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5. 불교 명상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수선님 2018. 10. 21. 13:16

5. 불교 명상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2009년 08월 07일 (금) 08:53:13 임 승택 교수 anusati@hanmail.net

   * 요가와 불교 명상

불교 명상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일단 고대 인도의 요가(yoga)와 관련시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가의 스승들은 인간의 삶에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이유를 내부로부터 찾았다. 또한 그것을 해소하는 방안 역시 스스로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있다고 보았다. 즉 주변의 여건이라든가 타인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가짐부터 살펴보게 하였다. 바로 그것이 요가라는 자기 조절 방법으로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탐냄(貪)․성냄(嗔)․어리석음(癡)이라는 내부의 족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발달된 현대 과학은 얼마간의 물질적 풍부함을 안겨 주었지만, 물질세계의 화려함에 노출될수록 우리의 갈증과 공허감은 커져만 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면의 불만족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는 데에 주력했던 요가의 가르침은 다시금 우리의 주목을 끈다.  

요가는 인도에서 약 5000년 전부터 행해져 왔던 듯하다. 예컨대 그 무렵의 인더스 문명 유물 가운데에 요가 포즈를 취한 신상(神像)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요가와 비슷한 무언가가 그때부터 행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보다 확실한 요가의 기원은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성립된 베다(Veda)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학자들은 거기에 나타나는 소마(soma) 의식을 요가적 실천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제사 의례를 담당했던 제관들은 환각제의 일종인 소마라는 버섯즙을 마시고서 망아(ecstasy) 상태에 들어가곤 하였다. 이 소마 의식에는 단식이라든가 묵언 따위의 고행과 함께 주문의 암송이라든가 명상의 실천이 포함된다. 바로 이것이 후대에 이르러 발달된 요가의 원형일 것으로 추정된다.(이태영, 『요가철학』, 2004, 16쪽 이하) 

요가의 구체적 용례는 기원전 5-6세기 무렵의 우빠니샤드(Upaniṣad) 문헌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예컨대『카타 우빠니샤드(Kaṭha-Upaniṣad)』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참나(自我, ātmān)를 마차의 주인으로 알고 육체를 마차로 알라. 지성(知性, buddhi)을 마부로 알고 마음(意, manas)을 고삐로 알라. [다섯의] 감각기관을 말로 알고 그것의 대상을 말이 달리는 길로 알라....   다섯 감각기관이 마음과 함께 쉬고 지성도 작용을 하지 않을 때 이것을 최고의 경지라고 한다. 이렇게 감각기관을 확고하게 억제하는 것을 요가(yoga)라고 한다(KU. I. 3. 3- 2. 3. 11).” 여기에서 요가란 감각기관․마음․지성을 억제하여 동요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즉 외부적 여건에 동요하지 않도록 내면의 심리와 정서를 억제하고 다스리는 것이 요가의 용례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주변 여건에 스스로를 적응시킬 줄도 알아야 하고, 부정적인 태도와 정서를 다스리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그러한 연후라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요가란 마음작용의 가라앉힘이다. 그때 보는 자(觀照者, draṣṭu)는 본래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YS. 1-2, 3게송).”라는 『요가수뜨라』의 경구 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요가는 우리에게 어떤 거창한 환경적․물리적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변모시킴으로써 ‘마차의 주인’으로 누리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할 뿐이다. 바로 이점에서 요가와 불교 명상은 일단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 사마타와 위빠사나

세상살이의 불공평이 자신에게만 억울하게 적용된다고 투정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유 없는 무덤이 없듯이 그러한 주장에도 나름의 설득력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투정이나 불만은 당사자의 태도라든가 마음가짐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불평불만에 사로잡힌 사람을 접하게 될 경우, 우리는 일단 진정하고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피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충고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은 탐냄이나 애욕에 사로잡힌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일컬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적․정서적 요인들에 더 많이 좌우되곤 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명상이 사마타(止, samatha)이다. 사마타란 부정적 사고와 정서를 가라앉힌 상태로서 ‘평정’ 혹은 ‘고요함’을 일컫는 전문 술어이다. 사마타는 들뜨거나 흥분된 상태를 가라앉히기 위한 여러 기법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마음의 안정을 위해 내쉬는 숨을 일부러 길게 하는 호흡법이 있다. 혹은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떠올려 거기에 몰입하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사마타는 ‘마음작용의 가라앉힘’으로 정의되는 요가의 본래적 의미와 통해 있다. 또한 이것은 일정한 집중의 상태를 의미하는 쟈나(禪, 禪定, jhāna)라든가, 모든 산란함이 멈춘 경지인 삼매(三昧, samādhi)까지를 포섭한다. 즉 선정과 삼매는 사마타의 한 단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마타는 내면적인 향상을 위한 첫 걸음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감정적인 동요와 흥분을 다스려야만 올바른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고대의 요가 전통은 이러한 사마타에 초점을 모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어진 평정과 고요함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한때 고요해진 마음이라 할지라도 내․외의 여건이 변화하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만으로는 영속적인 평안과 행복을 얻지 못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새롭게 고안된 명상이 위빠사나(觀, vipassanā)이다. 위빠사나란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를 여실하게 관찰한다.”라는 의미이다. 주관적인 바람이나 의지를 배제하고서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 위빠사나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게 되고, 종국에는 탐욕과 불만 따위의 부정적인 정서를 근본적으로 내려놓게 된다. 그동안 선망해 왔거나 혹은 혐오해 왔던 그 무엇의 실제를 확인함으로써 탐냄도 성냄도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위빠사나는 사마타를 통해 얻어진 평안의 경지를 더욱 확고하게 해줄 수 있다.   

