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라는 개념을 두고, 개인이 깨달음을 체험하는 사건이 갑자기, 단박에, 빨리, 심지어 뜬금없이 일어난다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물론, 선사들의 행장에서 오도(悟道) 대목을 보면, 홀연히 깨쳤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 사건들도 다 전후맥락이 있지 그냥 아무렇게나 일어난 것이 아니다. 다들 치열한 수행을 하던 중에, 또한 어떤 인연이 있어서 그런 체험을 한 것이지, 수행을 모르고 불교도, 선(禪)도 모른 채 그저 범부의 일상생활에 얽혀 살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수행의 과정이나 아무런 인연이 없이 깨달음의 체험이 오는 것은 아니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돈오라는 건 있을 수 없고, 깨달음은 현실적으로 다 점오(漸悟)라는 주장도 있다. 깨달음의 사건이 아무리 갑작스레 일어났다고 해도, 하다못해 오랜 전생을 거쳐 인연이 무르익어 온 과정이 배경으로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선종 초기의 여러 가지 계보가 내세우는 수증론(修證論)을 분류하고 평가한 규봉 종밀(圭峰 宗密)도,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도 그런 식으로 언급하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한 개인이 깨달음을 체험하는 사건으로만 돈오라는 개념을 보면 그런 비판도 타당하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돈오는 사건으로서의 깨달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깨달음의 내용이 어떤 이치인지를 말하는 개념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 즉 진리관을 말하는 개념이지, 진리를 깨닫는 체험의 사건이 갑작스럽게 일어남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앞에서 썼던 용어를 가지고 말하자면, 모두가 이미 부처이고 세상 전체가 워낙에 진리 그 자체라는 본각이 깨달음의 내용이라는 것이 돈오라는 개념의 뜻이지, 한 개인이 깨달음을 이루는 시각(始覺)의 사건이 수행방편도, 아무런 인연도 없이 단박에 뜬금없이 일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글을 보니까,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있다’기보다는, ‘전체는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야만 참답게 전체를 볼 수 있다는 전일주의(全一主義)’가 돈오론의 입장이라고 하였다(김진무, ‘중국불교의 돈점 논쟁,’ <불교평론> 20호, 2004 가을, 391쪽). 점오론은 이를테면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있다는 입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이 진전되면서 진리를 조금씩 깨달아가서 마침내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을 양적인 언어로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또는 산에 오를 때 아래서부터 차근히 길을 밟아 나무, 바위, 숲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오르고 또 오르는 데 비유할 수도 있겠다. 이에 반해 아예 처음부터 산 전체를 보아야 산 자체를 보는 것이지 각각의 길목과 나무, 바위, 숲이 산 그 자체는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 돈오론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을 오르는 길목에서 보는 풍경 하나하나를 합쳐서 산의 모습을 가늠할 일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래도 아무튼 산에 오르는 과정, 즉 수행의 과정이 있어야 결국 꼭대기에 이르게 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마조록(馬祖錄)>에 “도(道)는 닦고 말고 하는 게 아니다(道不屬脩)”라 하고 또 “도는 닦을 것 없고, 더러움에 물들지만 말라(道不用脩但莫汗染)”고도 한 대목이 이와 관련해서 의미심장하다. 도를 닦지 말라? 즉, 수행을 하지 말라? 이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선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65. 돈수(頓修)와 점수(漸修) 1 (0) | 2018.11.04 |
---|---|
[스크랩] 64. 돈오(頓悟) 8 (0) | 2018.11.04 |
[스크랩] 62. 돈오(頓悟) 6 (0) | 2018.10.28 |
[스크랩] 61. 돈오(頓悟) 5 (0) | 2018.10.28 |
[스크랩] 60. 돈오(頓悟) 4 (0) | 2018.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