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위빠사나, 무엇 때문에 하는가 | ||||
| ||||
| ||||
위빠사나와의 첫 만남 무엇 때문에 위빠사나를 하는가. 마음의 평안, 육신의 건강, 집중력 향상, 성격 개조, 스트레스 해소 등 여러 이유를 떠올릴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 또한 이러한 개인적인 동기에서 위빠사나를 시작하였다. 혈기왕성했던 나이였음에도 육체적인 건강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심리적으로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죄의식에 짓눌려 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괴로운 줄 알아야 그것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던가. 아무튼 대학 무렵의 나의 젊은 시절은 결코 밝지 못했고,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위빠사나를 하게 된 동기이다. 검은 먹구름이 머릿속에 가득한 기분으로 위빠사나 캠프를 찾아 나섰다. 이제까지 짊어지고 다닌 모든 상념과 망상을 내려놓고 오로지 현재에 머물라는 법사님의 말씀이 있었다. “앉아 있을 때에는 배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걸을 때에는 발의 움직임에 주목하라.”“숨 쉴 때 숨 쉬는 줄 알고 밥 먹을 때 밥 먹는 줄 알라.”“잡념이 발생하면 잡념이 발생한 줄 알아차리고 다시 배나 발의 움직임에 주목하라.” 그때가 2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나에게 기본 수칙으로 남아있는 말씀이다. 나는 다혈질적인 기질로 태어났고 또한 이러 저러한 망상을 즐기는 편이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쉽사리 흥분하거나 좌절하면서 갖은 억측을 해대는 버릇이 있다. 그러했던 내가 현재의 순간에만 주의를 기울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좌선과 경행만으로 이루진 단조로운 수행 일정 또한 무척 힘들었다. “내가 원해서 이 캠프에 왔지 않았던가. 한 달간만 시키는 대로 해보자.”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마음을 새롭게 고쳐먹고 발이나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겠노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채 몇 분도 지나기 전에 엉뚱한 생각에 팔려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다. “역시 나는 수행이 적성에 맞지 않는가 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무슨 진전이 있겠는가.” “혹시 이 모든 것이 사기 아니야.” 수행이 힘들어지면서 갖가지 망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에 대해 마음으로 명칭을 붙이라는 처방이 내려졌다. “들고, 들고, 들고.... 가고, 가고, 가고... 망상, 망상, 망상... 일어섬, 일어섬, 일어섬... ”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망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걸치면서 현재 순간에 깨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수행을 하다보면 한 번씩의 고비가 기다린다. 집중 수행에 임한지 두 주쯤 되었을 때이다. 처음 해보는 장기간의 좌선과 경행이었던 탓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함께 수행하던 동료 한사람이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짐을 챙겼다. 나도 덩달아 떠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특별히 갈 곳도 없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냥 그곳에 주저앉기를 결심했다. 그런데 그러한 체념이 오히려 약이 되었던 듯하다. 그 다음날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경행을 하는 와중에 가슴 한가운데서 미세한 섬광이 어른거리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발의 움직임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러한 느낌이 점점 강렬해지다가 어느 순간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환영이 보였다. 바로 그곳으로부터 형형색색의 황홀한 광선들이 발산되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배나 발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갖가지 현란한 빛의 이미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그 빛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지긋이 관찰하라는 법사님의 지시가 있었다. 기묘한 빛의 이미지들이 서서히 변화하면서 엄청난 영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찬란한 금빛 구름 속에 겹겹의 누각과 궁전이 목격되었다. 흰 옷을 입은 아스라하게 거대한 관세음보살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검은 십자가와 예수님 얼굴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뚜껑이 열리듯이 이마 위쪽이 잘라져 없어진 느낌과 함께 그곳으로부터 훤한 빛이 한참 동안 허공으로 뻗쳐올랐다. 온 몸이 투명해지면서 사방으로 황금빛 광선이 발광하는 체험도 있었다. 모든 영상들이 지극히 생생했고 선명했다. 그러한 현상이 약 일 주일가량 지속되었다. 정말 꿈만 같았다. 나에게도 그러한 체험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이후 관련 문헌을 통해 유사한 현상이 위빠사나 수행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여러 명상 전통에서 비슷한 사례들이 보고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빛의 이미지는 대체로 처음 수행에 임한 사람들에게 발생하며, 마음에 쌓여있던 심리적 잔재물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한다. 