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5온.12처.18계

[스크랩] 지관쌍수(止觀雙修, 정혜쌍수): 지혜와 방편의 합일 3

수선님 2017. 12. 17. 12:22

보살들은 지혜와 방편을 타고 납니다.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들은 자신들의 수행을 위해 세상에서 일하는 것을 극히 꺼려합니다.

 

그러나 보살들은 지혜와 방편을 가지고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며 그것을 최고의 수행으로 삼습니다.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일할 때는 몸과 말의 행위에 대한 엄격한 규칙에 너무 얽매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말씀하시기를, “가섭이여, 이와 같아서 예를 들면 진언(眞言)과 약(藥)으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독(毒)으로는 [어떤 것도] 죽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보살들의 번뇌는 지혜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것이기 때문에 전락(轉落)할 수가 없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 윤회를 포기하지 않으며, 열반에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지혜의 힘으로 모든 대상(所緣)을 끊고서 윤회에 떨어지지 않으며, 그래서 오직 무주열반(無住涅槃)만의 불성(佛性)을 성취합니다. 따라서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에서도, “지혜를 알고서 모든 번뇌를 완전히 제거한다. 방편을 알고서 모든 유정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유정 중생의 이익에 별 관심이 없으며 마음의 작용(行)이 화합(和合)하여 이루어진 모든 것에 대한 별 관심이 없는 것을 무상청정원만각(無上淸淨圓滿覺)이라고 나는 가르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성(佛性)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지혜와 방편 두 가지 모두에 의지해야 합니다.

보살들은 위대한 지혜를 타고 납니다. 따라서 번뇌는 그들에게 아무런 맥도 못 추며, 바라지 않는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지도 못합니다. 보살들이 지혜와 방편의 수행을 병행할 때는 윤회에 끌려 다니거나 열반의 기쁨에 안주하는 등의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중생들을 돌보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에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를 수행할 때나 깊은 정(定)에 들어 갈 때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 의지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전(前)과 후(後)에 생기는 지혜가 무엇이든, [그것이] 생기면 그때는 [언제든지] 방편에 의지할 수 있으니, 그렇게 지혜와 방편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적용해야 합니다.

공성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력인 지혜는 이원(二元)의 벽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입니다. 마치 물에 물을 붓는 것처럼 마음은 완전히 공성과 하나가 됩니다. 정진 중에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불가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방편과 지혜를 함께 수행해야 하는 바른 관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정진을 시작하기 전이나 끝나고 났을 때, 개인적으로 자비심이나 이타심 그리고 보시 등의 수행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지혜를 기르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더불어, 보살들이 지혜와 방편을 병행(竝行:雙修)하는 길이 이 길입니다. 모든 유정 중생을 보살피는 대비심(大悲心)으로 [스스로] 완전히 성숙(攝受)해서 출세간(出世間)의 길에 의지해야 하고, 일으킨 방편을 행할 때도 환술사(幻術師)처럼 전도되지만 말고 보시(布施) 등에 의지해야 합니다.

 

『대방등대집경제십이무진의보살품(大方等大集經第十二無盡意菩薩品)』에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보살의 방편은 무엇이며 지혜를 성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정(定, Samāhita: 人無我와 法無我의 空性을 보기 위한 선정)에 들어 유정 중생을 보살피면서 대비심(大悲心)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가까이 하는 것이 방편이며, 적정(寂靜)과 최고의 적정(寂靜)으로 정려(精慮, Samāpatti: 평등한 경지의 선정)에 드는 것이 지혜이다.”라고 널리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항마장(降魔章)』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더불어 보살들의 가행(加行: 적극적 수행)을 바르게 공경하는 것은, 지혜를 알기에 모든 선법(善法)을 쌓기 위해 가행(加行)하고, 지혜를 알기에 내가 없음(無我)과 유정이 없음과 생명이 없음과 생명의 유지가 없음과 사람이 없음(人無我)에 대해서도 가행(加行)하며, 방편을 알기에 모든 유정을 완전히 성숙시키기 위해 역시 가행(加行)하는 것이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집제법방광경(集諸法方廣經)』에서도,
“예를 들어 어떤 환술사(幻術師)가
[자신이 만든] 환(幻)에서 벗어나려고 애쓸 때,
그는 이미 환(幻)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환(幻) [자체에] 집착하지 않듯이,

