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86칙 雲門廚庫三門 - 운문화상의 광명(光明)

수선님 2018. 10. 14. 12:17

관련 이미지 <벽암록> 제86칙은 운문화상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법문을 하였다. “사람마다 모두가 광명을 가지고 있다. 이를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둡고 깜깜하다. 어떤 것이 여러 사람들의 광명인가?” 스스로 대중들을 대신하여 말했다. “부엌의 삼문(三門)이다.” 또 거듭 말했다.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

 

擧. 雲門垂語云, 人人盡有光明在. 看時不見暗昏昏. 作生是諸人光明.
自代云, 廚庫三門. 又云, 好事不如無.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중권 수시대어를 인용한 것이다. 광명(光明)은 <화엄경> 제11권에 ‘세존이 도량에 앉아 청정한 대광명을 놓으니 마치 천개의 태양이 나타나 허공세계를 두루 비추는 것과 같다.’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방광반야경>, <관무량수경> 등 경전에서는 부처나 보살의 지혜작용을 광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미혹의 어둠을 타파하는 진리의 빛으로 나타낸 것인데, 아미타불을 무량(無量)의 수명(壽命)과 광명(光明)으로 표현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광명이 있다. 이 광명을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둡고 깜깜하다.”라고 고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조당집> 제4권, 단하천연선사의 <고적음(孤寂吟)>에 “광명 있는 줄 모두가 다 알지만, 그 광명을 보려하면 어둡고 깜깜하여 볼 수 없다.”는 말에 의거한 것이다.

 

<전등록> 제10권 장사장에 “모든 시방세계는 바로 사문의 눈이며, 모든 시방세계는 바로 사문의 온 몸이며, 온 시방 세계는 바로 자기 광명이며, 온 시방세계는 한 사람도 자기 아닌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혜의 <정법안장> 하권에 복주대안이 광명에 대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대들 모든 사람은 각자 가치를 정할 수 없는 큰 보물을 지니고 있다. 눈(眼門)에서 빛(光)을 놓아 산하대지를 비추고, 귀에서 빛을 놓아 일체 선악의 음향을 받아들이고, 이와 같이 육문(六門)은 주야로 항상 광명을 놓는데, 이것을 방광삼매(放光三昧)라고 한다. 그대들은 각자 스스로 인식(識取)하지 않아도 사대신중(四大身中)에 잠재하고 있다. 자 말해보라! 이것은 무슨 물건인가(是甚物)? 그대가 만약 광명을 털끝만큼이라도 찾아보려고 한다면 보이지 않게 된다.”

 

운문화상이 각자가 지니고 있는 광명을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깜깜하고 어두운 곳에 빠져 짐작도 할 수 없게 된다(暗昏昏)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오도 “보려고 할 때 눈이 멀게 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불심의 광명은 무심의 경지에서 항상 잠시도 쉬지 않고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지혜광명을 발하고 있지만, 만약 그 광명을 대상으로 설정하여 의식적으로 보려고 하면 볼 수 없게 된다는 법문이다. 중생심의 분별의식이 망심이 되어 불심의 지혜광명이 어둡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능엄경> 제9권에 “만약 성스러운 견해를 지으면 많은 삿된 망념에 떨어지리라.”고 주장한 말과 같고, <현사어록>에 “감정에 성스러운 생각이 있으면 여전히 번뇌 망념(法塵)에 떨어진다.”라는 주장과 같다.

 

원오가 수시에 “입을 열고 말을 하면 곧바로 틀리고, 사량분별 했다간 불심과는 어긋난다.”라고 읊은 말도 운문의 법문을 대변한 것이다. 선어록에 “무엇을 하려고 의식하면 곧바로 불심의 지혜작용과는 어긋난다(擬心卽差)”는 선병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운문화상은 “여러분들 모든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광명이란 어떤 것인가?” 그 광명을 분명히 체득하도록 법문을 하고 있다. 자기 광명이란 각자의 본래면목이며, 지금 여기 자신의 본분사를 불심의 지혜로 전개한다면 자기의 광명이 시방세계에 두루하게 된다. 그것은 임제의 법문처럼, 곳에 따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불심으로 작용할 때에 자기의 광명이 천지를 비추게 되는 것이다. 원오는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착어했는데, 산은 산으로서 본래면목을, 물은 물로서 본분사를 무심하게 작용할 때 산으로서 면목이 들어나고, 물로서 면목을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광명도 자기 본분사를 불심의 지혜로, 무심의 경지에서 살수 있을 때 자기법신의 지혜광명이 시방세계를 가득 비추게 된다.