또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사람일수록 그러한 현상을 체험할 가능성이 높으며, 위빠사나 수행자들의 경우 대략 절반 정도가 그러한 과정을 걸친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은 집중 수행에 들어간 지 일 주일에서 한 달 사이에 발생하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잦아드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그것이 가라앉고 나면 보다 차분한 마음으로 본격적인 명상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 공통적인 가르침이다(김열권 편저, 『위빠싸나 II』, 1993; 김재성 옮김,『명상의 정신의학』, 2009; 이균형 옮김, 『깨달음 이후 빨랫감』, 2006). 그러한 체험이 잦아들자 무덤덤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한편으로는 다시 그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법사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얼마간의 진전이 있었다. 모든 현상들이 쏜살같이 빠르게 스쳐가는 모습으로 보였다. “아, 이걸 두고 무상(無常)이라고 하는구나.” 분명한 의식으로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어느 순간에 모든 현상들이 일순 사라져버렸다. 더불어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 자체마저 붕괴되는 체험이 이어졌다. 얼마간의 공백이 있은 연후에 배를 관찰하는 마음이 되돌아 왔다. 절멸(絶滅)로 여겨질 만큼 공백의 순간은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이걸 두고 열반이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이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 아닌가.” 무언가 종착지에 이르러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마음이 급속하게 해이해짐을 느꼈다. 잠시 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경험들을 소화해 낼만한 여유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사실 그간의 체험들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픈 생각도 없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 처음 접했던 위빠사나 명상의 여파는 컸다. 다른 모든 일을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위빠사나에 투신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장소를 미얀마(Myanmar)의 명상 센터로 옮겼다. 물론 그 사이에 잠시간의 달콤한 휴식을 가졌고, 또한 그간의 체험 내용을 확인하는 절차도 빠뜨리지 않았다. 『청정도론(淸淨道論)』,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등에서 유사한 내용들을 발견하였다. 특히 『관무량수경』에 기술된 ‘16가지 관찰 방법(十六觀法)’은 내가 경험했던 것과 순서상으로도 대략 일치했다. 전혀 다른 부파 소속의 경전들임에도 그렇게 흡사한 내용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 정해졌다.” 역대 선사들의 가르침이 과장이 아니라는 확신과 더불어 위빠사나의 본 고장인 미얀마로 향했다. 미얀마에서도 유명하다는 위빠사나 센터에서 그야말로 명망 높으신 큰스님의 가르침 아래 본격적인 집중 수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얀마에서의 명상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질적인 환경 여건에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참 우기였던지라 덥고 습했다. 높은 담벽으로 둘러싸인 비좁은 수행 공간이 마치 교도소 같았다. 고물 자동차들이 뿜어대는 도심의 소음과 매연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담벽을 넘어 귀와 코를 자극했다. 처음 해보는 외국 생활에 영어마저 원활하지 않아 상세한 수행 지도도 받을 수 없었다. 매우 답답했다. 그러한 악조건을 위빠사나의 통찰 대상으로 삼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 정도가 지나자 몸에 이상이 생겼다. 찌르는 듯한 복통과 함께 호흡 곤란 증세가 생겼다. 귀국을 권유받았다. 그것으로 미얀마로의 첫 번째 명상 여행을 접어야 했다. 이후로도 삼 개월씩 두 차례나 더 미얀마에서의 집중 명상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때마다 결과가 신통치 않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귀한 시간과 경비를 허비한다는 생각에 억울하다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몇 년을 쉰 후, 또 한 차례의 집중 수행을 걸친 연후에야 그때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처음 위빠사나를 할 경우에는 몸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이 효과적이다. 즉 다리나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다보면 쉽사리 집중된 상태에 이를 수 있고, 또한 그것을 통해 명상 전반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는 강하게 느껴지는 현상에 대해서부터 유연하게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의 방황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 특히 낯선 환경 속에서 심리적인 중압감을 안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 자체가 일단 관찰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루함, 외로움, 두려움, 서글픔 따위에 대해 지긋이 응시하다보면 그들이 저절로 누그러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한 연후에 몸이나 느낌 따위로 관찰 영역을 넓혀가야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마음에 대한 관찰(心念處)’을 위주로 하는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의 가르침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수행을 시작하라고 권한다. 