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차쌍조(雙遮雙照)>
쌍(雙)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의 양변을 말하는 것이다. 유와 무, 이것과 저것, 선과 악, 나와 너 등 일체의 차별상인 2분법을 말한다. 쌍차(雙遮)라는 것은 이 양변이 서로를 막아서 서로를 숨기는 것, 즉 서로의 소멸을 말한다. 쌍조(雙照)라는 것은 그 반대로 이 양변이 서로 비추어서 이것은 저것을, 저것은 이것을, 서로를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쌍차(雙遮)는 양변을 막는다는 것으로, 양변을 떠나는 것을 말하며, 극단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쌍조(雙照)는 양변을 비춘다는 것으로,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양변이란 모두 변견(邊見)인데 변견을 버리면 곧 중도(中道)이다.
쌍차(雙遮)란 양변을 완전히 떠나니 구름이 걷혔다는 말이고,
쌍조(雙照)란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말이니 결국 해가 드러나 비친다는 말이다.
구름이 걷히니 해가 저절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쌍차가 쌍조이며, 쌍조가 쌍차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그럼 뭘까? 남. 여를 초월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쌍차(雙遮)이다. 쌍조(雙照)라는 말은 초월한 자리에서는 두 개를 다시 긍정하는 자리에 들어간다.
초월은 왜 초월하느냐 하면, 긍정하기 위해서 초월한다. 남ㆍ여를 초월한 자리에 서게 되면 남자는 남자대로의 특성을 인정하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특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의 똥고집도 인정하게 되고, 여자들의 시기질투도 이해가 된다. 초월의 자리, 궁극의 자리에 서고 보면, 다 이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남남끼리 만나 일심동체의 금실 좋은 부부관계가 이루어지면, 바로 거기가 중도의 자리이다. 이 세상에 약점 없는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서로가 극진히 사랑한다면 그런 약점을 다 덮고, 마치 이쪽 개울물과 저쪽 개울물이 합쳐져서 한 물이 되듯, 부부가 사랑으로 용서하고 융합해 잔잔한 물길처럼 산다면, 그 게 바로 최상의 쌍차쌍조요, 중도의 참모습이다.
그러니 쌍차쌍조란 ‘양변의 극단을 여의고 융합한다’ 그런 말과 일맥상통하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시끄러움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불협화음에서 생긴다. 하모니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처럼, 너그러운 타협과 상생이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지극한 중도는 지혜와 자비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쌍차쌍조(雙遮雙照)를 통해 갈등과 모순, 대립과 투쟁으로 점철된 현실을 통섭(通攝) 내지 원융(圓融)시키고자 했던 것이며, 그것은 극단적인 흑백논리를 초월해 모든 것을 포용하고 화해시키고자 했던 일종의 중도 구원론이었다. 이와 같이 쌍차쌍조(雙遮雙照) 즉, 양 극단을 여의고, 서로 비춰보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이 바로 중도(中道)인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쌍차쌍조(雙遮雙照)’는 흔히 쓰는 말이 아니다.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에 나오는 독특한 불교용어로서 중국 천태종 개조 지의(智顗, 538~597) 대사는 이것을 인용해서 중도(中道)를 설명했고, 성철(性澈) 스님도 쌍차쌍조가 중도의 핵심사상이라 했다. 여기서 ‘쌍(雙)’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을 얘기하며, 상대의 양변을 말한다. 즉, 나와 너, 유와 무, 이것과 저것, 양과 음, 강과 약, 흑과 백, 남녀 등 일체의 차별상인 2분법을 말한다.
쌍차쌍조는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 좋고 나쁨, 내편 네편, 승패와 같이 좌우를 구별하는데 급급한 오늘에 사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있고 없음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므로, 세상만사의 이치를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서 추함이란 관념이 나오고, 선(善)을 좋다고 생각하는 데서 악(惡)의 관념이 생긴다. 이와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양쪽을 극단적으로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깨끗하다 더럽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와 같은 흑백논리처럼 양 극단에 치우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쌍차쌍조는 양 극단을 여의고, 각자 자기 고집만 내세우지 말고, 상대방을 이해해서 서로 감싸주고, 북돋우어주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양변이 합쳐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의견을 살리면서 하나로 융합하는 것, 이것을 융이불일(融二不一)이라 한다. 원융무애란 서로 모순되고 배척하는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거리낌 없이 통해버리는 것을 말하며, 일체가 거리낌 없이 원만하게 껴안아 받아들이는 경지를 의미한다. 바로 중도(中道)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컫는다.