불교가 출현하기 이전의 요가 전통에서는 사마타 명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즉 있는 그대로에 대한 통찰보다는 내면의 고요함에 대한 추구가 우선시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붓다(Buddha)는 위빠사나라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여 보급시켰다. 즉 사마타에 머무르지 않고 진리의 통찰로 나아가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명상 기법을 가르친 것이다. 당연히 이 방법은 일대의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종파의 명상 기법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초기불교 이후 정형화된 요가학파의 가르침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요가수뜨라』에 나타나는 ‘보는 자(觀照者, draṣṭṛ)’, ‘홀로 머무름(獨存, kaivalya)’, ‘진리를 식별하는 지혜(識別知, viveka-khyāti)’ 등의 비중 있는 용어들에서 위빠사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요가수뜨라』에는 마음(心, citta)이든가 생각(尋, vitarka), 평정(捨, upekṣā) 등과 같이 불교로부터 차용한 술어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이태영, 『요가철학』, 2004, 51쪽 이하). 불교 명상은 요가라는 토양 위에 발생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독특한 측면을 지녔다. 실재(reality)에 대한 통찰만이 내면을 다스리는 영속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요가계 전반에 확산시켰다.

   * 위빠사나의 원리

초기불교의 명상 관련 가르침을 대표하는 경전으로서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 DN. II. 290-315쪽)』이 있다. 거기에 알아차림(知, sampajañña)과 마음지킴(念, sati)이라는 심리적 기능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바로 이들이 위빠사나 명상을 가능케 해주는 두 가지 원리이다. 먼저 알아차림에 대해서부터 살펴보자. 이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을 그때그때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용어에 대해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알아차림(知)이란 무엇인가....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볼 때나 관찰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구부리거나 펼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겉옷과 발우와 옷을 착용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잠들거나 깨어나거나 이야기할 때나 침묵할 때에도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이것이 알아차림이다(DN. II. 292).”   

사람들은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러저러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대부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일상의 삶에서 순일한 알아차림으로 지내는 때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밥을 먹는 경우,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찬을 집거나 밥알을 씹는 따위의 동작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서 먹는 시간은 실제로 극히 짧다. 우리는 밥을 먹는 대부분의 시간을 습관적인 상념 속에서 보낸다.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생각 속에서 번뇌와 더불어 먹는다. 다른 일상사도 대체적으로 마찬가지이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다. 또한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과거에 대한 회한과 미래에 대한 기대에 휘말린다. 현재를 벗어나는 순간 갖가지 내면의 욕구와 불만과 흐릿함이 몰려든다. “백년을 못 살 인생이 천년 걱정을 하면서 산다.”는 속담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현재의 순간을 벗어남으로써 부풀려진 허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직면하게 되면 별 볼일 없는 일들에 지레 겁을 먹고 허둥대는 양상이 다반사이다. 따라서 명확한 알아차림으로 현재에 머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의도하는 것은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는 것이고, 습관적인 상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상태로 사물과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보자는 의미이다. 

한편 마음지킴(念, sati)이란 정처 없이 과거와 미래로 넘나드는 마음을 현재의 대상에 붙잡아 두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좌선을 처음 해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렇게도 많은 잡념이 일어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실토하곤 한다. 언제 잡념이 떠올랐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방황하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서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알아차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러한 알아차림에 의해 ‘현재의 상태로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마음지킴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되돌린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지속하는 것’을 마음지킴이라고 한다면, 다시 ‘그러한 상태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는 것’을 알아차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은 위빠사나의 통찰을 이끄는 양 날개 구실을 한다. 

