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붓다의 가르침은 아직 유효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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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와 불교 붓다의 가르침은 아직 유효한가. 다소 도발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이다. 이미 그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생각을 자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불교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붓다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용한가. 일전에 한 강연장에서 ‘현대 사회와 불교’라는 주제로 발표한 적이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더욱 필요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더 한층 의미를 지닌다는 취지로 발표를 마쳤다. 그런데 강연이 끝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다 좋으신 말씀인데, 불교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부 불교계 지도층 인사들의 행실을 보면 시대를 선도하기는커녕 뒤쳐지지나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식이라면 불교의 유효기간은 끝난 것은 아닐까요.” 다소 감정적인 어투였지만 뜨끔한 지적이 아닐 수 없었다. 오죽하면 저런 말이 나올까. 당장 나부터 생각해보자. 과연 내가 세상을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이타적(利他的) 삶을 외치지만 실제로 얼마만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연기(緣起)의 가르침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닌가. 독불장군으로 영원히 남아있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불교라면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닌가.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상념들이 교차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훌륭하신 지적입니다. 불교계의 앞날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인으로서 이 순간 많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불교계의 현실에 분노합니다.... ” 그러나 강연자로 나선 마당에 자학적 반성만을 뒤풀이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불교는 ‘나’ 자신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일단 당사자들의 몫으로 남겨 둡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밖으로 드러난 타인의 행실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대하는 ‘나’ 자신의 마음가짐과 태도라고 봅니다. 이 순간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끼는 ‘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러한 감정들을 왜곡 없이 지각하고 다스려 나가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바로 이것이 전제될 때 이러한 감정들에 동요되지 않고 올바른 해결책을 구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자신의 마음부터 다스려 나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붓다 가르침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 닦음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한에서 불교는 유용하리라고 봅니다.” 사회적 가르침 앞서의 질문은 사회적 맥락에서 드러나는 불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답변이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공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원의 문제를 처리해 나가는 데서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정서를 배제하는 것이 마땅하며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내면적인 안정과 평안을 유도하는 것만으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마음 닦음이란 개인적인 실천의 영역에 한정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사회적 비판의식을 무디게 하는 방향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될 문제이다. 초창기 붓다의 설법에서 가장 많은 비율로 나타나는 내용 중에 하나가 바라문교의 카스트(caste) 제도에 대한 비판이다. 일찍이 인도 사회에는 태생에 의해 인간의 신분과 지위가 결정된다는 그릇된 믿음이 있었다. 성직자 계급으로서 바라문(Brāhmaṇa)은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신분인 까닭에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졌다. 반면에 거기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 하위 계급의 인간들은 자신의 천한 신분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수드라(Śūdra)와 같은 노예 계급이나 최하층 계급(Dalit)에 속하는 이들은 아예 인간으로 취급받지도 못하였다. 그들은 불공평한 자신의 처지를 수긍하고 감내하도록 요구받았으며, 바라문교의 가르침은 그들의 불만과 갈등을 잠재우는 데에 악용되곤 하였다. 이러한 사회 현실에 대해 붓다는 “태생(jāccā)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며 태생에 의해 비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에 의해 바라문도 되고 행위에 의해 비바라문도 된다.”고 가르쳤다.Sn. 게송 650 이것은 고귀한 행동을 하는 사람만이 존경받는 지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그의 가르침이 부당한 사회 현실에 맞서는 것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또한 붓다는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비중 있는 가르침을 남겼다. 그는 대중적 합의와 도덕적 순수성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는 보편군주(轉輪王, cakkavatti)의 개념을 강조하였다. 