수행을 시작하려는 바로 그 마음에 탐냄이나 성냄 따위가 스며있지 않은지 반성하라고 가르친다. 처음 몇 번의 미얀마 수행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데에는 바로 그 점이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흥분과 긴장이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몸에 대한 집중만을 고집하다보니 수행의 리듬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 마치 몇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분명해진다. 바로 그러한 분위기에 친숙해진 연후라야 흥분이라든가 긴장 따위의 정서적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일체의 현상들에 대해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위빠사나를 행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실 그렇게 될 때라야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를 관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안팎의 현상들을 법(dhamma) 자체로 마주하게 되는 진정한 위빠사나가 시작되는 것이다. 위빠사나와 심리치료 현대의 발달된 심리학과 심리치료에서는 위빠사나의 가르침을 심리치료 방법으로 활용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위빠사나의 치료적 원리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제 그러한 작업들은 심리치료 분야 자체만이 아니라, 역으로 명상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필자 또한 앞서의 개인적인 체험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연구 성과에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쉐우민 센터에서의 수행을 계기로 위빠사나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위빠사나란 몸과 마음에 대한 통찰을 통해 내면의 감정들에 현혹됨이 없이 잘 살아가도록 이끄는 기술이다.” 그런데 어렵싸리 얻은 이 결론이 심리학 전공자들에 의해 더욱 설득력 있게 묘사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정신분석(psycho-analysis)의 입장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해석해 들어간 인물로서 마크 옙스타인(Mark Epstein)의 경우가 있다. 그에 따르면 “불교 명상은 일상적인 마음을 자연스러운 출발점으로 하며 내면의 무엇인가를 강제적으로 바꾸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전현수 옮김, 『붓다의 심리학』, 2006, 146쪽).”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불편한 정서나 느낌 따위가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한편 많은 심리치료자들이 위빠사나의 원리가 되는 ‘마음지킴(念, sati)’이라는 심리적 기능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속적인 주의 집중’을 의미하는 이것에 대해 베넷 골만(Bennett-Goleman)은 “고정화된 지각으로부터 탈피하여 매 사건을 처음 접하는 것처럼 보게 하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적으로 직면하게 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또한 존 카밧진(Jon Kabat-Zinn)은 “현재의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으로서 의도적으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서 순간순간 체험하거나 느낀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규정한다. 이들의 설명은 위빠사나의 기술적 측면에 관련된 것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몸과 마음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안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최근의 연구로서 티스데일(J. D. Teasdale)은 이것에 대해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거리를 두는 능력”으로 개념화하고, 또한 “그렇게 해서 배양된 ‘메타 인지적 통찰(meta-cognitive insight)’을 통해 부정적 사고와 느낌을 단순히 지나가는 정신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쉐우민 사야도의 가르침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모든 현상을 다만 관찰 대상으로 남겨 둘 수 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격적인 신경증 치료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가 거론되곤 한다. 노출효과(exposure)․탈자동화(deautomatization)․수용(acception)․탈동일시(disidentification) 등이 그것이다(박성현, 「위빠싸나 명상, 마음챙김, 그리고 마음챙김을 근거로 한 심리치료」, 2006). 이들은 위빠사나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인 동시에,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신경증 치료의 원리로 거론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노출효과란 태양에 노출된 눈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듯이, 관찰의 힘에 의해 부정적인 정서와 사고가 저절로 해소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격한 감정 상태에 처해 있을 때 그러한 감정 자체를 지긋이 응시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완화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스스로의 행실에 대해 냉정하게 주시를 하다보면 어느덧 들뜬 마음도 가라앉고 불손했던 생각들도 잠잠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위빠사나에 포함된 치료 원리로서의 노출효과이다. 