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위빠사나란 무엇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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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빠사나 명상의 의의 위빠사나vipassana란 무엇인가. 다소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이 명칭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이다. 많은 한국인 수행자들이 미얀마Myanmar 등 남방의 불교 국가에 건너가 이것을 배워 왔고, 자신들의 수행 체험을 주변에 알리는 가운데 위빠사나라는 명칭을 각인시켰다. 이 명상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을 그때그때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수행을 실제적인 내용으로 한다.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권에서는 이 방법이 간화선看話禪이라는 독자적인 수행법에 가려져 잠시 망각되었다. 그러나 남아시아의 상좌부上座部, Sthiravāda, Theravāda 불교권에서는 이것을 붓다가 직접 개발하고 유포한 명상으로 믿으며 계승해 오고 있다. 대승불교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에서 위빠사나는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불교 이래의 전통적인 명상 기법을 가리킨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위빠사나란 초기불교의 경전어인 빨리어pāli를 음역한 것이다. 이 용어는 두 개의 낱말이 결합된 합성어로서, 위vi란 ‘분리하다’, ‘쪼개다’, ‘관통하다’ 등을 의미하고, 빠사나passanā란 ‘관찰’,‘식별’ 등을 의미한다. 위빠사나의 온전한 의미를 번역하면 ‘꿰뚫어 봄’ 혹은‘통찰洞察’정도가 적당하다. 위빠사나로 대변되는 붓다의 가르침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만을 관찰․자각케 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제반 현상을 사실대로 수용하고 통찰하게 되며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것의 참된 모습을 깨닫게 된다. 궁극의 목표로 제시되는 열반涅槃, nibbāna의 경지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숙된 위빠사나를 통해 우리는 편견과 왜곡으로부터 벗어난 투명한 눈으로 사물의 참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즉 내면의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은 물론 그것 자체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탐냄貪ㆍ성냄嗔ㆍ어리석음癡의 소멸로 정의되는 열반의 경지와 그대로 통해 있다(SN. IV. 251쪽). 붓다의 가르침은 절대자 혹은 신神 따위를 염두에 둔 여타의 종교적․철학적 가르침과 성격이 다르다. 붓다에 따르면 그러한 절대적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불안한 상념들이 빚어 낸 도피처일 뿐이다. 우리 범부 중생들은 변화무쌍한 삼라만상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고서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를 덧씌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현상 너머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고서, 다시 그것으로부터 현실의 발생과 소멸 이유를 찾는 부단한 사색의 여정을 되풀이하곤 한다. 바로 이것이 지난 세월을 통해 드러났던 동․서양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붓다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 현실과 유리된 관념의 틀 안에 갇히게 될 위험성을 간파하였다. 즉 경험할 수도 접촉할 수도 없는 허황된 생각들에 얽매여 살아 숨 쉬는 현실 세계를 유린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모든 선입견과 망상을 내려놓고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을 볼 것을 가르쳤다. 붓다는 현상 너머의 본질substance에 관한 어떠한 가정이나 신념도 독단獨斷, dogmatism으로 거부한다. 오히려 그는 일체의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이 해소될 때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이 저절로 그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낸다고 가르친다(SN. V. 417-418쪽). 이러한 입장은 절대적 존재 혹은 본질에 대한 추구를 원동력으로 해 온 인류의 지성사에 비추어 매우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근세에 이르러 부각된 현상학이라든가 실존철학 등에서 나타나는 반성적 동향과도 흡사한 면모를 지닌다. 이점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250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이로움을 지닌다. 우리는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 스스로의 좁은 소견을 일단 접어 두고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일체를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참된 것과 참되지 않은 것을 올바로 식별하는 지혜paññā를 갖추어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바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절차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위빠사나의 실제 위빠사나는 마음지킴念, sati과 알아차림知, sampajañña이라는 두 가지 심리적 기능에 의존한다. 