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2-(4)
오존층이 파괴되고, 물이 오염되어, 우리는 그것을 먹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다시 말해 자살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바로 내 육신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나다’. ‘내 것이다’ 라는 관념은, 이처럼 고정된 실체로서의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일체가 이처럼 함께 돌아가는 세상 그 자체가 바로 ‘나’인 이 마당에 ‘나다’, ‘너다’를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는, 주어진 시간, 공간의 조건에 의해 ‘말미암아서 일어난 존재’인 것입니다.
과거 엄마 배속에서 태어날 때의 나와, 중학교 때의 나, 대학 때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다릅니다. 조건이 바뀌었고, 환경이 바뀌었고, 내 육체의 세포 하나 하나가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며, 우리의 생각, 사유(思惟)하는 것에도 많은 차이가 있고, 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업력(業力)에도 변화가 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나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처럼 연기하는 존재이기에 항상 변화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항상하는 것이란 전혀 없습니다. 연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이고, 일체개고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생로병사하며, 일체는 생주이멸하고, 우주는 성주괴공’ 한다고 하는 것이 그 바탕의 성질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나’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나’일까? 앞에서 말했듯이, 남을 뺀 나, 주위의 조건, 환경을 뺀 나가 아니라, 나와 일체만유(一切萬有)가 함께 돌아가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나다’ 라는 상(相)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일체와 둘이 아닌 일체(一切)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이렇듯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경계, 나를 포함한 일체 형상세계가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 꿈과 같은 인연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만유 전체가 인연의 화합이니, 여기에 무슨 차별이 있고, 불평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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