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스크랩] 제1구 法性圓融無二相

수선님 2018. 10. 2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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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

 

법성(法性)으로 사는 삶이란

'나'와 '너'가 상호 포섭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연기(緣起)의 세계입니다.

 

연기의 세계를 사는 것을 지혜(智慧)라고 하며

이때에는 저절로 자비(慈悲)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삶 전체가 지혜와 자비로 가득 찬 모습이

법성이기 때문입니다.

 

연기(緣起)로 하나된 삶, 법성(法性)

 

자기[別業]와 집단[共業]의 관점으로 세계를 한정시키는 데서 오는 갈등과 불만족인 업(業)의 속박에서 해탈(海脫)로 이끄는 가지가지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잃지 않고 매 순간 드러내 보며 실천하는 것이 해탈에 이르는 수행(修行)입니다.

 

그리고 수행의 완성인 해탈은 무아(無我)로서 집착(執着)을 다 비운 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삶은 수행으로 새롭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앞에 현실로 드러나 있습니다.

 

지금 법성게(法性偈)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이 만남의 장(場)도 자기 없음의 연기법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른 개체로 완전히 나누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야기하고 있는 장에서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장면이 나눔 이전의 하나된 장으로 있으며, 이 장으로서의 화복이 무아의 연기법인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이면서 동시에 삶의 본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너가 전체를 이루는 부분으로 나와 너는 아닙니다. 나 그대로 전체이며 너 그대로 전체인 데서 나와 너가 하나가 된 장이 무아의 연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자기 없음의 연기법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세계입니다. 눈을 감고 떠올리면 나타나는 생각, 꿈, 선 수행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들이 좋은 예입니다.

 

생각이나 꿈, 선 체험 등이 반드시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으로 나누어져 나타나는 듯하지만 마음 밖에 따로 대상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의 한 세계일 뿐, 삼매(三昧) 체험에서 보면 지금 분명히 마음 밖에 있는 것처럼 여겨기는 마음이란 인식 주관이 아닌, 주객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하나된 장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없음의 삼매야말로 삶을 여실히 아는 것이며, 해탈의 바탕이 됩니다.

 

앞서 말한 이야기에서 하나의 장이란 이야기 삼매를 뜻합니다. 이때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빈 마음이 이야기를 담아 듣는 사람의 빈 마음으로 들어가고, 듣는 사람의 빈 마음의 기운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빈 마음으로 들어가서[相入], 이야기하는 사람의 빈 모양을 이루고 듣는 사람의 빈 모양을 이루어 하나[相卽]가 됩니다.

 

우리가 삶으르 여실히 보가ㅣ 위해서는 삼매 체험이 필요하지만 삼매 체험은 반드시 특수한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공간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환경 등의 관계는 언제나 삼매 속에서 함께 하고 있는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은 나누어져 있는 각각인 것 같으나 잠시도 나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연기법으로 조화로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을 법성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삶의 온전한 모습이며 지금 전체가 그대로 삼매인 연기의 모습으로 무아를 나타내는 창조적인 삶입니다.

 

이 삶은 자기 없음의 열린 마음에서 서로가 서로를 포섭하되[相入], 자기의 모습으로 자기 없음을 나투는 데서 동일[相卽]합니다.

 

이와 같은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 동등한 위치에서 포섭하고 포섭되고 있습니다. 상호 포섭되고 있는 것을 상입(相入)이라 하며, 포섭된 기운, 곧 나 속의 너가 나로 살아고 너 속의 나가 너로 살아나는 것이 상즉(相卽)입니다.

 

이 관계에서 보듯 나는 너의 기운을 맏아 나가 되고, 너는 나의 기운을 받아 너가 되어 서로를 온전히 살게 하는 생명의 장이 곧 연기(緣起)의 상입상즉(相入相卽)입니다. 제 모습으로 서로를 무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근본이 무상무아(無常無我)로 비어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로 인해 제 모습을 지켜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법성(法性)으로 사는 사람이란 너와 나가 상호 포섭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연기의 세계입니다. 연기의 세계를 사는 것을 지혜라고 하며 이때에는 저절로 자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삶 전체가 지혜와 자비로 가득찬 모습이 법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삼매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들의 진실한 삶의 모습이며, 바른 삶으로 사는 것이 법성이 우리에게 드러난 모습입니다. 따라서 법성으로 사는 사람, 곧 삼매로 사는 사람은 앎 그대로가 매 순간 전체로 있는 것이지 그롸 같은 삶이 앎의 대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융(圓融)한 삶

 

이와 같은 삼매의 삶을 또한 원융한 삶이라고 합니다. 이 삶은 마음을 지우고 유위차별(有爲差別)의 시공을 벗어나 무위(無爲)의 삶을 살며, 시공을 벗어난 무위의 삶에서 사공의 차별을 나투면서 사는 삶입니다.