삼계(三界)가 환(幻)과 같은 줄
구경보리(究竟菩提) 성인(聖人)은 아시나니,
중생을 위해 무장(武裝)하신 [뜻은]
중생을 그전부터 알기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살들이 오직 지혜와 방편의 법(法)을 성취한 힘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들의 가행(加行)이 윤회 속에 머물면서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마술사(魔術師)가 감옥에다 스스로를 가두는 마술을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마술사는 그 감옥이 마술에 의해 만들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집착이나 두려움 등의 다른 감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은 삼계(三界)의 환영(幻影)이라는 마술에 걸려 있는 모든 중생들을 보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환영과 같은 사물의 본래 성품이 공성인줄 잘 아시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든 중생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돌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성(空性)과 대비심(大悲心)의 정수(精髓:心要)를 가지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원만하게 회향(回向)하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승의(勝義:絶對)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앞에서와 같이 일정한 시간에 따라서 지(止)와 관(觀)의 가행(加行)을 가능한 만큼 수행해야 합니다. 『성소행경계원만청정경(聖所行境界圓滿淸淨經)』에서 언제나 유정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보살들의 공덕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처럼, 가까이 두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방편에 능숙해지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비(慈悲)와 방편(方便)과 보리심(菩提心)에 익숙해지면, 이 생에서 의심할 것 없이 특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꿈 속에서 언제나 불보살님을 친견(親見)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좋은 꿈들 역시 꿀 수 있습니다. 천신(天神)들도 기뻐서 보호할 것이며, 매 순간 마다 공덕과 지혜의 자량은 늘어만 갈 것입니다. 번뇌장(煩惱障)과 나쁜 과보 역시 정화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풍길 수 있으며, 몸도 역시 질병으로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업(業)에서 자유로워지는 수승함 역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통(神通) 등의 특별한 공덕(功德:屬性)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수행해 나갈 때는 항상,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이미 논의한 것처럼, 사물은 실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다.’라고 할만한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문을 염송(念誦)하고 절을 할 때도 환영과 같은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회향 역시 무아(無我)의 관점에서 해야 합니다.

공성의 의미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밀교의 수행에서도 중요합니다.

모든 종류의 선한 행위 속에서 공성을 기억하는 것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따라서 번뇌와 같은 모든 종류의 허물은 점점 줄어들고, 자비심 이타심 방편 등은 끝없이 자라납니다.

그렇게 신통력(神通力)으로 세간(世間)의 무량(無量)한 세계에 가서 불세존께 헌공(獻供)하고 당신들의 법(法)을 듣습니다. 임종시(臨終時)에도 의심할 바 없이 불보살님들을 친견(親見)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생에서도 불보살님과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특별히 성스러운 가문(家門)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할 수 있습니다.

 

큰 부(富)와 수많은 권속(眷屬)을 거느리며, 예리한 지혜로 수많은 사람을 모두 성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에서 [모든] 생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량없는 공덕을 다른 경전들에서도 보여주고 있음으로 [바르게] 터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비(慈悲)와 방편(方便)과 보리심(菩提心)을 항상 공경하고 오랫동안 수행하면 점차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이 완전히 모두 청정해지는 순간이 나타나 완전한 성숙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부싯나무(燧木)를 문질러서 불을 만드는 것처럼, 바른 이익을 위해 수행하면 최고의 구경(究竟)에 이를 수 있고,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로 일체의 분별(分別)의 그물에서 멀어져 법(法)의 틀을 희론(戱論)함이 없이 분명하게 알며, 티 없이(無垢) 흔들리지 않는 등불을 바람이 없는 곳(無風地帶)에 놓아 둔 것처럼, 흔들림 없이 알게 됩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본래 자성(自性)이 현전(現前)하는 견도(見道)를 포함한 승의(勝義:絶對) 보리심의 본래 성품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하여 사물의 끝자리를 보는 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여래의 종성(種姓:家門)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보살의 무결(無缺)함에 들어가는 것이며, 세간의 일체 중생에서 바뀌는 것입니다.

 

보살의 법성(法性)과 법(法)의 틀을 알고서 안주(安住)하는 것이며, 보살의 초지(初地)를 성취한 것으로 이에 대한 공덕은 더 자세하게 『십지경(十地經)』 등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여(眞如)를 바라보는 선정(禪定)이며,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가르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살이 희론(戱論)없는 무분별(無分別)의 성품에 들어간 것으로, 신해행(信解行)의 경지를 신해(信解)의 힘으로 들어갔음을 의미(安立)하는 것이지, 실제 행(行)은 아닙니다. [여기에] 지혜가 생겨나야만 실제 행(行)에 들어가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보면 자비심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이러한 마음을 방편의 도움으로 점점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지성을 갖추고 있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무언이 바른 것인지 또는 무엇이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지성의 힘 역시 궁극적인 실제에 대한 관찰의 힘으로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함께 정화(淨化)와 공덕 쌓기를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바른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궁극적인 진여(眞如)에 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점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실제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석적인 접근에는 또한 선정(禪定)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공성과 자비의 수행은 마음의 얼룩을 보게 하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더불어 일체지(一切智)의 상태를 성취할 수 있게 합니다.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수행한 다음, 지혜를 바탕으로 한 자비심이 일어나면 부처의 경지를 이루고 싶은 강한 동기가 생겨납니다.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한 이러한 동기가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스스로 보살이 되어 대승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것이 자량도(資糧道)입니다. 이것은 대(大) 중(中) 소(小)의 세 가지 수준의 깨달음 중에, 조그만 차원의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을 땅과 같은 보리심이라고 부릅니다.

