坐禪三昧經 좌선삼매경

[스크랩] 좌선삼매경 37. 위빠사나 -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수념처/受念處)

수선님 2018. 10. 21. 12:36

좌선삼매경 37. 위빠사나 -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수념처/受念處)

 

 

身實相如是. 何故於此而起顚倒愛著此身. 諦思惟念身邊樂痛34). 以愛樂痛故著此身. 當觀, 樂痛實不可得. 云何不得, 因衣食故致樂, 樂過則苦生. 非實樂故, 如患瘡苦, 以藥塗治痛止爲樂. 以大苦故謂小苦爲樂, 非實樂也. 復次以古苦爲苦新苦爲樂. 如擔重易肩 而以新重爲樂, 非實常樂也. 如火性熱無暫冷時, 若是實樂不應有不樂. 或曰, 外事是樂因緣不必是樂. 或時樂因或時苦因. 若使心法與愛相應, 爾時是樂. 與相應爾時是苦. 與癡相應不苦不樂. 以此推之, 可知有樂無樂. 答曰, 無也. 欲不應是樂. 何以故, 若欲在內不應外求女色. 外求女色當知苦. 若是樂不應時時棄. 若棄不應是樂. 於大苦中以小苦爲樂也. 如人應死, 全命受鞭, 以是爲樂. 欲心熾盛以欲爲樂, 老時厭欲知欲非樂. 若實樂相不應生厭. 如是種種因緣欲樂相實不可得, 樂失則苦. 佛言樂痛應觀苦, 苦痛35)應觀樂, 如箭在體, 不苦不樂應觀生滅無常. 是謂痛念止.

몸의 실상이 이와 같다.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집힌 견해를 일으켜 이 몸에 애착하는가?

 

신변의 즐거움과 고통을 깊이 생각하고 깊이 사유하라.

즐거움과 고통을 갈애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한다.

 

마땅히 즐거움과 고통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 한다.

어째서 얻을 수 없는 것인가?

 

옷과 음식 때문에 즐거움에 이르나, 즐거움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생긴다.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며, 마치 종기의 고통으로 인한 근심은 약을 발라 치료하여 통증이 멈추면 즐거워지는 것과 같다. 큰 괴로움 대문에 작은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다.

또한 옛날의 즐거움으로 고통을 삼고 새로운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마치 무거운 것을 메고 있다가 어깨를 바꾸면 새로운 무거움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이 진실로 항상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예컨대 불의 성질은 뜨거워서 잠시도 차가운 때가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이것이 참다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즐겁지 않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바깥의 일은 즐거움의 인연이 된다 해도 반드시 즐거움인 것은 아니다.

어느 때는 즐거움의 원인이고 어느 때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만일 심법(心法)이 갈애를 상응하면, 그 때는 즐거움이다, 성냄과 상응하면, 그 때는 괴로움이다.

어리석음과 상응하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답하기를 '없다'라고 말하였다. 음욕은 마땅히 즐거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음욕이 안에 있다면 바깥에서 여색(女色)을 찾는 것은 마땅치가 않다.

 

바깥에서 여색을 구한다는 것은 마땅히 음욕이 괴로움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음욕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때때로 버려서는 안 된다.

만일 버린다면 마땅히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큰 괴로움 속에서는 작은 괴로움으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마치 사람이 죽어 마땅한데 오로지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채찍질을 당하더라도,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열의가 불타오르면 열의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노년에는 열의를 싫어하고 열의가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만일 진실로 즐거운 모습이라면 마땅히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가지가지 인연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지만 진실로 얻을 수 없으며, 즐거움이 사라지면 바로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운 느낌은 마땅히 괴로움이라고 관해야 하고, 괴로운 느낌은 마땅히 즐거움이라고 관해야 하니, 마치 화살이 몸 앞에 있는 것과 같으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고 마땅히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무상하다고 관해야만 한다."고 하셨다.

 

이것을 통념지(痛念止)라 말한다. 

 

 

 

 

 


출처 : 무인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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