 

우리 삶의 온전한 모습인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사공 밖에 있는 삶의 흐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무상이란 한 순간도 일정한 모습으로 계속되지 않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시간, 길이를 갖지 않는 시간, 시간이라고 하지만 시간 밖에 있는 시간의 변화입니다. 시간 밖의 시간인 무상의 변화가 진여(眞如)이며 공성의 모습이 됩니다.

 

무아란 모든 법은 그 자체만으로 결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법은 상호 관계에서만이 제 모습을 나투면서 사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무상과 마찬가지로 무아도 또한 고성을 말하며, 이것이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진여입니다.

 

이와 같이 사공 밖에 있으면서 사공 그대로를 나투는 공(空)으로서의 무상, 무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여, 공성, 여래(如來)의 모습을 나투면서 차별이 있다고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말했습니다.

 

일어남이 바로 사라짐

 

생과 멸을 통해 무위법(無爲法)으로 있는 차별심을 살펴봅시다.

 

생(生)이란 어떠한 것이 일어남을 이야기하고, 멸(滅)이란 어떠한 것이 사라짐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어떠한 것'이라는 명사(名詞)를 사용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생과 멸이라는 동사(動詞)가 항상 동반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명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명사가 가리키는 것이 무상이며 무아인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멸은 무상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벗어난 진여, 공의 끊임 없는 자기 변화입니다. 그리고 나타난 변화가 그대로 진여, 공의 표현인 것에서의 생멸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색(色) 그대로 공(空)이며, 공 그대로 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고정된 대상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인식이 대상을 고정하면서 실체를 만들기 때문에 생멸 그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인 진여를 잃고, 생상(生相 : 생의 명사화)과 멸상(滅相)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여인 무상의 흐름이 시공의 제한된 인식으로 업화(業化)하여 그대로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결정된 상(相), 곧 자성(自性)을 갖게 됩니다.

 

자성을 갖게 되면 마음이 닫히고 번뇌가 뿌리를 내립니다. 여기에서 생도 없고 멸도 없는 시간 밖의 영원성만을 세우게 되고 현실의 삶이 그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성을 갖지 않는 생멸의 무상한 찰나(刹那)그대로 공성의 자기 표현일 때, 지금 우리의 일상이 해탈의 모습으로 긍정되면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선(禪)의 표현이 됩니다.

 

선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삶, 곧 무상 그대로 영원성(永遠性)언제 어디서나 살아감을 말합니다. 모든 중생의 근본이 무상, 무아의 열린 마음,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선의 삶인 해탈(解脫)이 가능하며 역대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께서 증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언제나 열려 있는 해탈이 근본이며 자성을 갖지 않습니다.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무상, 무아로 전찰나(前刹那)와 후찰나(後刹那)에 변함 없는 동일한 자기의 모습을 이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밝고 어둠에 따라 눈의 인연조건이 변하지 않는다면 본다는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이 일어난 순간 이것을 명확히 지켜 보아 무상으로 알아차릴 때, 중생의 제한된 시공인 닫힌 마음이 상(相)을 갖지 않게 돠고 시공을 초월하여 전체로 살게 됩니다. 이것은 일어남이 바로 사라짐임을 보는 것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하나의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남은 우주 전체의 인연조건이 그 사건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한 순간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사건에서 법계(法界)를 보는 것이며, 그 사건 자체로서 무상, 무아를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연조건은 잠시라도 멈춤 없는 변화로 생이 그대로 멸이며 멸이 그대로 생이면서 그것이 우주법계의 생이며 멸입니다.