 

보리심에는 21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보리심은 공성에 대한 지식과 자비심을 수행한 결과로 얻어집니다. 지(止, Śamatha)는 공성의 수행과 함께 해나가야 합니다. 수행에서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하면 그때 수행자는 가행도(加行道)에 들어선 것입니다.

수행은 지혜와 방편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물에 물을 붓는 것처럼, 이원(二元)의 얼룩을 지우고 진여(眞如)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공성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을 얻는 처음 순간이 바로 견도(見道)에 들어서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보리심과 바로 이어지며 대승에 길을 분명히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보살의 십지(十地) 중에 처음 성취하는 단계인 초지(初地)는 환희(歡喜)의 경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지는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운 경지입니다. 이전의 수행의 단계에서 나타나던 수행의 장애를 모두 극복하는 경지가 수도(修道)입니다.

수행의 장애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그때 수도(修道)를 성취합니다. 금강(金剛)과 같은 상태라고 불리는 수도(修道)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미세한 장애들까지 뿌리부터 완전히 제거됩니다. 따라서 출세간(出世間)의 일체지(一切智)가 생겨나 완전한 부처로의 대전환을 이룹니다. 이 경지가 바로 불도(佛道) 또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도(無學道)입니다.

이와 같이 초지(初地)에 들어간 다음, 수도(修道)에서 출세간(出世間)에서 얻은 두 가지 지혜(根本智와 後得智 또는 止觀)로 지혜와 방편을 수행하고, 점차로 수행하여 끊어야 하는 장애(障碍)가 미세하게 축적된 것 역시 미세하게 정화하며, 특별한 공덕(功德:屬性)을 더 깊이 성취하기 위해 하급(下級)의 수준들도 완전히 정화하여, 여래지(如來地)의 중심에 들어가 일체지(一切智)의 바다로 들어가게 되면, 목적한 바를 완전히 이루고 목표 역시 [완전히]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완전히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점차로, 보다 질 좋은 땅의 황금처럼, 마음을 확실히 정화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어 구경원만(究竟圓滿)한 완전청정(成佛)을 이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에 들어가면 여의주(如意珠)와 같이 일체 유정 중생의 생존을 떠받치는 공덕(功德:屬性)을 쌓고 지니며 이전(以前)에 [세운] 원력(願力:祈禱)의 과보를 받아 이룰 수 있습니다.

 

즉 대비심(大悲心)의 본성(本性)으로 돌아가, 본래 갖추고 있던 갖가지 방편을 가지고 한량없는 화현(化現)으로 일체 중생을 모두 원만하게 합니다. 습기(習氣)로 인한 잘못된 일체의 허물을 제거하고, 무한한 유정 세계에 머무시는 것을 알기에 불세존의 일체 공덕(功德:屬性)이 생긴 자리(根源)에 대한 신심(信心)을 일으키며, 그 공덕(功德:屬性)을 완전히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비밀주(秘密主)의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라는 것은 자비(慈悲)를 근본으로 하여 생긴 것이고, 보리심(菩提心)이라는 원인(因)에서 생긴 것이며, 방편(方便)으로 구경원만(究竟圓滿)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중한 까말라실라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먼저 세속과 궁극의 두 가지 진리인 이제(二諦)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수행의 과정에서는 지혜와 방편의 두 가지 자량(資糧)이 서로 조화롭게 뒷받침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결과, 두 가지 형태의 불신(佛身)인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얻는 것입니다.

 

부처의 일체지(一切智)를 한번 이루고 나면 모든 번뇌 망상과 장애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인간으로서 이 땅에 와서 더 이상 흔들림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무한한 신통(神通)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이 자유와 해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현자(賢者)는 질시(嫉視) 등의 허물을 멀리 하고
공덕(功德)에는 만족이 없어, 대양(大洋)과 같으니,
분별(分別)하고 잘 해석하여 파악함이
환희(歡喜)의 백조가 물에서 우유를 취하는 것 같네.

그러므로 지자(智者)들은
편견(偏見)의 혼란을 여의고,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잘 해설하나니
모두가 취(取)해야 할 것 뿐이로다.

이와 같이 중도(中道)를 설하노니,
내가 지은 공덕이 무엇이든
그렇게 일체 중생이
중도(中道)를 성취케 하소서.


출처 : 菩 提 心
글쓴이 : 무인아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