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은 깊고 깊으며 가장 미묘해
번뇌(煩惱)가 다 사라진 정적(靜的)인 해탈(解脫)모습에서
잠시도 쉴 새 없이 자기를 연출하고 있음은
참으로 미묘하고 깊은 이치입니다.
이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인 연기(緣起)의 공성(空性)이
모든 존재의 근원(根源)이면서 동시에 현상(現象)이며,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으며
시공(時空)을 떠난 데서 시공으로 차별되어 나타났으며
시공의 차별 그대로가 시공을 떠나 있는
모순(矛盾)의 동일성이기 때문입니다.
삼독(三毒)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대소승(大小乘)을 구별하면서 대승은 우주법계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부처님의 나툼임을 믿고 수행하는 것이고, 소승은 이것을 모르고 수행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비로자니 부처님이란 연기법(緣起法)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연기법을 알 때 비로자나불 세계를 알게 됩니다. 처음 이 사실을 학습하는 입장에서 보면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이 대소승을 가르는 이유일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곧 부처님의 삶을 닮아 사는 계(戒)의 모습과 선정과 지혜를 바탕으로, 연기법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가 구현되는 자비의 실천은 시작되며 완성됩니다. 계정혜 삼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루는 근간으로 여기에 대소승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삼학의 실천 내용을 대소승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수행의 완성은 대소승의 구별을 떠나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대소승의 분별이 없으며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의 실천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의 삶, 화엄에서 말하는 일법계(一法界)의 삶을 이루는 것도 삼학의 실천과 완성에 있습니다.
늘 말했듯이 혜(慧)란 열린 마음, 곧 마음 가운데 있는 모든 벽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계(戒)와 정(定)의 완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만 부족하여도 안 됩니다. 계(戒)란 밖으로 드러난 행동, 곧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다스린다고 할 수 있고, 정(定)이란 마음을 다스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학의 완성은 마음 깊숙히 숨어 있던 미세망상의 삼독심(三毒心)까지 완전히 사라져서 깨어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꿈속이나 깊은 잠속에서도 삼독심의 흐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삼독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마음, 곧 부동심(不動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좌선수행에서 좌(坐)란 단지 앉아 있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때문에 좌선(坐禪)의 형태가 부동심을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헤탈을 나타내는 부동심이라고 하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부동(不動)이 앉음[坐]으로 표출되고 이 좌(坐)에서 몸과 마음이 무아(無我)로 실체(實體)가 없으며 연기법의 상호관계 속에서 끊임 없이 제 모습들을 나타내면서 정지(停止) 없이 흐르는 무상(無常)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선에서 '좌'란 깨달음을 위한 수단(手段)이 아니라 깨달음 자체(自體)입니다. 좌가 부동의 표현이며 이는 앞서 말한 법성(法性)의 부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좌란 일상의 모든 행동에서 부동심을 나타냄이 됩니다.
앉아 있음이 그대로 온 삶을 사는 것이며 삶 전체가 해탈(解脫)로 앉아 있음입니다. 앉아 흔들리지 않는 것은 또한 무상이 그 극에서 오히려 부동(不動)이 됨과 동시에 부동이 무상의 동(動)으로 나타나듯이 좌와 부동인 자세가 온 세상의 변화를 표출해 내는 근본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삼천대천 세게에 나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좌와 부동이 연기법신(緣起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가장 극명한 나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부동심은 부동인 채로 자제하게 온 세상을 관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진여자성[眞性]이라고 합니다. 이 마음은 선악시비호오(善惡是非好惡) 등의 분별을 꿰뚫고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시비호오 등의 분별심이 일어난 순간 그것이 무아, 무상으로 제 실체를 갖지 않음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것에 대해 마음을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반야바라밀을 염(念)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색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색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상, 무아이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여 무상, 무아 자체가 시공이 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생명의 삶들은 바로 공성(空性)을 나투고 있습니다.
연기(緣起), 모순(矛盾)의 동일성(同一性)
부처님 법을 배워 인생의 고(苦)에서 해탈한다고 했습니다만 인생의 고가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빈 모습들이 찬연하게 나툰 현상 일체, 곧 고를 떠난 소외 없음이 우리의 본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해탈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당위(當爲)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모든 번뇌(煩惱)가 쉰 곳에서 찬연한 모습을 그대로 나툰 것일 뿐만 아니라, 찬연한 제 모습의 빛이 모든 법들을 관통하여 생명의 빛을 나누고 있으면서도 상대에게는 철저히 상대 그대로 제 모습을 나투게 합니다.
이와 같이 걸림 없는 무한한 상호의지가 되고 있는 모습은 시공을 제한하고 있는 업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깊고 묘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학습한 수행자가 마음마음마다 이 생각을 잃지 않고 사유하여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을 다스려 나갈 때 삼독심이 저절로 공성(空性)으로 화할 터이니 이 또한 미묘한 법입니다.
좌선수행으로 드러난 공의 빈 마음은 일체 번뇌를 다 녹아낼 뿐만 아니라 모든 선법(善法)이 저절로 일어나 온전한 생멸활동의 장을 회복하게 합니다. 온전한 생명활동의 장이 곧 연기법(緣起法)이며 진여자성(眞如自性)이며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진여자성인 비로자나 부처님, 곧 법계신은 중생의 인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작은 곳에서도 시공간의 제한을 넘어서 일체 만물의 의지처가 되니, 가장 크다고 해도 가장 작은 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여자성은 자성이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한정된 자기 모습을 갖지 않는 것으로 무상, 무아, 연기, 공, 비로자나 부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여기서 시공의 제한을 넘어섰다고 해서 시공의 시작 이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공간 그 자체가 무상, 무아로 사공을 넘어선 데서 시공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시공 그 자체가 시공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무상, 무아의 연기법은 사공도 넘어서면서 온 시공에 편재해 있습니다.
중생의 삶이 열반에 두 발을 딛고 있으니 낱낱 중생이 바로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이는 중생의 자아의식을 넘어서 공성이 드러나는 삼매 체험으로 현존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깊고 미묘하다고 할 뿐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 법성(法性)이나 진성(眞性)인데, 다만 법성을 말한 앞의 네 구절은 부동의 정적(靜的)인 측면을 강조했다고 한다면, 진성을 말한 이 대목은 공성이 그대로 만법에 드러난 모습인 동적인 측명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번뇌가 다 사라진 정적(靜的)인 해탈의 한 모습에서 잠시도 쉴새 없이 자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미묘하며 깊은 이치라고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는 진여자성인 연기의 공성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현상이며, 부동이면서 동이며 시공을 떠난 데서 시공으로 차별되어 나타났으며, 시공의 차별 그대로가 시공을 떠나 있는, 모순의 동일성이기 때문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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