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다
마성스님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다.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서 “눈이 생기고, 통찰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과학적 지식이 생기고, 빛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초기경전에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 대해서“티끌 없고 더러움이 없는 진리의 눈(法眼, dhamma-cakkhu)을 떴다. 그는 진리를 보았고, 진리에 도달했고, 진리를 알았고, 진리를 파악했으며, 의혹을 건너서 흔들림이 없다.”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사성제(四聖諦), 연기법(緣起法), 무아설(無我說) 등을 일컫는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사성제, 연기법, 무아의 이치를 터득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은 ①잘 설해져 있음, ②지금 이곳에서 경험될 수 있음, ③시간을 지체하지 않음, ④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 ⑤열반으로 이끌어 줌, ⑥현명한 사람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은 ‘지금 여기서’ 누구나 곧바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초기불교 교단에서 꼰단냐, 밥빠,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 등 다섯 비구는 녹야원에서 붓다로부터 <전법륜경>과 <무아상경>을 듣고 곧바로 깨달았다. 그리고 야사를 비롯한 그의 동료 50명도 붓다의 법문을 몇 차례 듣고 곧바로 아라한이 되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빔비사라왕과 11만 명의 대중들이 붓다의 사제(四諦)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먼지와 때를 여윈 법안(法眼)을 얻었다고 율장(律藏) 대품(大品)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다. 즉 세계와 인생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인 것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깨달음은 신비화된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 말한 ‘진리에 대한 눈뜸’이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된다(成佛)’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깨달음은 다겁생을 통한 수행의 결과라거나, 범부들은 감히 접근할 수도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깨달음은 일부 선수행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이미 세뇌되어 버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부처가 된다’는 것이 실현 가능한 일인가? 오히려 교만한 생각은 아닐까?
그런데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깨닫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한 순간에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깨달음에 대한 한탕주의와 도통주의가 만연해진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은 깨달으면 기적이나 신통을 마음대로 불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깨닫기만 하면 무식한 사람이 곧바로 유식해지고, 각종 외국어도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진리에 눈을 떴다고 해서 배우지 않은 역사적 지식을 알거나, 한글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곧바로 논문을 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서 무명(無明)은 사성제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라고 설해져 있다. ‘깨달음’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 실체를 쫓아다니는 것은 무지(무명)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무지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수행의 목적이 깨침에 있다고 보는 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깨달음의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에 있다고 본다. 붓다는 <증지부경전>에서 “내가 가르치는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말했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괴로움에서의 해탈이라는 마지막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를 완전히 끊어버려야 하는데, 그 길이 바로 팔정도(八正道)라는 것이다. 한편 <대념처경>을 비롯한 염처계(念處系) 경전에서는 ‘깨어 있음’의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았다. 그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의 특징은 ‘알아차림’에 있다. 즉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꿰뚫어 봄으로써 삶에 만연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기불교의 수행법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수행의 결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종착점이 아니라 진리 구현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즉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눈뜸’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수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행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깨달음을 목적으로 보기보다는 수단으로 보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사실 깨달음과 수행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수행도 삶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수행을 떠난 삶도 온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수행의 일상화, 일상의 수행화가 바른 불자의 삶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삶의 현장에서 실현할 수 없는 공허한 언어의 나열이나 삶과 유리된 외침은 한낱 헛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성불’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눈높이를 낮춰 ‘정진’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수행이 고통이 아니라 그 자체가 행복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불교도 사이의 인사법도 ‘성불합시다’에서 ‘정진합시다’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붓다는 완전한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를 성취한 뒤에도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붓다는 혼자서 종종 숲속에 들어가 보름, 혹은 한 달 동안 명상에 전념하기도 했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음식도 먹지 않고, 배설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붓다께서도 육체를 갖고 있는 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물을 섭취해야만 했으며, 육체적 고통도 감수해야만 했다. 깨달음 이후에도 생명 활동은 계속된다.
어느 한순간 깨달았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식물인간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성자, 즉 아라한일지라도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사유, 느낌, 감각적 인상 등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 다만 깨달은 자는 존재의 특성, 즉 그것이 일어나고 머물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뿐이다. 아라한은 선(善)이나 악(惡), 혹은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업(業)을 짓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을 “나의 생(生)은 이미 다했고, 범행(梵行)은 이미 확립되었으며, 할 일도 이미 마쳤다. 다시는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수증론(修證論)’이라고 부른다. 이 수증론은 그 사람의 능력과 근기,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비록 부처님이 직접 제시한 것일지라도 자신의 근기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올바른 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느 한 가지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선수행(禪修行)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에는 수많은 수행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어느 길이든 올바르게 따르기만 하면 동일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떠한 수증론일지라도 교학과 수행 혹은 이론과 실천(의례 포함)이 서로 일치해야만 모순 없이 목적지에 빨리 도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위빠사나 수행자가 밀교의 <보리도차제론>을 따른다거나 법화행자가 화엄의례를 봉행한다면, 이론과 실천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한마디로 이론과 실천이 합치될 때 비로소 공부의 진척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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