즉 왕이라고 하더라도 권력을 남용하거나 함부로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모든 인간이 존중받는 사회를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생각하였다.DN. III. 58쪽 이하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붓다는 내면적인 수행을 빌미로 사회적 문제를 회피하거나 희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가르침은 아쇼카(Aśoka) 황제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었으며, 이후 인도인의 군주관에서 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였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을 내면의 정서적․감정적 차원에 한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붓다의 실천․수행이 내면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일단의 초점을 맞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으며 정화된 마음을 바탕으로 사회적 변혁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러한 점에서 비폭력(ahiṁsa)과 청정한 행위(brahmacarya)를 강조했던 근대 인도의 정치가 마하뜨마 간디(Mahātma Gandhi)의 행적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는 내면을 정화하는 개인적 수행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바로 그 점에서 그는 붓다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재가자에 대한 가르침 붓다는 재가자들의 경제 생활과 관련해서도 자세한 가르침을 남겼다. 예컨대 ‘현재의 삶(現世, diṭṭhadhamma)’에서 안락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① 직업을 가져야 하며 근면하고 원기 왕성하게 일해야 한다. ② 땀흘려 벌어들인 소득을 정당하게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 ③ 바른 길로 인도해 줄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④ 소득에 맞게 합리적으로 소비해야 한다. 한편 ‘미래의 삶(來世, samparāya)’에서 안락함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으로는 다음의 네 가지를 거론했다. ① 도덕적․정신적 가치를 믿고 신뢰한다. ② 살생하고 훔치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등의 파괴적이고 해로운 생활을 멀리한다. ③ 재화에 대한 애착과 같은 망상을 내지 말고 관용으로 베푼다. ④ 번뇌를 없애고 열반의 경지로 이끌어주는 지혜를 닦는다.AN. IV. 281-285쪽 이러한 가르침은 현대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수긍할 만하다. 재가자로서의 삶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건전한 경제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 ‘현재의 삶’에서 안락함과 행복을 얻기 위한 앞서의 네 가지 항목들은 바로 거기에 초점을 모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정신적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되며 참된 삶의 의미를 구현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래의 삶’과 관련된 네 가지 항목들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과 이상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역사를 통해 수많은 나라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바르게 수용되던 시기에는 국가적으로 흥성했던 시간들이 뒤따랐다. 이것은 인도의 경우만이 아니라 중국․한국․일본 등 동북아의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는 이러한 가르침들이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붓다는 재가자들의 일상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남겼다. 즉 부모․스승․아내․친구․고용인․출가자 등에 대해 존경과 신뢰에 기초한 인격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일렀다.DN. III. 180-193쪽 이러한 사실은 명상가로서의 붓다가 결코 명상 자체에만 매몰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붓다는 청정한 삶의 이상을 위해 현실의 삶을 방기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물질적 빈곤을 미덕으로 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가난과 궁핍의 괴로움을 죽음의 괴로움과 동일시하기까지도 하였다. “어떠한 법을 괴로움이라 하느냐. 이른바 빈궁이다. 어떤 괴로움이 가장 중하냐. 이른바 빈궁의 괴로움이다. 죽는 괴로움과 가난한 괴로움 두 가지가 다름이 없으니, 차라리 죽는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빈궁하게 살지 않으리.”『悲華經』권4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절대적 존재의 힘을 빌어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미신적 관행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해서는 냉철한 판단과 의지로서 대응해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허황한 바람이나 욕심을 개입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해야 하며, 또한 그러한 자세로 적극적인 문제 해결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음의 평정과 유연성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며 타인에 대한 아량과 배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면을 다스리는 방법으로서의 명상이 지닌 실제적 유용성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은 현실 문제를 도피하거나 은폐하는 수단이 아니며 오히려 건강하고 적극적인 삶을 위한 것이다. 마음 닦음의 필요성 붓다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그 가르침을 펼쳤다. 문헌상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순서는 계율에 관한 가르침(戒論, dānakatha) → 보시에 관한 가르침(施論, sīlakatha) → 천상세계에 관한 가르침(生天論, saggakatha) → 사성제에 관한 가르침(四聖諦)이다.DN. I. 110쪽 등 ‘계율에 관한 가르침’이란 살생하고 훔치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등의 해로운 생활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보시에 관한 가르침’이란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미래의 삶’에서 안락함과 행복을 얻기 위해 권장된 내용들이다. 