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마(辨魔) :
공부하는 데는 마군의 장난이나 공부가 바로 되고 잘못됨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도가 높아지면 마(魔)가 성한다. 마음이 밝아지고 삼매를 이루게 되면 스스로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난다. 경계는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공부를 방해하고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마군의 장난이나 삼매력에 상응하는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에 구하는 것이 있거나 망념이 잠복되어 있을 때, 혹은 경계를 대하여 마음에서 희한한 생각을 갖거나 그 경계를 인정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의 나타남이다.
밖으로 마의 장난이 온다든가, 정력(定力)에 상응하는 기이하고 수승한 경계가 나타나는 데에 관하여는 능엄경에 상세하다. 이러한 경계를 집착하면 공부가 퇴실한다. 경계가 나타나는 이유를 알아야 그에 대한 분명한 대책도 서는 것이니 공부인은 魔를 잘 분별하고 대책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선경계나 악경계는 그에 대한 마음에 있다.
첫째, 마음이 어느 정도의 정(定)을 이루었을 때 그에 상응한 경계가 벌어진다. 정을 이루었을 때의 정의 핵심인 공부가 (예, 화두) 분명치 않고 촛점을 잃었을 때 경계가 벌어지는 것이므로 오로지 공부만 면밀하게 지어가면 일체 경계가 나타날 틈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공부인이 마음에 구하는 것이 있거나 망념이 있으면 경계가 벌어진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일체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도 깨치기를 구하거나 불조 만나기를 바라거나 도가 현저하기를 기다리거나 하는 마음이 마를 부르는 초청장인 줄을 알아야 한다. 셋째는 마음이 본래로 형상이 없는 것을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법은 마음에서 일어남이요,일심이 본래 형상이 없거늘 도문(道門)에 어찌 가히 나타날 경계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이 도리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에 경계가 나타났다는 자는 공부인의 마음자세에 허점이 있거나 공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단 알아 두어야 한다. 경계가 벌어지거든 공부가 곁길로 나간 것을 곧 깨닫고 오직 본참공부를 향하여 마음을 돌려 면밀하게 지어가야 한다. 그러면 온갖 경계는 제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고 공부는 더욱 깊게 나아가게 된다. 공부는 오직 지어갈 줄만 아는 이것이 요긴한 것이다. 대체로 공부를 방해하는 선악경계는 세 통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요, 둘째는 귀에 들리는 것이요, 셋째는 마음에 알려오는 것이다. 공부인이 이런 경계를 만나거든 모두가 다 아니라고 관하여야 한다. 아무리 경계가 수승하고 미묘법문을 설해오더라도 모두가 마경계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가 벌어지는 원인이 자신의 마음에 샘(漏), 즉 망념의 뿌리가 남아 있어서 그런 줄을 알고 마음을 크게 돌이켜 오직 공부에만 면밀하고 힘있게 파고 들어야 한다. 이런 때가 가히 지혜와 용맹심을 시험해 볼 만한 호시절이다.
호지(護持) :
좌선 할때의 마음 상태를 어느 때나 끊임이 없도록 잘 지켜야 한다. 좌선에서 일어서 포행할 때와 같이 선실에서 나와 밖을 거닐더라도 항상 좌선하는 마음 상태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서 나올 때는 조용히 몸을 움직이도록 하고 갑작스레 일어서면 안 된다. 자각 선사는 "어린아기를 다루듯이 하라"고 하였다. 또 자각선사는 정력(定力)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원각경에도 "걸림이 없는 청정한 지혜는 모두가 禪定에서 생긴다" 하였다. 그런데 여기 정력이라 한 것에 대하여 한갖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생각을 끊은 상태로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여기의 정력은 좌선시의 고요하고도 말끔하고 또렷한 마음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상태에서 지혜의 눈이 열리고 자성의 도를 보게 된다.
원래 참선법문은 습정(習定)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견성(見性)을 말하고 철견(徹見)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원래로 습정이나 좌법이나 호흡법이라는 것이 논할 여지가 없다. 다만 말끔한 바른 눈초리에서 비로소 자성을 매(昧)하지 않는 것이므로 초참자에게 바른 눈을 열도록 좌선의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다. 선실에서는 공부하다가 선실에서 빠져 나오면 곧 망상과 잡사에 내맡기고 또 잠시 좌선하다가 다시 혼침산란에 빠져 든다면 이런 공부로는 횃불을 눈에 들어대도 마침내 불을 못 볼 것이다. 옛 조사가 이르기를 참선은 "닭이 알을 품듯이, 고양이가 쥐굴을 노리듯이, 늙은 쥐가 궤짝을 썰듯이 하라."고 하였으니 미루어 護持의 뜻을 알아야 한다.
