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하나 꿰뚫어
지금까지 공성연기(空性緣起)인 일법계(一法界)의 세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가 부처님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세계는 말이나 생각으로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말과 생각으로 부처님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 없이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갖는 한계를 여실히 알지만 또한 그것이 우리 일상에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과 생각이 비록 부처님의 세계인 진제(眞諦)를 나타내기에는 부족하지만 부처님세계에 이르기까지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말과 생각이 훌륭한 방편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생각의 방편을 빌려서 나타낸 부처님의 세계는 어쩌면 중생의 수만큼이나 많을지도 모릅니다. 말과 생각이 그 낱낱에 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업(共業)의 사회생활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의 미묘한 차이는 별업(別業)으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엄의 부처님세계는 일법계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동시에 모든 중생과 사물의 얼굴 그대로 낱낱 부처님이 중중무진으로 겹쳐 있는 세계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이 무한히 겹쳐 있으면서 연기실상인 비로자나 부처님 세계를 펼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중중무진으로 겹쳐 있되 낱낱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무한한 부처님을 화엄에서는 완전수를 나타내는 10을 써서 10불(佛)이라고 합니다. 10불은 곧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냅니다.
부처님하면 역사적인 부처님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떠얼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신 이후에는 부처님의 법을 부처님의 몸으로 대신하니 오분법신(五分法身 : 계, 정, 혜, 해탕, 해탈지견) 등이 그것입니다. 나아가 화엄에서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는데 연기실상의 법(法)을 부처님으로 모신 경우입니다. 그러면서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이 있게 됩니다. 모든 중생과 낱낱의 사물이 그대로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이루고 있는 경우는 화엄의 법신사상입니다. 연기법이 법신 부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이란 정적(靜的)인 상관관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나타내게도 하고 없게도 하는 등 끊임 없는 변화의 동성(動性)을 동시에 뜻합니다.
이 동성의 나툼이 모든 중생과 낱낱 사물의 모습인데 이들이 곧 부처님의 지혜 덕상ㄴ(德相)입니다. 모든 모습이 제 모습이면서 동시에 모든 모습일 수 있는 상즉상입의 공능(功能)을 보신(報身)이라고 합니다.
법신, 보신의 두 분 부처님께서 낱낱의 얼굴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나타나 있으니 이를 화신(化身)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낱낱에서 보면 화신으로 제 모습이지만 이 모습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법신과 보신입니다.
이 관계를 앞서 일(一)과 다(多), 일념(一念)과 무량겁(無量劫)의 즉(卽)과 중(中)의 관계로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이 바로 삼신의 모습 그대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의 모습을 떠나서 삼신이 있다고 하면 불교 이외의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삼신불이기 때문에 낱낱의 제 모습만으로 자기를 삼는다면 진정한 제 모습을 잃고 맙니다.
그러면 삼신불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대원력의 자비행입니다. 이런 중생을 보살이라고 부르며 보현보살이 그 대표입니다. 그러나 보현보살이라고 해서 낱낱 중생을 떠나서 저 멀리 훌륭한 모습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 중생의 활동이 보현보살의 모습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지혜덕상이 언제 어디서나 자비로움으로 나투는 화신 부처님의 행동이 보살의 원력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부처님의 세게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의 모습으로 중생세간에 있겠다고 원력을 세운 분을 보살이라고 하여 부처님과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보살의 모습이 곧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 열반의 세계인데 보살은 이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습, 곧 열반을 구하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부처님의 바른 모습입니다. 이것은 <능가경>에서 보살이 열반을 구하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열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를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공 그대로 색[空卽是色]이라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세계를 완전히 구현했으면서도 중생들을 위하여 현상의 세계에서 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분 보살님들께서는 중생과 같은 생상의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니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 그대로 공[색즉시공]의 모습으로 모든 번뇌를 떠나 있습니다. 보살이란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色卽是空]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空卽是色] 분으로 언제 어디서나 자유로운 가운데 삼신불의 모습을 그대로 나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열반조차도 취착(取着)하지 않는 수행자의 모습이 곧 삼천대천 세계를 가득 채우는 부처님의 지혜덕상이니 이를 큰사람이라고 합니다. 큰사람이란 크다 작다로 서로 비교되는 가운데서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대승(大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대승의 뜻을 원효스님께서는 <대승기신론소> 첫머리에 '낱낱의 모습으로 나투면서도 고요하고, 우주에 기득 찼으면서도 텅 비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화엄연기의 일법계(一法界)가 바로 대승의 세게이며 이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큰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게송 앞까지 말한 화엄의 가르침이 부처님과 보살과 큰사람의 경계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생각을 이어서 알아차려야 할 것은 부처님과 보살이 모든 중생 밖에 있는 어떤 위대한 분들을 가ㅣ키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자비를 행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엄의 상즉상입의 세계는 불보살의 경계일 뿐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생각생각마다 텅 빈 모습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여실히 살펴, 나라는 것이 허망한 분별에 의해서만 있음을 분명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빈 모습 속에 나투는 지혜덕상의 부처님세계가 보리심이며 대원력이니 10불(佛)은 보리심을 말하고 보현보살은 대원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사는 모습을 할 수 없이 말로 나타내서 큰사람의 경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보리심(菩提心)과 대원력심(大願心力)은 삼신 부처님의 근본이며 아울러 중생의 생명을 이루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때문에 화엄에서는 중생과 부처와 마음이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연기법계의 지혜덕상은 마음이 나툰 것이며 이 모습 그대로 부처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도 찾을 수 없고 법을 알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떠나 법을 찾는 순간 우리는 법의 본성을 놓치고 비로자나불의 세계도 잃게 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마음자리의 본성을 보는 것만이 모든 중생과 사물의 본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문(禪門)의 조사이신 달마대사께서도, '마음 하나를 꿰뚫어 아는 것 그대로가 모든 중생과 사물을 다 아는 것이다[觀心一法 總攝諸行]'라고 하셨습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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