마음지킴의 원래 의미는 ‘잊지 않음(不忘, saraṇa)’이다. 이것은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제반 현상을 무관심하게 버려두지 않고 돌보는 것(ārakkha)을 의미했다. 이 용어는 정신차림․깨어있음․새김․마음챙김 등으로도 옮겨진다. 또한 이것에 대해 경전에서는 ‘감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SN. IV. 194쪽 등)’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 기민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러한 마음지킴은 여타의 심리적 요인들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탐욕이나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마음이 발생했을 때 그들을 지긋이 주시하다 보면 어느새 저절로 누그러져 있음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은 스스로를 다스려 나가는 심리적 제어 장치로 활용될 수 있다. 차후 살펴보겠지만, 현대 심리치료에서 주목하는 위빠사나 명상의 치료 기제 또한 이 마음지킴에서 찾아진다. 

마음지킴은 위빠사나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불교 명상을 특징짓는 고유의 술어이다. 그런데 이것은 특정한 명상 기법을 가리키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고, 위빠사나와 사마타 전체를 포섭하는 쓰임을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위빠사나의 전형적인 실천 기법으로 알려진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수행을 풀어 옮기자면 ‘마음지킴을 확립하는 네 가지 명상’이 된다. 또한 호흡에 대한 관찰 명상으로서 ‘입출식념(入出息念, 安般守意, ānāpānasati)’을 옮기자면 ‘들숨․날숨에 의한 마음지킴’이 된다. 이들은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명상 기법들로서, 자체 내에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와 평온을 의미하는 사마타의 경지를 포함한다. 즉 이들을 실천해 나가다 보면 마음의 고요함도 얻을 수 있고 사물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은 위빠사나를 가능케 하는 원리인 동시에, 위빠사나와 사마타 전체로 연결되는 이중적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AN. V. 99-100쪽 참조).

   * 불교 명상의 독특성

요가학파의 명상은 좌법(坐法, āsana)이라든가 조식(調息, prāṇāyāma) 따위의 육체적 수련 단계를 반드시 포함한다. 즉 몸의 긴장을 이완하기 위한 갖가지 포즈들과 함께 호흡의 조절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꾀하는 다양한 기교들을 가르친다. 이들 육체적 조절법은 본격적인 명상 수련의 예비적 과정으로 행해지곤 하였다. 이 방식은 명상을 처음 접하는 초심자나 건강이 허약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행자는 이러한 과정을 걸쳐 선정(禪定, dhyāna)이나 삼매(三昧, samādhi)로 구성된 심리적 단계로 넘어갔다. 이러한 요가학파의 가르침은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불교의 명상은 오로지 정신만을 강조하는 입장에 선다. 특히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육체를 조작하는 기법에 관한 일체의 언급을 삼간다. 모든 현상에 대해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다만 관찰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입출식념(入出息念, ānāpānasati)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호흡을 길거나 짧게 조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고 가르친다. 그러한 와중에 내면의 감정과 정서를 왜곡 없이 지각하게 되고, 또한 무상(無常)․괴로움(苦)․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가르친다. 위빠사나의 와중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게 되면 관찰해야 할 현상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작 자체에 탐냄이라든가 성냄 따위가 미세하게 스며있을 가능성이 크다. 

불교 명상은 예비적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다소 급진적인 성격을 띤다. 심지어 육체적인 통증이라든가 심리적인 갈등과 같은 부정적 현상들마저 통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놔두고 관찰하는 까닭에 살아가는 전 과정을 명상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있는 그대로에 대한 통찰만으로도 부정적인 정서와 심리를 다스릴 수 있다. 예컨대 격앙된 감정이 발생했을 때 그것에 오롯하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 이것은 격앙된 상태를 억지로 제거하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관찰 대상으로 삼는 까닭에 가능하다. 즉 감정의 발생과 변화와 소멸을 있는 그대로 주시함으로써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초기불교 경전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을 극복해 나가는 일화들이 여러 차례 소개된다(DN. II. 99쪽, 128쪽, 140쪽, 158쪽, 162쪽 등). 

불교 명상은 육체에 대한 조절을 배제했을 뿐 아니라, 육체에 대한 관심 자체를 위험한 것으로까지 보았다. 그것이 새로운 탐냄과 집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 명상은 요가학파 달리 육체적 수련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견 편향된 가르침으로 오해될 여지마저 남긴다. 그러나 불교 명상은 바로 여기에서 요가학파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독특성을 발한다. 육체적인 조절을 전제로 하는 명상은 개인적인 실천의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다. 몸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영역에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적 조절을 위주로 하는 명상은 타인과의 관계 문제에서 개방된 특성을 지닌다. 예컨대 탐냄이라든가 성냄 따위는 내면의 심리적 영역에 속한 것임과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주력하는 초기불교의 명상은 심신의 건강은 물론 윤리적․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대 적용될 수 있다. 바로 이점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영역의 문제들을 다룬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공히 전형적인 명상 관련 가르침으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불교 명상과 요가학파의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처 : 열린선원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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