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편의 명구

[스크랩] 유현(幽玄)

수선님 2018. 11. 25. 12:36

유현(幽玄)


바람이 부니 물소리 베개 맡에 들려오고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창 앞에 이른다.


風送水聲來枕畔  月移山影到窓前

 풍송수성래침반    월이산영도창전


- 지홍 선사

 

 

   어떤 사람이 지홍(智洪) 선사에게 선의 미묘함에 대하여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미묘하기 그지없다. 바람 소리 타고 귓전에 들려오는 개울 물소리를 듣는 정적은 고요의 극치다. 달이 조금씩 기울 때마다 옮겨가는 산 그림자가 어느덧 창 앞에 이른 것을 감지하는 그 섬세한 관찰은 선심(禪心)의 그윽하고 유현함을 다한 것이다. 선심의 고요함이란 꽉 막혀서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가녀린 바람결에 실려 오는 개울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요함이다.


   보살은 설산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으면서 코끼리가 갠지스강 건너는 물소리를 역력히 듣는다고 한다. 선객은 선방에 앉아 좌선을 하면서 마당에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다 들어야 한다. 몇 마리가 기어가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 그쯤 되어야 선정의 고요함이라 할 수 있다. 선인(禪人)에게는 온 우주가 모두 선천선지(禪天禪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빛이 물속을 스며들어도 그 흔적이 보이지 않고, 대 그림자가 뜰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어찌 보면 귀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귀신들의 일 같지만 선을 하는 마음은 이렇게 투명하다. 달이 기울어가니 산 그림자 창 앞에 이른 것을 환하게 볼 수 있는 것도 혼몽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꿈속의 일이다. 앉기만 하면 망상과 혼침으로 시간을 죽이는 그런 생활로는 꿈속의 일이 아니라 꿈에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극도의 정적과 깊고 유현한 선심이 잘 드러난 시다.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②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너럭바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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