 

원오는 ‘평창’에 운문화상은 대중들을 위해서 20년 이와 같은 법문을 하여 점검하였지만, 운문의 요구에 계합하는 대답을 한 사람이 없었다. 향림(遠侍子)스님은 훗날 이 법문에 대하여 대중들을 대신하여 말씀해 주시길 간청하자, 운문화상은 “부엌(廚庫)의 삼문(三門)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주고(廚庫)는 부엌을 말하는데, 운문의 어록에서만 보이는 말이며, 삼문(三門)은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삼해탈문(三解脫門)으로 사찰에 들어가는 산문이다. 운문은 부엌과 삼문을 선원의 七堂伽藍(법당, 불전, 창고(庫裡), 승당,욕실,변소(東司),山門)을 대변한 말로, 여러 수행자들이 매일 선원의 칠당가람과 함께 법신의 지혜작용으로 생활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자기 광명 아닌 것이 없다. 즉 선원의 삼문이나 부엌 어디에서라도 불심으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전개하는 그대로가 자기 광명이 현전한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 원오는 “노파심의 친절”이라고 착어했는데, 운문화상의 대어(代語)가 좀 지나친 친절이라고 비난했다. 친절은 좋지만, 과잉 친절은 수행자들이 철저한 수행으로 체험해야 하는 자각적인 교육을 망치게 하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에 운문화상은 선기(禪機)를 전환시켜, 또다시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好事不如無)”라고 말했다.

 

이말은 당시의 속담인데, <운문어록>에는 이 말을 3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설봉어록>에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고 부처님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째서 부처를 인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설봉은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조주록>에도 “조주화상은 불전을 지나는데 한 스님이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주장자로 때렸다. 스님은 ‘예배하는 것은 좋은 일(好事)인데 왜 때립니까?’하자, 조주는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라고 대꾸했다. 이 두 문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부처나 광명은 성스러운 성체라는 차별적인 생각, 예배를 올리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집착이며, 호사(好事), 악사(惡事)라는 좋고 나쁜 상대적인 차별에 떨어진 분별심의 행위는 중생심의 업장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일만 못한 것이다. 그러한 일은 오히려 없었던 것이 좋다고 하는 말로, 중생심으로 지은 업장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청정하게 하여 자취와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법문이다. 좋고 나쁜 분별심을 일시에 초월하고 본래 무사한 무심의 경지에서 사는 것이 자기 법신광명을 나투는 것이라고 설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본래 구족한 지혜의 비춤이 홀로 빛난다.” 사람들은 각자 불심의 지혜광명을 구족하여 운문이 말하는 부엌과 삼문은 물론 절대적인 경지에서 스스로 삼라만상과 천지 만물을 모두 다 비춘다. “그대 위해 한 가닥 방편의 길을 열어 놓았다.” 운문화상은 이러한 사실을 체득하지 못하는 맹인들을 위해서 부엌과 삼문이라는 하나의 길을 열어서 광명을 보도록 하였다. “꽃잎은 시들고 나무는 그늘도 없다.”

 

예쁜 꽃잎도 떨어져 버리고 푸른 나뭇잎도 흩어져 옛 영화의 자취가 완전히 없어지고 한가히 본분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광명이 없어지고 어둠이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광명이나 어둠의 상대적인 차별과 미혹함과 깨달음의 그림자도 없어져 일체를 초월하고 텅 비워버린 본분대도(本分大道)의 입장이다.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고 한 것처럼, 본분의 무심한 경지에서 자기 광명이 홀로 빛나게 된다. 명암의 차별심을 비우고, 무심의 경지에서 누구나 광명을 볼 수 있는데, 어찌 ‘보면서 그 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가.’ ‘봄(見)’과 ‘보지 않음(不見)’의 차별심에 떨어지면 봐도 보이지 않는다. 본래면목의 광명은 명암과 見과 不見의 차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홀로 빛나는 것이다. 마치 ‘거꾸로 소를 타고 불전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일체 차별경계(중생심)를 초월한 절대의 세계(불심)에서 무애자재한 삶이 자기 광명이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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