탈자동화란 습관적인 사고를 개입시키지 않고 매 순간의 경험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몇 번의 반복 경험을 통해 고정화된 자동적인 사고를 일으킨다. 이것은 먹이를 먹을 때마다 “구구” 소리를 들은 닭이 나중에는 그러한 소리만 들어도 먹는 시간으로 착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된 타성적 습관에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칭찬에 인색한 부모 밑에 자란 사람은 매사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서 성공보다는 실패만을 걱정한다고 한다. 자신이 행해 왔던 일에는 으레 꾸지람이 뒤따랐다는 과거의 경험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습관이 스스로의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탈자동화란 그러한 강박적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유연하고도 탄력적인 자세로 생생하고도 변화무쌍한 현실 세계를 마주하는 것을 말한다. 수용이란 모든 경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심리적 저항감과 압박감을 해소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경험하는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더욱 많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 골몰한다. 또한 괴로움이 주어지면 그것의 실제를 파악하지도 않은 채 도피하려는 생각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 갖가지 심리적인 중압감을 걸머지게 된다. “백년도 못 살 인생이 천 년 걱정을 하며 산다.”는 속담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위빠사나의 통찰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리하여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차분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게 된다. 마지막의 탈동일시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들을 단지 관찰해야 할 현상으로 보게 하여 자기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말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과 사고를 주체하지 못하고서 그들의 노예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한순간의 탐욕과 분노에 휘말려 긴 시간을 후회로 살아가는 경우가 그것이다. 따라서 내면의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위빠사나의 능력이 증장됨으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의 정서와 사고가 덧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울러 그러한 현상들을 관찰 대상으로 남겨 두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러한 탈동일시는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으로까지 확대․적용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간 ‘나’라고 믿어 왔던 것들에 대해 한 발짝 떨어져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그다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상은 위빠사나를 행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으로,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신경증의 치료를 위한 기제로 활용되고 있다. 물론 위빠사나와 심리치료는 그 목적을 달리한다. 전자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극복하고자 개발된 반면에, 후자는 특정한 병증의 개선과 치료에 주력할 뿐이다. 따라서 심리치료는 위빠사나의 본래적인 취지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더욱이 건강 문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탐욕과 집착 따위를 조장하기 십상이며, 새로운 유형의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심리치료자들이 걸어야 할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들에게 불교적 가르침이 여전히 요청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상에서 거론된 내용들만큼은 그들의 설명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마지막으로 거론된 탈동일시는 거짓된 ‘자아’로부터 벗어나라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것만으로도 위빠사나를 행하는 개인적인 동기가 충분히 규명된다는 데에 만족한다. “스스로에게 현혹되지 말고 잘 살아가자.”라는 그것이다. |
'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9. 어떻게 하면 명상을 잘 할 수 있을까ㅡ임 승택교수 (0) | 2018.11.04 |
---|---|
[스크랩] 8.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ㅡ임 승택교수 (0) | 2018.11.04 |
[스크랩] 6. 위빠사나란 무엇인가ㅡ임 승택교수 (0) | 2018.10.21 |
[스크랩] 5. 불교 명상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0) | 2018.10.21 |
[스크랩] 4. 명상이란 무엇인가 (0) | 2018.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