 

곧 생도 생멸이며 멸도 생멸입니다. 따라서 동시 생멸이라고 해야 한 찰나를 온전히 표현한 말이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라지는 쪽에서 보면 불생(不生)이요, 사라지는 것 같지만 일어나는 쪽에서 보면 불멸(不滅)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란 이와 같이 생과 멸이 동시에 함께 하는 총체적인 흐름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와 같이 나타내는 모양 있음도 그대로 모양 없음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요, 죽어 소멸될 것 같지만 그 소멸이 바로 모양을 나타내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자기 모습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무상한 변화만이 우리들이 삶의 근본 모습인 진여 공성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태어남과 죽음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진여 공성의 가장 미묘한 나툼인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식태도는 일정한 시공에서의 고정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닫힌 마음이고 업(業)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불생불멸의 빈 모습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닫힌 마음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삶의 전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차려 참다운 삶의 모습을 여실히 나툴 때 동시 전체의 조화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때 비로소 완전한 시비분별이 사라지게 되어 원융한 삶이 됩니다. 원융한 삶, 시비분별이 사라진 삶은 시비분별을 꿰뜷어 보는 무심(無心), 무념(無念)에서 업의 종자까지 사라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시비분별 가운데 흔들림 없는 마음, 자아(自我)를 세우지 않는 마음속에서 이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더욱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삶의 어울림

 

우주법계(宇宙法界)는 연기관계(緣起關系)의 한 모습으로 생명을 나투고 있고 우리의 삶이란 우주법계의 한어울림 가운데 서로가 제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인 연기관계에서 각자의 모습은 우주법계의 부분이면서 전체의 인연을 결정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곧 각자의 모습을 이루는 힘이 법계 전첼르 관통하고 있고 법계의 인연으로 각자의 모습을 이루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뭇생명들이 중첩되어 있되 제 모습으로 나투는 중중무진세계(重重無盡世界)라고 합니다. 이를 비유하면 시방(十方)이 거울로 된 방 가운데 촛불을 켰을 때 그 불이 시방에 계속해서 겹쳐 있는 것과 같으며, 제석천(帝釋天)에 사방으로 한없이 뻗쳐 있는 그물, 곧 인드라망의 그물 코마다 박혀 있는 보석에 다른 그물 코의 모든 보석이 반사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제한된 시공의 어느 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자기 없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삼매(三昧)를 통해서 잘못된 이해가 완전히 사라질 때, 서로가 무한한 생명의 장을 연출하면서 중중무진세계를 나툽니다.

 

이 모습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중심(中心)이면서 주변(周邊)이며 주인(主人)이면서 객(客)입니다. 이런 관계는 철저히 자기로 살되 동시에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 다른 이를 살게 합니다. 이때 비로소 생사를 여의고 생에서도 사에서도 무한히 펼쳐진 삶이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으로서의 삶만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삶의 본래 모습을 잃고 죽음으로 이끌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나눌 수 없는 생명의 약동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영원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무상으로 나툰 진여의 시공을 초월한 모습에서 삶과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이 그대로 진여 공성이며 여기에는 삶과 죽음, 진여 공성이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눌 수 없는 생명의 약동을 나누는 데서 죽음은 시작되니 오늘 인류 전체가 환경오염으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서구(西歐) 사조가 힘을 갖고 난 이후 지금까지 환경이란 인간에 의해서 정복되는 객(客)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환경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환경으로 보면 환경 스스로가 주인입니다. 죽음으로 몰린 환경은 다시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주객이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이면서 객이고 객이면서 주인으로 한세계를 이루고 있는 중중무진세계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주변인 객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을 여실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주객을 함께 봐야 합니다. 객으로서 주인을 볼 때는 객의 위치가 자기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주인으로서 객을 볼 때는 주인의 위치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주인이면서 객으로 있는 데서 비주(非主)가 되며, 객이면서 주인으로 있는 데서 비객(非客)이 되;ㅂ니다. 주인도 아니요, 객도 아닌 데서 주인과 객으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연기중도

 

부처님 시대의 인도를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갑시다.

 

부처님 시대 이전부터 인도 사회는 아리안 족(族)과 드라비다 족으로 대표되는 차별된 계급과 지위의 지속, 나아가 시대에 까라 더욱 세분된 계급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된 계급의 차별에 의한 삶의 방식이 인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거대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질서가 요구됩니다. 이에 따라 이미 성립돼 있던 종교, 사상 등도 변화해야 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밖의 종교, 사상들도 새롭게 일어나게 됩니다.