즉 주의집중을 의미하는 마음지킴을 통해 특정한 대상으로 마음을 모으고, 그렇게 해서 집중된 마음으로 명확한 알아차림을 행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은 위빠사나를 이끌어 가는 한 쌍의 바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초기경전에서는 양자에 의한 위빠사나의 관찰 대상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한다. 몸身, kāya․느낌受, vedanā․마음心, citta․법法, dhamma이 그것이다(DN. II. 290-315쪽). 위빠사나의 실천에서 이들 네 가지는 집중된 마음으로 알아차려 나가야 할 대상이 된다. 예컨대 몸에 대해 마음지킴을 행하고 알아차려 나가는 과정이 곧 위빠사나의 한 양상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몸․느낌․마음․법에 대해 위빠사나를 행해 나가는 전체 과정을 일컬어 사념처四念處라고도 한다. 심리적 기능을 강조할 경우 위빠사나는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이라는 두 가지 용어로 대체될 수 있다. 또한 관찰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그것은 사념처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 즉 사념처의 네 가지는 위빠사나를 통해 주시하는 현상들을 총괄적으로 아우른다. 그런데『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에 따르면 사념처는 자체적으로 구분되는 또 다른 세부 항목들을 지닌다. 예컨대 몸身이라는 항목은 호흡․동작․행동 따위를 비롯하여 심장이라든가 콩팥 등과 같은 내부 장기臟器로 구성된 14가지 하위 내용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개별 대상들은 실제 수행의 와중에 취사․선택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즉 호흡이나 동작 따위의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여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위빠사나를 행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각각의 세부 항목들을 빠짐없이 숙지할 필요는 없으며 자신에게 적합한 대상을 선택하여 지속적으로 관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즉 어떠한 대상을 골라잡아 위빠사나를 행하더라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가능하며 궁극의 목적인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위빠사나의 관찰 대상과 관련하여,『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가르침을 전한다. 즉 ‘의심이 많은 사람疑行者’과 ‘생각이 많은 사람尋行者’은 호흡을 대상으로 삼아 위빠사나를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탐욕이 많은 사람貪行者’은 내부의 장기라든가 죽은 시체 따위의 부정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친다(Vism. 114쪽). 이것은 사념처에 속한 각각의 항목들이 수행자의 성향에 따라 달리 채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심이 많거나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일단 그러한 의심이나 생각을 가라앉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자면 일체의 상념을 멈추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매순간의 호흡에 오롯하게 집중해야 한다. 한편 탐욕이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탐욕을 상쇄시킬 무언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탐욕을 충동질하는 주요 요인으로서의 육체에 대해 그 불결함을 통찰하게 하는 방법이 권장된다. 이러한 과정을 걸치면서 수행자는 탐욕이라는 정서를 다스릴 수 있게 되고, 종국에는 일체의 현상들에 대해 무상無常ㆍ무아無我의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사념처의 나머지 항목인 느낌․마음․법 등도 개별적인 세부 내용을 지닌다. 예컨대 느낌受은 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따위의 9가지로 세분화되며, 마음心은 탐욕․분노․어리석음 따위의 16가지로, 법法은 다섯 장애五蓋ㆍ오취온五取蘊ㆍ사성제四聖諦 등의 5가지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러한 나머지 항목들은 몸에 속한 것들과 달리 수행의 와중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단계적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처음 잠깐 명상에 임할 때에는 누구나 평안하고 ‘즐거운 느낌’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 계속해서 집중적인 명상을 하다가 보면 견디기 힘든 지루함과 함께 온 몸이 결리고 쑤시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다시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대부분의 육체적 괴로움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미묘한 느낌’을 체험하게 된다. 이들 육체적․정신적 느낌은 그 자체로서 훌륭한 위빠사나의 관찰 대상이 된다. 한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일상 중에는 포착하기 힘든 것으로, 고도의 집중 상태에서만 존속하며 또한 그때라야 관찰이 가능하다(정준영,「대념처경에서 보이는 수념처의 실천과 이해」, (2003, 195-221쪽).