더불어 ‘천상세계에 관한 가르침’이란 그러한 행위를 통해 사후에 좋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여기까지는 다른 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윤리적 가르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이러한 가르침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건을 조성케 하였다. 그리하여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사성제의 가르침을 설했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들은 사성제를 얻기 위한 예비적 과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사성제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괴로움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체계적 과정으로서 여타의 윤리적 가르침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을 지닌다. 예컨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에서 얼마간의 안락함과 행복을 얻는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맞이하는 새로운 유혹과 번뇌에 노출되곤 하며, 그러한 와중에 언제든지 타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사성제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근본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사성제는 괴로움(苦聖諦)․괴로움의 발생(集聖諦)․괴로움의 소멸(滅聖諦)․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道聖諦)이라는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괴로움’이란 우리 존재가 피하고 싶은 상황들에 끊임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고 종국에는 거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언명이다. 태어남․늙음․병듦․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원해서 태어나거나 죽어 가는 것은 아니며, 자신을 거스르는 운명 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괴로움과 비애를 경험하게 된다. 붓다는 이러한 괴로움이 강화되는 원인을 쾌락에 대한 갈망(慾愛, kāma-taṅhā)․있음에 대한 갈망(有愛, bhava-taṅhā)․있지 않음에 대한 갈망(非有愛, vibhava-taṅhā)에서 찾는다. 바로 이들은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진리로 집약된다. ‘쾌락에 대한 갈망’은 동물적 욕구에 지배된 상태로서 육체적․물질적 현상들이 일시적이고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망각케 한다. ‘있음에 대한 갈망’은 스스로를 영원한 존재로 믿고 집착하는 것으로 과대망상적 심리상태와 연결되며 집요한 자기 과시의 감정들을 부추긴다. ‘있지 않음에 대한 갈망’은 바로 그것이 붕괴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괴감과 열등의식으로서 자포자기적 심리상태와 통해 있다. 이들 갈망에 휘말린 개인 존재는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못한 채 끝없는 괴리감에 시달린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인정하지 못한 채 반복적인 불만과 불안과 회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곤 한다. 이것은 사회적 지위라든가 환경적 요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더 많이 목격되는 현상이다. 결국 내면의 만족과 평정이 전제되지 않은 삶은 병적인 방향으로 나가기 십상이다. ‘괴로움의 소멸’은 바로 이러한 갈망의 소멸에 다름이 아니다. 사성제를 집약하는 『전법륜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괴로움의 소멸’이란 갈망에 관련한 남김 없는 탐욕의 소멸․포기․버림․해탈․집착 없음이다.”SN. V. 421쪽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에도 누리지 못했던 풍요로운 물질적 혜택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에 대해 더 행복하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며, 예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갖가지 스트레스와 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다. 거기에는 적절한 수준에서 만족할 줄 아는 내면의 여유를 잊어버린 원인이 자리한다. 현대적 삶에서 마음 닦음의 필요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내면의 욕망과 분노를 해소시킴으로써 삶의 이상을 실현케 하는 방법론적 특징을 지닌다. 궁극의 목적으로 제시되는 열반 또한 “갈망을 버리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SN. I. 39쪽 등 사성제의 마지막 항목으로서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은 바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여덟의 과정으로 구성된다. 바른 견해(正見)․바른 의도(正思惟)․바른 언어(正語)․바른 행위(正業)․바른 삶(正命)․바른 노력(正精進)․바른 마음지킴(正念)․바른 삼매(正定)가 그것이다. ‘바른 견해’는 사성제 자체에 대한 최초의 이해를 의미한다. 이것은 길을 나서는 여행자가 그 목적지를 분명히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바른 의도’에서부터 ‘바른 노력’까지는 본격적인 실천․수행을 위한 준비 단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계율의 준수와 더불어 내면의 태도를 다잡기 위한 세칙들로 구성된다.DN. II. 312쪽 이하 참조 마지막의 ‘바른 마음지킴’과 ‘바른 삼매’는 이상의 내용들을 성취하기 위한 실제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들 두 항목이야말로 위빠사나(觀, vipassanā)와 사마타(止, samatha)라는 명상 수행의 본래 영역에 속한다. 초기불교의 실천론을 대변하는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는 이들 양자를 포괄하는 것으로, 전문적인 출가 수행자뿐만 아니라 일반 재가자들에게도 개방되어 널리 행해지곤 하였다.MN. I. 340쪽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이 현실을 살아가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해 베풀어진 것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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