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스크랩] 제2구 諸法不動本來寂

수선님 2018. 10. 2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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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고 본래 고요하다

 

생멸(生滅), 동정(動靜)을 전체적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제한된 시공을 좇는 업상을 떠난 것이 고요한 삶입니다.

법성(法性)으로 원융(圓融)하게 사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본래(本來) 고요함입니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들의 본래 모습입니다.

 

무아(無我), 무상(無相)의 연기법(緣起法)

 

앞서 이야기했듯이 마음과 대상(對象)은 나눌 수 없는 하나로, 대상은 마음에 의해 있게 되며 마음은 대상에 의해 인식작용을 합니다. 이때는 마음이 대상 전체를 껴안고 있으며 대상도 마음을 껴안고 있습니다. 단지 그 접점(接點)에서 마음은 마음으로, 대상은 대상으로 나투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상즉과 상입에서 보면 대상 그대로가 마음이고 마음 그대로가 대상입니다. 곧 형상을 떠나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향상 그대로가 마음입니다. 형상도 마음을 떠나 있지 않고 마음 그대로가 형상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마음이고 대상은 대상입니다. 마음이 전체를 나타내는 말이 되고 대상이 전체를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마음이라고해서 대상에 상대(相對)되는 마음이 아니고 대상이라고 해서 마음에 상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용면에서 마음은 자기를 나툴 때 반드시 대상 인식을 통합니다. 이럴 때 마음은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또 대상은 마음에다 자기 형상을 비춰서 무엇인가를 알게 합니다. 이때에는 대상니 마음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가 상입(相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전체를 나타내고 대상이 전체를 나타내는 면에서 보면 마음 그대로가 대상이며 대상 그대로가 마음인 것, 곧 마음이 대상 속에서 대상이 되고 대상이 마음 속에서 마음으로 되는 것을 상즉(相卽)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데상의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의 상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낱낱의 사물은 그 속에 모든 기운을 받아 제 모습을 나투면서 스스로도 온 힘을 다해 제 기운을 이웃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상즉상입으로 한 법계(法界)를 살아가는 것을 연기법(緣起法)이러도 하고 대다라니(大陀羅尼)라고도 합니다. 상즉상입 되어 있는 연기법계에서 모든법은 자기의 모습이면서 상대의 모습으로 함께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연기의 대다리니법을 나타내는 말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곧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시공을 초월해 있는 우리 삶을 나타내며 그 곳에서의 온갖 시비분별을 떠난 적정한 삶을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연의 만남에 의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잠시라도 결정된 자기 모습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니 이를 무아, 무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상의 궁극(窮極), 곧 변화의 끝은 시공의 길이를 갖지 않는 것,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이 없는 것, 변화 그 자체가 시공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 진여공성(眞如空性)이며 열반적정(涅槃寂靜)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무상한 움직임이 오히려 일상의 움직임을 벗어나 있고 움직임 밖에 있는 것이 오히려 일상의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곧 잠시라도 고정된 시공으로 자취를 남기지 않는 무아, 무상의 연기법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며 움직임이며, 이 변화가 바로 열반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무상(無常)과 불변(不變), 부동(不動)과 동(動)은 손바닥의 앞뒤와 같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같은 모습이 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무상과 적정(寂靜), 무아와 해탈(解脫)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삶의 진정한 모습인 연기실상(緣起實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모든 법이란 상즉과 상입, 무아(無我)와 적멸(寂滅), 무상과 부동의 통일된 장에서의 모든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무상과 무아는 일상에서 나타나는 주관과 객관, 움직임과 고요함을 부정함이 아니라 삶의 본래 모습을 말합니다. 무아, 무상의 본디 모습에서 보면 모든 법이 움직임이 없는 본래 고요함입니다.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이는 움직임과 상대하여 움직이지 읺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움직임과 고요함 밖에 있으면서 움직임과 고요함을 나타내고 있는 근본 모습을 부동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앞서 말한 불생불멸에서 생과 멸이 동시이기 때문에 생상(生上)이나 멸상(滅上)으로 봐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면서 고요하며, 고요하면서 움직임이 실상의 번래 모습이기 때문에 동상(動相)과 정상(靜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동정(動靜)이 동시(同時)이면서 움직임으로 고요함으로 나툴 뿐입니다. 동정이 전체로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부동(不動)이라고도 적(寂)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불생불멸, 부동부정(不動不靜)이 지금 여기의 우리 모습입니다. 이를 '본래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시공 속의 움직임만을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부정의 무상한 모습이 고요한 우리이며,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고요히 한다고 하는 말은 움직이는 마음을 고요함으로 돌이키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동상(動相)과 정상(靜相)을 좇는 것이 움직이는 마음이며 이 상이 없는 마음이 고요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그쳐 고요함 속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더 큰 움직임이라고 <신심명(信心銘)>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명, 동정을 전체적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제한된 시공을 좇는 업상(業相)을 떠난 것이 고요한 삶입니다. 법성(法性)으로 원융하게 사는 것이 부동이며 본래 고요함입니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들 본래 모습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깃발인 삼법인에서의 무상, 무아, 열반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상, 무아가 열반적정의 자리이기 때문에 '본래(本來)'라고 합니다. 만일 수행을 통해 얻어진다면 새롭게 생기는 것이지 본래가 아닙니다.

 

무상, 무아, 열반은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무상, 무아, 열반이 아닌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멸(生滅)이 함께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동정(動靜)이 함께하는 부동부정(不動不靜)의 연기중도(緣起中道)의 삶으로 원융한 모습이 바로 우리 삶의 본래 모습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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