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65. 돈수(頓修)와 점수(漸修) 1

수선님 2018. 11. 4. 12:17


지금까지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에 대해서 나름대로 표현해보았다.
 
간단하게 말해서, 돈오란 한 개인이 깨달음을 체험하는 사건이 앞뒤 없고 뜬금없이 갑자기 일어난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모든 중생이 본래 이미 깨친 부처님이라는 원리를 표현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제 이야기를 선종의 수행론으로 이어가기로 한다.

 

앞의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수행의 결과로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돈오라는 개념 속에 들어있다. 여기에서 깨달음은 물론 본각을 말한다. 모든 중생이 이미 깨달은 부처님이라는 이치는 누군가가 수행을 해서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있게 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그 이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수행의 결과로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함은 그런 뜻이다.

돈수(頓修), 즉 단박에 닦는다는 말과 점수(漸修), 즉 점차 닦는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두 가지 수증론을 대비시키는 이야기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나오고 규봉 종밀(圭峰 宗密)이 여러 가지 선종 계보의 교의를 분류하고 분석하면서 언급한 이후로 선종의 담론에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점차 닦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들리지만 단박에 닦는다는 말은 무슨 소리인지 아리송하다. 수행이란 것이 어떻게 단박에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돈수는 실제의 어떤 특정 수행방법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점차 닦아서 그 결과로 깨달음을 이룬다는 우리의 상식적인 관념을 부인하는 말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돈수란 본각으로서의 돈오의 뜻을 다시 한번 천명하는 개념이다. 수(修)자를 쓰긴 했어도 기실은 수행에 관한 개념이 아니라 깨달음에 관한 개념이다. 돈오나 돈수나 같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돈수와 점수는 말로만 보면 두 가지 다른 유형의 수행방법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니다. 돈수란 수행을 부인하는 말이고, 점수는 수행을 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정반대의 이론이 아닌가 싶겠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정반대되는 구도는 아니다. 각자 서로 다른 맥락에서 깨달음과 닦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돈오돈수란 위에서도 말했듯이 본각이라는 이치는 개인이 수행을 하거나 말거나 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깨달음은 얻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는 불가득(不可得)의 교의, 깨달음은 수행이니 뭐니 하는 것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무소의(無所依)의 교의, 그리고 이렇게 하면 깨달음을 이루겠거니 기대하고 수행하는 대오(待悟)의 태도를 경계하는 것 등이 모두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수행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논하는 맥락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는 점차 닦아나가며 발전해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편으로 돈오점수는 개개인은 열심히 수행하라는 처방이다. 돈오점수라고 해서 꼭 본각을 부인하는 맥락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본각을 부인하고서는 선의 종지가 서지를 않는다. 돈오점수에서도 돈오가 앞에 나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점수돈오가 아닌 것이다. 즉, 점차 닦아나가 그 결과로 돈오를 이룬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무튼 열심히 수행을 하라는 얘기인데, 과연 무슨 소리인지 차차 가늠해보기로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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