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해설

[스크랩] 입보리행론 해설 96. 환영에 의지하여 환영의 고통을 끊는 것

수선님 2018. 10. 21. 12:39

입보리행론 해설 96. 환영에 의지하여 환영의 고통을 끊는 것

 

 


30   대상에 반응 할 때에도 변함없이 남아있으니

      무엇이 그것을 변하게 하겠는가?

      조건이 이것(원질)에 작용한다고 한다면

      그 둘의 관계는 어떤 것이겠는가?


관계성에서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31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 생기니

      그러므로 항상 하는 ‘자아의 힘’은 없네.

      이 사실을 알면 환영과 같은 현상에

      노할 일은 없네.


불교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며, 윤회체계를 12연기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윤회는 무명(無明)에서 시작되는데, 무명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무명만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연기가 시작되는 출발점에 무명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의 연기가 시작되면서 무명이 성립될 때에 또 다른 연기의 변화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무명에서 노사(老死)까지 하나의 12연기가 끝나기 전, 그 기간 동안 무명과 같은 많은 다른 12연기가 함께 시작되면서, 노사 이후에 무명이 계속되어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디가 시작인지 말하기 힘들기 때문에 처음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명에서 행(行), 행에서 식(識 ), 이렇게 해서 노사까지의 연기(緣起)가 12연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12연기가 끝나기 전에 다른 여러 가지 연기가 십만, 백만, 천만 가지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도 이전 무명으로 행이 생을 이루는 선업을 지었습니다.

 

지은 그것을 의식 종자에 심었던 것이 지난 한 생의 애(愛), 취(取)가 발하여 유(有)의 연기가 성립되었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우리 육신의 발생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 인간이라는 형태의 생(生)을 이루어 노사의 연기가 익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 우리 인생 전체는 물론, 하루하루 마음의 집착 때문에 여러 가지 고락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신구의(身口意)로 복이 아닌 업과 복이 되는 갖가지 업을 매순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단 1분 동안에도 갖가지 분별로 다양한 형태로 업을 짓고 있습니다.

    

지금의 인간 몸을 받게 되는 하나의 연기가 처음 무명을 시작으로 사(死)의 연기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무명으로 또 다른 업을 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다른 연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에는 시작이 없고, 무명에도 시작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명의 인과를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 시작이 없으며, 의식에 시작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외부에 형태가 있는 물질의 연속성을 생각해 볼 때 물론 거친 연속성은 알 수 있겠지만 물질을 구성하는 성분의 연속성은 시작도 끝도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생기고, 인연의 타력(他力)에 의한 것이기에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해서 생기니 그러므로 항상 하는 자아의 힘은 없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안팎의 인연이 만났을 때 인과에 걸맞는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환영(幻影)과 같은 현상에 노할 일은 없네.”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한 것이 됩니다. 다른 것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연기에 자력(自力)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고, 저절로 이루어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자력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환영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면 환영과 같은 현상에 노할 일은 없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팎의 모든 물건이, 선과 악이, 원인과 결과가 모두 환영이라면 굳이 악을 없앨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32   누가 있고, 무엇이 있어

      분노를 억제한단 말인가?

      그래서 없애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한다면

      환영에 의지하여

      환영의 고통을 끊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네.


“환과 같은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그것의 원인인 환과 같은 악을 없앨 필요가 없지 않는가?”하고 반문을 한다면,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환영은 허깨비와 같은 것이지만, 환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될 때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없는 환영과 같은 행복이지만 행복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부처의 지위나 해탈도 실제 하지 않는 환영이지만 이것은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영과 같은 것이고 본래 없는 것이지만 연기와 인과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원하지 않고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고통을 없애는 것이 환영과 같은 것이지만 고통은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환영에 의지하여 환영의 고통을 끊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해탈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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