당나라 때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스님은 <임제록(臨濟錄)>에서 “도(道)란 어디에서나 청정과 광명에 걸림이 없음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일체차별망견을 다 버리는 것을 말하니 쌍차로서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혔다는 것이다.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란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혀 무한한 광명을 얻게 되니 쌍조이다. 그래서 결국은 차조동시(遮照同時)이다. 중도에는 양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도 없다. 언어로써 표현하자니 쌍차쌍조이지, 실상을 알고 나면 쌍차가 곧 쌍조이고 쌍조가 곧 쌍차로서 언제든지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그 둘을 분리할 수 없다.
바람이 불면 체(體, 근본)가 드러나듯이, 꽃이 피면 체가 드러나듯이, 인연이 닿으면 체가 드러나듯이, 용(用)은 체(體)에 의지하고 체는 용을 의지한다. 그것을 적이상조 조이상적(寂以常照照以常寂)이라 하고,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이라 하며,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왕(BC970~930) 때의 일이다. 두 여인이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었다. 이에 재판이 열리고, 솔로몬왕은 아이를 둘로 쪼개라고 했다. 결국 한 여인이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라며 포기했다.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진짜 아이 엄마였다. 네 아이 내 아이, 좌우로 갈라진 한쪽에 섰던 여인이 그 한계를 극복하고 “내 아이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순간, 그 여인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어느 편도 아닌 오로지 아이의 편인 그 여인이 진짜 엄마였기에 아이를 살린 것이다. 진제(眞諦)와 중도(中道)의 원리로 아이를 살린 것이다.
중도(中道)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중도를 벗어나면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중도를 벗어나는 것이고, 그러면 실상(實相)을 볼 수 없다. 이때 어느 한쪽과 다른 한쪽을 양변이라고 한다. 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을 쌍차라 하고, 동시에 둘 다를 모두 인정해 수용하는 것을 쌍조라 한다. 이 말은 불성(佛性)은 있음과 없음에 얽매이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있음과 없음을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니다.
쌍차쌍조를 좀 더 쉽게 얘기해보자. 부처님이 아닌 범부중생 치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친한 친구 사이엔 서로 약점을 이해하거나 덮어준다[쌍차]. 오히려 친구 사이엔 그 약점이 더 매력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친구 사이라면 단점은 보완해주고 장점을 북돋우어 주어야 할 것이다[쌍조]. 그리고 더 나아가 정말 친구 사이라면 단점 장점을 따지지 않고 그냥 좋은 사이가 아니겠는가. 이게 곧 중도이고, 쌍차쌍조이자 원융무애한 친구 관계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절친한 우정, 원만한 가정은 그대로가 중도인 것이다. 산골 오두막에 단 둘이 사는 노부부가 서로 양보하고, 서로 아픈 곳을 감싸주며 정답게 사는 모습, 마치 이쪽 개울물과 저쪽 개울물이 합쳐져서 한 물이 되듯, 그리하여 잔잔한 물길처럼 사는 것, 그 게 바로 최상의 쌍차쌍조요, 중도의 참모습이다.
부부 간에나 친구 간에 당신은 내덕을 봤으니 ‘이제 갚을 때가 되지 않았어!’ 하고 덕 베푼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갚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마음이 고단한 법이다. 하지만 상대를 내 몸이라 생각하고 베푼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다가 보면 저절로 충만해지는 그 무엇이 거기 있으니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말 일이다.
다음은 ‘해탈의 참된 기쁨’이라는 찬불가 가사가 있다.
「한 생각 바로 돌려 얽힌 번뇌 끊고 보니
천상천하 넓은 우주 걸릴 것이 하나 없고,
평등한 성품 속엔 너와 내가 따로 없네.
대자재 유아독존 바로 이것인 것을,
해탈의 참된 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윤회의 고해에서 피안 언덕 이르니
어두웠던 나의 마음 한순간에 밝아지고
본래의 천진면목 진실하게 드러나네.
위없는 님의 진리 영원한 빛 가운데에
열반의 대합창이 온 누리에 가득하네.」 - 해월 스님
화엄종에서는 쌍차쌍조의 논리가 화엄종취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수(賢首法藏, 643~712) 스님이나 청량(淸凉 澄觀, 738~839) 국사에 이르러서는 화엄종이 쌍차쌍조를 중심내용으로 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놓았으니 쌍차쌍조란 그만큼 중요한 불교철학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 원리가 연기이고 중도이다. 이것이 만법의 참모습이고, 원융무애이다.
부처님께서는 집(集)이 곧 멸(滅)이라고 하자 즉시 인가하셨다. 집은 곧 연기의 순관이고 멸은 곧 연기의 역관이다. 집이 곧 멸이므로 순관이 곧 역관인데 이것이 중도이며 연기이다. 집은 쌍조이며 멸은 쌍차이다. 쌍조에 의지한 쌍차, 쌍차에 의지한 쌍조, 순관에 의지한 역관, 역관에 의지한 순관 이것이 중도연기이며, 법계연기이고, 만법의 참모습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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