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내면의 평온을 의미하는 사마타止, samatha와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가 동시적으로 병행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心에 속한 세부 항목들로서 탐욕이라든가 분노 따위는 그들이 존속할 때라야 비로소 관찰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경우는 사마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으며, 다만 유연한 마음으로 일체의 긍정적․부정적 심리 현상들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요구될 뿐이다. 즉 탐욕과 분노가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억압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주시하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통찰 과정을 걸치면서 수행자는 내면의 탐욕과 분노가 저절로 누그러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일체의 내면적 번뇌들이 덧없이 변화해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사념처의 세 번째 항목인 마음에 대한 관찰의 실제 양상이다. 현재 남방불교권에서 활약 중인 위빠사나 스승들은 대체적으로『대념처경』이라는 문헌에 근거하여 그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제시되는 위빠사나 기법들은 세부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들 중에는 선대의 스승으로부터 이어받은 방법도 있고 혹은 독자적으로 새롭게 고안한 것도 있다. 그러나 새로이 고안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경전에 설해진 가르침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경전과 주석서에 의거한 방법, 둘째 전적으로 경전에만 의존하는 방법, 셋째 위의 두 가지를 적절히 응용하여 독창적으로 개발한 방법 등이다. 먼저 경전과 주석서에 의존하는 대표적인 경우로는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1904-1982 위빠사나를 거론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사마타samatha라는 집중 수행을 익히지 않고서도 행할 수 있다는 데에 장점이 있다. 특히 그의 방법은 좌선을 할 때 호흡에 동반되어 생겨나는 복부의 움직임을 일차적인 마음지킴sati의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와중에 포착되는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 이들 네 가지는 육체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로서 위빠사나의 진전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한다. 예컨대 몸 안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느낌들은 땅의 요소로, 축축한 느낌은 물의 요소로, 뜨거운 느낌 따위는 불의 요소로 분류된다. 또한 마하시의 방법은 경행을 비롯한 일상의 모든 육체적 움직임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주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개월에 이르는 지속적인 집중 수행을 통해 수행자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나아가 지극히 평온해진 마음으로 모든 감각과 의식이 사라지는 열반nibbāna의 상태를 체험할 수도 있다고 한다. 마하시의 위빠사나는 남방불교 전래의 명상을 국제화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따라서 위빠사나를 떠올리면 마하시의 수행법이 자연스럽게 연상될 정도이다. 현재 활동 중인 마하시 사야도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우 빤디따 사야도 U Pandita Sayadaw, 우 자나까 사야도 U Janaka Sayadaw 등이 꼽힌다. 또한 최근 입적한 쉐우민 사야도 Shwe Oo Min Sayadaw, 1910~2002는 마하시의 방법을 독자적으로 계승하여 마음에 대한 관찰 心念處을 위주로 하는 위빠사나를 가르쳤다. 한때 마하시의 위빠사나는 스리랑카의 학승들에게 경전에 나타나는 방법과 다소 상이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념처경과 청정도론의 가르침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마하시는 이 명상 기법을 그의 스승인 밍군 제타완 우 나라다 Mingun Jetavan U Narada, 1869-1954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한다. 우 바 킨과 고엔까는 느낌에 대한 관찰受念處에 비중을 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 그들의 방법에는 몸의 구석구석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관찰하는 다소 기교적인 내용이 포함된다. 예컨대 머리라든가 목, 어깨 따위를 부위별로 구분하여 그들 각각에서 느껴지는 세밀한 느낌들을 포착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것은 대념처경에 제시된 느낌에 대한 관찰법을 세분화하여 응용한 것으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의 단계적 변화 과정을 용이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방법을 가르친 우 바 킨과 고엔까는 모두 재가자로서 스승과 제자 사이이다. 이들은 재가자에 의해 주도되는 위빠사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고엔까의 수련 방법은 초보자를 위한 10일 코스와 정규적인 심화과정 코스로 구분되어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고엔까의 위빠사나는 마하시의 방법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두 번째의 경전에만 의존하는 방법으로는 태국의 붓다다사Buddhadāsa, 1906-199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후대에 저술된 논장Abhidhammapiṭaka 문헌이나 청정도론 따위의 주석서가 붓다의 가르침을 오히려 오도할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경장Suttapiṭka과 율장Vinayapiṭaka에 근거한 새로운 수행체계의 정립에 투신하였다. 