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禪定)에서 깨어나면 회향의 기도를 올립니다. 정진이 끝나고 나서도 보시 등의 다른 수행은 항상 같이 해나가야 합니다. 더불어 연기법(緣起法)과 공성의 양면성을 함께 이해하면서 해야 합니다.
여기서 공성이란 존재의 부정 즉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는 본래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중관(中觀)철학의 중도(中道)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나면 극단적인 견해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공성에 대한 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세속적인 인과(因果)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인과(因果)의 법칙에 대한 확신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성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물의 본래 성품이 공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정진이 끝나고 나면 공덕과 복덕의 자량을 쌓아야 합니다.
공덕의 자량은 관(觀, Vipaśyanā)의 수행을 보충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정(禪定)은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을 모두 성취한 것입니다. 즉 『대보적경보만보살회(大寶積經寶鬘菩薩會)』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애(慈愛)의 무기를 갖추고 대비심(大悲心)의 경지에 머무르며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을 모두 성취하기 위한 선정(禪定)을 행하라. 여기서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이라는 것은 보시(布施)와 멀어지지 않고 지계(持戒)와 멀어지지 않으며, 인욕(忍辱)과 멀어지지 않고 정진(精進)과 멀어지지 않으며, 선정(禪定)과 멀어지지 않고 지혜(智慧)와 멀어지지 않으며, 방편(方便)과 멀어지지 않는 것이니라.”라는 것 등을 널리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살은 모든 유정 중생을 모두 성숙시켜야 하며, 장소와 몸 그리고 많은 권속(眷屬) 등을 원만(圓滿)하게 하는 보시(布施) 방편(方便) 등의 선법(善法)에 확실히 의지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이란 공성을 직접 깨달은 지혜를 말합니다. 더불어 방편 수행이 그 지혜를 뒷받침해야 합니다. 즉, 보시 등의 다른 바라밀(婆羅蜜) 수행이 함께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완전한 부처의 깨달음은 오직 그에 맞는 적절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습니다.
보살들은 중생들을 돕는 큰 복덕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든 선행은 아주 힘 있고 효과적인 것입니다. 보살은 빠르게 부처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육바라밀(六婆羅蜜)의 수행을 방편삼아 열심히 정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국토(佛國土) 등의 원만(圓滿)함은 무엇을 말하며,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지혜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을 완전히 구족(具足)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세존께서도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는 방편의 구경(究竟)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도 역시 의지해야 합니다. 공성(空性)만으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집제법방광경(集諸法方廣經)』에서도 설하신 것처럼, “미륵이여, 보살들이 육바라밀(六婆羅密)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은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위한 것인 데, 이에 어리석은 이들이 말하기를, ‘보살은 지혜바라밀만을 익혀야 한다. 나머지 바라밀을 해서 무엇 하는가?’라고 말하며, 그들은 다른 바라밀 역시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미륵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륵보살이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보살행(菩薩行)을 할 때 육바라밀(六婆羅密)을 가지고 선근복덕(善根福德)을 쌓은 그 선근복덕들은 해로운 것인가?’ 미륵보살이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그대 역시 육십 겁(劫) 동안 보시(布施) 바라밀을 바르게 수행해 왔다. 육십 겁(劫) 동안 지계(持戒)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인욕(忍辱)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정진(精進)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선정(禪定)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지혜(智慧) 바라밀을 수행해 왔다.’ 이에 어리석은 이들이 말하기를, ‘한 가지 방법만으로 깨달을 수 있으며, 그것은 공성(空性) 수행이다.’라고 한다면, 그들이 행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라는 등의 [법]을 [널리] 펴셨습니다.
위의 구절들은 지혜와 방편을 함께 개발하는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보다 깊은 통찰력을 얻기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더불어 방편의 수행인 육바라밀(六婆羅蜜) 등도 함께 병행해야 합니다. 보살의 최종 목표는 모든 중생들과 함께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수행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결국 지혜와 방편의 합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방편(方便)과는 먼 보살의 지혜라는 것은 성문(聲聞)과 같아서 부처의 행상(行相:수행 행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즉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가섭이여, 이와 같으니 예를 들면 신하(臣下)가 뒷받침하는 왕들이 모든 목적을 이룰 수 있듯이, 보살의 지혜는 선교방편(善巧方便)에 의한 모든 도움으로 역시 부처의 모든 행상(行相)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살도(菩薩道)의 지견(智見: 진리에 대한 견해)과는 다른 외도(外道)와 성문도(聲聞道)의 지견(智見)은 ‘아(我: 개별적 본체)’ 등에 대한 전도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언제나 지혜와는 먼 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해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문(聲聞)들은 대비심(大悲心)과는 멀기 때문에 방편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열반에 들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보살도(菩薩道)는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주열반(無住涅槃)에 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시 한 번] 보살도(菩薩道)는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무주열반(無住涅槃)을 성취함으로서, 지혜의 힘으로 윤회에 떨어지지 않고 방편의 힘으로 열반에도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설상두정사경(佛說象頭精舍經)』에서, “보살도(菩薩道)를 요약하면 이 두 가지인 데, 둘이라는 것은 이와 같아서 방편과 지혜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佛說最上根本大樂金剛不空三昧大敎王經)』에서도, “지혜바라밀은 어머니이며, 선교방편(善巧方便)은 아버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에서도, “보살들에게 속박이란 무엇이며 해탈이란 무엇인가 하면, 방편이 없이 윤회 중생을 [애써] 모두 떠받치는 것이 보살의 속박이며, 방편으로 윤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 지혜가 없이 윤회 중생을 [애써] 모두 떠받치는 것이 보살의 속박이며, 지혜로 윤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 방편이 갖추어지지 않은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갖추어진 지혜는 해탈이다. 지혜가 갖추어지지 않은 방편이 속박이며, 지혜가 갖추어진 방편이 해탈이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보살이 지혜만을 의지하면 성문(聲聞)이 갈구하는 열반에 떨어져 속박당하는 것과 같아서, 무주열반(無住涅槃)에 드는 성취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편과는 먼 지혜를 보살의 속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추운] 바람에 얼어가는 사람이 불에 의지하는 것처럼 보살은 전도된 바람을 막고서, 방편을 가진 지혜인 공성(空性)에 의지해야 합니다. 성문(聲聞)과 같은 방식으로 깨달으려 하지 말고, 『대보적경대승십법회제구(大寶積經大乘十法會第九)』에서 설하신 것처럼, “선남자(善男子)는 이와 같아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불을 철저히 받들면서 그 불을 지극히 숭배하고 스승처럼 여긴다 하더라도, ‘나는 불을 숭배하고 스승처럼 여기며 받들고 있으니 여기 두 손에다 모두 담아야 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자신의 몸이 고통스럽거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 역시 열반을 알고 있지만 지니고 있는 열반을 드러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렇게 자신의 깨달음을 바꾸어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방편에만 단순히 의지한다면 보살은 범부(凡夫)의 경지를 뛰어 넘지 못하고 단지 속박만 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가진 방편에 의지해야 하는 데, 이것은 진언(眞言, Mantra)으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독(毒)처럼, 보살은 번뇌 역시, 지혜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 감로(甘露)로 변화시킵니다. 자연스럽게 상승적인 과보를 받는 방법이 보시(布施) 등에 의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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