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스크랩] 25. 華嚴經(화엄경)

수선님 2018. 12. 2. 11:52


남쪽으로 밀리던 피난길의 종착지 부산, 거기에 임시 수도가 있었다.
 
6.25의 민족 대수난을 겪는 것은 스님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스님들이 큰 회상을 이루었으니 그곳이 선암사 선방이었다. 여법한 청규는 서릿발처럼 엄했고, 용맹정진하는 모습은 일찍이 볼수 없었던 장관이었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행자교육은 법다웠다. 경전을 읽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요, 밤이나 낮이나 면벽관심하는 수선생활이었다. 어떤 청복을 지었길래 청중스님네를 따라서 공부할 수 있었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추억이다. 그때 은사스님이 주신 <화엄경> 행원품의 얄팍한 전적을 받은 것이 <화엄경>을 대하게 된 첫인연이었다. 그런데 몇장을 읽어보니 흡사 전에 읽어 본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철저한 불립문자를 표방하던 그 환경에서 왜 행원품을 읽어보라고 권해주시었던지, 모를 일이다.

 

나는 그때부터 행원품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다름아닌 나자신이라고 느껴지고, 그 실천을 위해서 물이 흐르듯이 살아오게 되었다.

 

<화엄경>은 대승경전 중에서도 교학적, 사상적으로 불교의 핵심을 가장 깊게 담고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의 약칭으로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되어있던 것을 4세기경에 집대성했다. 한역에는 6본이 있으나 지금은 3본만 전해오고 있다. <60화엄> <80화엄> <40화엄>이 그것이다. 특히 <화엄경>의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보살에서 외도에 이르기까지 53인의 선지식을 찾아 구도하는 과정을 묘사해 정진이 곧 불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만나는 선지식 중에는 보살만이 아니라 비구(니) 의사 장자 바라문 창녀등 갖가지의 직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있다. 이는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보리심의 유무가 문제라는 대승불교의 수도(修道)의 이상(理想)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우리 한국불교는 여명을 알리는 아침 종송(鍾頌)이 <화엄경>으로부터 시작하고 모든 의식이 집행될 때에 신라 의상스님이 지으신 법성게로 회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화엄경>으로 시작해서 <화엄경>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의식은 종교의 생명이라고 볼 때, 한국불교에 있어서 <화엄경>은 매우 중요한 경이 아닐 수 없다. 강원의 커리큘럼에는 <초심문>으로 시작해서 <화엄경>으로 마치게 된다. 그리고 한국의 세계적인 명산 금강산의 산 이름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모두가 <화엄경>에서 유래한 명명임을 알 수 있다. 즉 <80화엄경>의 보살주처품에 나오는 법기보살이 천이백 대중과 함께 설법하는 도량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한다. 한국인은 자연에다 인간의 위치를 정하고 자연과 동화하고 나아가 탄토건곤하는 활달한 심성을 가꾸어 온 것이다.
 
<화엄경>과 관계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도 한량이 없다.
 
진역 <화엄경소>를 지어가시던 원효스님은 십회향품에서 절필하시고 다음과 같이 설파하셨다.
 
“봉황이 푸른 구름을 타고 올라 산악의 낮음을 내려다봄과 같이 하백(河伯)이 넓은 바다에 이르러 좁았던 시냇물을 회상하는 것처럼 배우는 자가 <화엄경>의 문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배웠던 것이 확 트이는 공부가 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화엄경>은 모자람 없이 완전한 진리의 세계가 공간적으로 꽉 차고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쳐 한량없는 중생들을 교화하는 지극한 법도와 궁극의 표준을 이루었나니 그 뜻을 들어 표제삼아 <대방광불화엄경>이라 한다”라고 설파했다.
 
그리고 설잠스님(매월당 김시습)은 “보지 못하였는가, 화엄법계의 티끌 하나하나에서 법계를 본다고 하였음을, 여러분은 대체 보고 있는 것인가. 지금 이 자리 산승의 염주위에 십종현문이 열려 있고, 진법계가 드러나 있음을,… 세존은 7처에, 나는 단지 여기 1처일 뿐이요, 세존의 9회에 나는 단지 1회일 뿐이요, 세종의 경을 설한 것이 80권임에, 나는 단지 일구(一句)일 뿐이다”라고 선적인 회통을 했다. 
 

김지견/대한전통불교연구원장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