 

부처님 이외의 가르침은 대체로 존재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상주론(常住論)과 인과의 이치를 부정하는 단멸론(斷滅論)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만 이 사유의 배경은 결정론입니다. 곧 결정된 사유의 틀에 의해서 모든 중생의 삶이 연역되는 것이나, 이는 실존의 우리 모습이 아닙니다. 결정된 사유(思惟)의 틀에 의해서 오늘날까지도 사회의 질곡이 더욱 가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인도의 카스트로는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상주론과 단멸론의 가르침이 한 편에 치우친 것이라 하시면서 연기중도(緣起中道)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비우고, 곧 모든 생각의 틀을 버리고 우리의 삶을 지켜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도 이와 같은 결정된 생각의 틀에 매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마음을 비우고 실존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염처수행(念處修行)입니다. 이 수행을 통하여 연기실상을 깨닫게 되니 치우침 없는 중도(中道)의 바른 길이었으며, 결정론을 주장하는 다른 종교, 사상 등과는 다른 새로운 길이 었습니다.

 

연기중도의 삶이란 서로가 자기 모습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인연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살게 하는 법성(法性)이며 원융(圓融)이며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이며 무애(無碍)입니다. 무자성(無自性)인 일체가 연기의 한어울림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며 이 관계를 떠나서는 각각의 삶은 근거가 없아지고 맙니다. 삶의 근거가 연기법이라 함은 개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식 주체로 알고 있는 마음도 또한 그 자체로서는 존립 근거를 갖지 못함을 뜻합니다. 

 

두 거울이 서로 비추듯

 

앞서 이야기 했던 꿈, 생각, 삼매 속의 영상 등은 말할 것도 없으며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체의 대상도 그 자체로서 존립 근거가 없습니다. 그것들도 인식 주체인 마음과의 상관관계에서만 그와 같이 보이고 들릴 뿐 마음을 따니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 대상을 본다고 하는 것은 주체로서의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체인 마음에 의해서 그렇게 보여지도록 대상화된 자기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대상이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을 닮아서 작용하도록 하는 대상의 반영이 인식 주체인 마음의 작용이라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대상을 만들기도 하고 대상이 마음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 말은 마음과 대상이 인식의 장에서 하나임을 뜻합니다.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먼저 있고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이 파생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과 대상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대상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대상도 마음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다고 하는 것은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기 마음이며, 자기 마음이 동시에 대상이 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옛 스님들께서는 두 거울이 마주 보고 서로를 비추고 있다[兩鏡雙照]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대상도 마음에 따라 갖가지 다른 느낌과 인식이 있을 수 있으며, 수많은 대상에 따라 마음의 작용도 천차만별입니다. 한순간도 인식의 장에서 일어나는 관계 속의 변화인 앎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시공을 떠나 있으면서 시공으로 나투고 있다고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시공의 제한을 떠나 시공의 밖에 있으며 무한 소(小)와 무한 대(大)를 동시에 담고 있으므로, 제한된 시공만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근본 변화인 연기법을 낱낱의 개별로 나누고 인식주체와 인식객체로 나누는 것을 분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분별이 일어나는 순간이 자신의 진정한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이며 스스로 왜곡과 소외를 부르개 됩니다.

 

마음과 대상이 한삶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나 대상의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순간 분별이 일어나면서 마음과 대상이 타자화(他者化)돠고 필연적으로 고(苦)가 발생하게 됩니다. 분별이 일어나는 순간 삶은 고와 붕만족의 연속이니 자신의 진정한 삶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대상을 바르게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됩니다. 분별은 단지 대상, 나와 너로 갈라 놓을 뿐 아니라 우리를 눈 뜬 장님, 들리는 귀머거리로 만듭니다. 그래서 나무의 소리, 흙의 소리, 이웃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합니다.

 

거꾸로 분별이 그치는 순간 제대로 된 사람을 살게 되니 이것은 원융한 삶, 하나된 삶이라고 합니다. 시공의 제한을 넘어 마음과 대상이 걸림 없는 전체로 사는 것입니다. 두 거울이 서로를 마주 비추듯 대상이면서 동시에 마음이고 마음이면서 동시에 대상임을 분명히 알아차려 자타(自他)의 분별을 떠나 사는 것을 두 모습이 없다고 합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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