그에 따르면 붓다의 가르침은 소수의 엘리트 수행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쉽사리 따라 행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그는 비교적 간단한 형식으로 구성된 입출식념경Ānāpānasatisutta에 입각한 호흡 관찰법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경전이야말로 초기불교 고유의 실제적인 명상 기법을 제시하는 유일한 문헌이라고 평가하였다. 이것에 입각한 수행을 통해 붓다다사는 붓다의 본래 의도가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에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해탈의 경지가 ‘누구나’ ‘바로 여기서’ 체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세 번째 방법은 문헌적 가르침을 응용하여 아예 독창적인 기법을 개발한 경우이다. 전형적인 경우로는 미얀마의 순룬 사야도Sunlun Sayadaw, 1878~1952와 태국의 프라 몽골 텝무니Phra Mongkol Thepmuni, 1884-1959 그리고 아찬 담마다로Ajahn Dhammadharo, 1914-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중에서 순룬 사야도의 방법은 강도 높은 정화호흡으로 유명하다. 이 방법에서는 우선 마시고 내쉬는 숨을 40분가량 급격하게 반복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그로 인해 전신에서 발생하는 강한 통증과 불쾌감을 반복적으로 관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방법은 매우 단순하지만 빠른 시간 안에 육체적․정신적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순룬 사야도는 이 기법을 스승의 지도 없이 혼자서 창안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태국의 프라 몽골 텝무니가 개발한 방법은 수정을 이용한 빛에 대한 관찰loka-kasina을 특징으로 한다. 이 방법은 담마까야Dhammakāya라고도 부르는데 청정도론에 제시된 빛에 대한 집중 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투명한 수정에서 발산되는 빛의 이미지에 지속적으로 집중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몸의 중심부에서 둥근 빛이 폭발하듯이 생겨난다고 한다. 이 방법에서는 바로 이것을 시발점으로 전체 18단계에 이르는 명상 과정을 제시한다. 수행자는 이러한 단계적 과정들을 체험해 나가면서 범속한 상태로부터 성인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한다. 한편 아찬 담마다로의 방법은 팔을 구부렸다가 펴는 반복적인 동작에 대한 관찰로 이루어진다. 이 방법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대념처경에 설해진 동작에 대한 관찰을 응용한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육체적 움직임에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몸을 구성하는 바람風의 요소를 지각케 하고 또한 그것에 수반되어 발생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을 포착케 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방법은 캄보디아의 마하고사난다Mahaghosanda에게 전수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김재성, 「태국과 미얀마 불교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1997; 김열권 옮김, 『위빠사나 열두 선사』, 1977 등). 이상과 같이 위빠사나의 다양한 실천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방법들은 사념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위빠사나가 진척되면 사념처의 네 가지는 엄격히 분리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즉 관찰의 힘이 커지면 눈․귀․코․혀․몸․마음의 감관에 와 닿는 모든 정신적․육체적 현상들을 기민하게 포착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때가 되면 사념처의 네 가지에 대한 구분은 의미를 잃는다. 어떤 특정 대상에 편중됨이 없이 몸․느낌․마음․법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위빠사나를 행할 수 있게 된다. 보이거나 들리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 ‘선택 없는 알아차림choiceless awareness’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는 “초보적 수행단계에서는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관찰을 해야 하지만, 수행이 진척되면 여섯의 감각 영역 전체로 관찰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는 “처음 수행을 해 나갈 때는 내puggala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수행을 오래 하다가 보면 법dhamma이 저절로 드러나 이끌어 준다.”고 언급한다. 관찰하는 대상을 제멋대로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모든 현상을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설명들에 비추어 볼 때 이상에서 언급한 각각의 기법들은 초보 수행자를 이끌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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