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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한 비구들이여, 비구는 법, 곧 여섯 가지 안과 밖의 대상에 대하여 법을 관찰하고 머문다.
그리하여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법, 곧 여섯 가지 안과 밖의 대상에 대하여 법을 관찰하고 머물 것인가? 이에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을 알고 색을 알고 또한 그 둘에 의지해서 생긴 결과임을 안다. 그리하여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또한 이미 생한 결과가 없어지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또한 이미 없어진 결과를 미래에도 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
또한 귀를 알고, 소리를 알고 또한 그 둘에 의지해서 생긴 결과임을 안다. 그리하여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또한 이미 생한 결과가 없어지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또한 이미 결과가 미래에도 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
코를 알고, 향기를 알고 또한 그 둘에 의지해서 생긴 결과임을 안다. 그리하여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일어가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또한 이미 생한 결과가 없어지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또한 이미 없어진 결과가 미래에도 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
혀를 알고, 맛을 알고 또한 그 둘에 의지해서 생긴 결과임을 안다. 그리하여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또한 이미 생한 결과가 없어지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또한 이미 없어진 결과가 미래에도 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
몸을 알고, 접촉을 알고 또한 그 둘에 의지해서 생긴 결과임을 안다. 그리하여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또한 이미 없어진 결과가 미래에도 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
뜻을 알고, 법을 알아서 그 둘에 의지해서 생기는 결과임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생기고 있는 그대로를 알고, 또한 이미 없어진 결과가 미래에도 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법에 대하여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밖으로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안팎의 모든 법에 대하여 법을 관찰하여 머문다.
혹은 법에 대하여 생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법에 대하여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법에 대하여 생하고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문다.
또한 지식으로 안 것과 잊지 않고 기억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법이 있다.'고 생각하여 나타내면 의지함이 없이 머물고,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에 대하여 관찰하여 머문다.
해설 안으로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의 기능, 밖으로 이들의 대상이 되는 물질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경계 등의 열두 가지는 모두 법의 범주에 속한다. 불교에서는 전자를 육근(六根), 후자를 육경(六境)이라 하고, 합해서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른다.
이러한 안과 밖의 존재들을 관찰함으로써 안과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변천하여 없어지는지를 알게 된다. 눈은 볼 사물이 없으면 존재 의의가 없다. 볼 물질 세계가 있으므로 눈이 존재하는 것이다. 귀는 소리가 있어 존재하며 코는 냄새, 혀는 맛, 몸은 감촉, 마음은 경계를 대상으로 하여 존재하는 것이니, 안의 여섯은 그대상인 밖의 여섯과 어울려 그 결과로써 존재하게 된다.
있게 된 것과 없어지는 것도 이들 안고 밖의 인연에 의한 것이요, 없던 것이 있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 앞으로 존재하게 될 것, 지금은 존재하지만 장차 없어질 것 등의 모든 존재는 안과 밖의 이것과 저것의 관계 속에 있다. 곧 인연에 의해서 있고, 인연에 의해서 없어진다.
이 열두 가지의 상호 연관에 의해서 현실의 괴로움이나 즐거움도 존재하는 것이니, 괴로움의 조건을 없애면 괴로움이 없어지며, 즐거움도 그 조건을 없애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눈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눈에 대해 알아차리면, 눈이 어떤 것을 보고 있으며 그 보는 행위는 대상이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대상이나 눈이 없으면 '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소리를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맛을 아는 것도, 냄새를 맡는 것도 그렇다. '괴롭다'는 것도 마음이 있고 마음의 대상인 경계가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경계가 없고 마음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그러므로 '괴롭다' '즐겁다'는 느낌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공이요 연기의 도리에 의한 것이며, 가현(假現)된 것임에 지나지 않는다.
눈을 관찰하는 것은 눈에서 눈의 대상을 보고, 그것이 생하고 멸하는 것까지 꿰뚫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눈에 머물러서 눈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눈이 법 그대로 보인다. 다른 것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의 대상을 동시에 보고, 그들의 연기 관계를 보아서 생하고 멸하는 것까지 꿰뚫어보아야 한다. 지금 있는 법을 통해서 있어야 할 법을 보고, 없어질 법을 보는 것이다. '관찰하여 머문다.'가 바로 이런 뜻이다. 마음으로 실상을 보는 것이 관찰이다. 관찰하여 머물면 법 그대로 있게 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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