지향하는 궁극 목표로서 열반涅槃, nibbāna이라든가 독존獨存, kaivalya의 경지는 그러한 순차적 단계들을 체험하는 속에서 획득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초기불교와 요가학파야말로 명상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가르침들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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