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 끄트머리에, 도불속수(道不屬脩) 즉 “도는 닦고 말고 하는 게 아니다”라 했다.
또 도불용수단막한염(道不用脩但莫汗染) 즉 “도는 닦을 것 없고, 더러움에 물들지만 말라”고도 한 <마조록(馬祖錄)>의 대목을 소개하였다.
도란 깨달음의 내용을 편의상 그렇게 일컬은 말이다. 그리고 수(脩)자에는 닦는다는 뜻도 있어서 수행이라고 할 때 보통 쓴 수(修)자와 바꾸어 쓰기도 한다. 도불속수나 도불용수나 같은 말로, 깨달음은 닦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겠다. 달리 말하자면 수행을 해서 그 결과로 깨달음을 이루는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러면 수행이 필요 없다, 수행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선승들이 수행하지 말고 빈둥빈둥 놀라고 가르치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한결같이 치열하게 수행하라고 가르친다. 아무튼 굉장히 아리송하다. 깨달음은 수행해서 이루는 게 아니라는데 왜 수행을 하라는 것인가? 수행이 깨달음에 이르는 조건이 아니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이룰수 있단 말인가?
<마조록>에서는 “도는 닦고 말고 하는 게 아니다”라는 구절 바로 다음에, “닦아서 체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었으니 다시 부서져 성문(聲聞)과 같아질 것이며,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이다(若言脩得脩成還壞卽同聲聞 若言不修卽同凡夫)”라고 하였다. 수행의 결과로 이루는 깨달음은 무너져버릴 수도 있는 깨달음이고, 그런 깨달음은 대승불교에서 얕잡아 보는 소승불교의 성인인 성문의 깨달음일 뿐이지 부처님이 되는 깨달음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다시 말해 수행을 해서 그 결실로서 이루는 깨달음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선종에서는 그런 깨달음은 깨달음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구경묘각(究竟妙覺), 즉 부처님이 되는 궁극적인 깨달음만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자, 그러니 수행해서 성불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얘기인데, 하지만 수행을 하지 않으면 그냥 범부일 뿐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어쩌란 말인가?
<마조록>에서도 위의 말씀을 듣고 어느 스님이 고맙게도 우리를 대신해서 질문을 한다.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作何見解卽得達道)”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자성(自性)은 본래 청정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 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修道人]이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선종의 깨달음, 즉 돈오(頓悟)의 뜻이 다시 확인된다. 자성이 본래 청정하다 함은 우리의 성품이 본래 깨끗하다는 말이니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본각(本覺)을 말하는 것이다. 선이다 악이다 하는 데 막히지 않는다 함은 분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니, 불이(不二)의 이치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분별의 망상을 일으켜 그에 얽매어 사는 짓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도를 제대로 닦는 수행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도 결국 수행이라는 개념의 뜻을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풀이해주지는 않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본래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으로서 살면 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아이고, 저는 지금 부처님으로 살지 못하겠으니까 우선 부처님이 되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됩니까?’하는 질문을 아무리 해보았자, 기대하는 처방은 안 나온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수행방편의 처방이고, 마조스님이 말하는 것은 방편이 아니라 원리원칙이기 때문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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