공부하는 데는 마군의 장난이나 공부가 바로 되고 잘못됨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도가 높아지면 마(魔)가 성한다. 마음이 밝아지고 삼매를 이루게 되면 스스로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난다. 경계는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공부를 방해하고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마군의 장난이나 삼매력에 상응하는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에 구하는 것이 있거나 망념이 잠복되어 있을 때, 혹은 경계를 대하여 마음에서 희한한 생각을 갖거나 그 경계를 인정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의 나타남이다.
밖으로 마의 장난이 온다든가, 정력(定力)에 상응하는 기이하고 수승한 경계가 나타나는 데에 관하여는 능엄경에 상세하다. 이러한 경계를 집착하면 공부가 퇴실한다. 경계가 나타나는 이유를 알아야 그에 대한 분명한 대책도 서는 것이니 공부인은 魔를 잘 분별하고 대책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선경계나 악경계는 그에 대한 마음에 있다.
첫째, 마음이 어느 정도의 정(定)을 이루었을 때 그에 상응한 경계가 벌어진다. 정을 이루었을 때의 정의 핵심인 공부가 (예, 화두) 분명치 않고 촛점을 잃었을 때 경계가 벌어지는 것이므로 오로지 공부만 면밀하게 지어가면 일체 경계가 나타날 틈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공부인이 마음에 구하는 것이 있거나 망념이 있으면 경계가 벌어진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일체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도 깨치기를 구하거나 불조 만나기를 바라거나 도가 현저하기를 기다리거나 하는 마음이 마를 부르는 초청장인 줄을 알아야 한다. 셋째는 마음이 본래로 형상이 없는 것을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법은 마음에서 일어남이요,일심이 본래 형상이 없거늘 도문(道門)에 어찌 가히 나타날 경계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이 도리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에 경계가 나타났다는 자는 공부인의 마음자세에 허점이 있거나 공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단 알아 두어야 한다. 경계가 벌어지거든 공부가 곁길로 나간 것을 곧 깨닫고 오직 본참공부를 향하여 마음을 돌려 면밀하게 지어가야 한다. 그러면 온갖 경계는 제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고 공부는 더욱 깊게 나아가게 된다. 공부는 오직 지어갈 줄만 아는 이것이 요긴한 것이다. 대체로 공부를 방해하는 선악경계는 세 통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요, 둘째는 귀에 들리는 것이요, 셋째는 마음에 알려오는 것이다. 공부인이 이런 경계를 만나거든 모두가 다 아니라고 관하여야 한다. 아무리 경계가 수승하고 미묘법문을 설해오더라도 모두가 마경계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가 벌어지는 원인이 자신의 마음에 샘(漏), 즉 망념의 뿌리가 남아 있어서 그런 줄을 알고 마음을 크게 돌이켜 오직 공부에만 면밀하고 힘있게 파고 들어야 한다. 이런 때가 가히 지혜와 용맹심을 시험해 볼 만한 호시절이다.
호지(護持) :
좌선 할때의 마음 상태를 어느 때나 끊임이 없도록 잘 지켜야 한다. 좌선에서 일어서 포행할 때와 같이 선실에서 나와 밖을 거닐더라도 항상 좌선하는 마음 상태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서 나올 때는 조용히 몸을 움직이도록 하고 갑작스레 일어서면 안 된다. 자각 선사는 "어린아기를 다루듯이 하라"고 하였다. 또 자각선사는 정력(定力)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원각경에도 "걸림이 없는 청정한 지혜는 모두가 禪定에서 생긴다" 하였다. 그런데 여기 정력이라 한 것에 대하여 한갖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생각을 끊은 상태로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여기의 정력은 좌선시의 고요하고도 말끔하고 또렷한 마음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상태에서 지혜의 눈이 열리고 자성의 도를 보게 된다.
원래 참선법문은 습정(習定)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견성(見性)을 말하고 철견(徹見)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원래로 습정이나 좌법이나 호흡법이라는 것이 논할 여지가 없다. 다만 말끔한 바른 눈초리에서 비로소 자성을 매(昧)하지 않는 것이므로 초참자에게 바른 눈을 열도록 좌선의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다. 선실에서는 공부하다가 선실에서 빠져 나오면 곧 망상과 잡사에 내맡기고 또 잠시 좌선하다가 다시 혼침산란에 빠져 든다면 이런 공부로는 횃불을 눈에 들어대도 마침내 불을 못 볼 것이다. 옛 조사가 이르기를 참선은 "닭이 알을 품듯이, 고양이가 쥐굴을 노리듯이, 늙은 쥐가 궤짝을 썰듯이 하라."고 하였으니 미루어 護持의 뜻을 알아야 한다.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CD굽던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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