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신선하다. 최경아/위덕대 강사
종교의 세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붓다의 초월적인 모습보다는 팔리경전을 통해 나타나는 그의 인간적 풍모에 더 많은 친밀감을 느낀다. ‘권능’이니 ‘절대’니 하는 수식어 보다는 ‘고뇌’라는 실존적인 명제가 보다 피부에 와닿는 그런 성향의 중생이기 때문인가 보다. 실제로 팔리경전에 나타나는 붓다의 모습은 형이상학의 부질없음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스스로 신이기를 거부하는 당찬 인간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가 설한 가르침 또한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연민하는 따스한 인간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러한 경향은 붓다가 주인공이 아닌 팔리경전에서도 나타난다.
그 가운데 <장로니게>라는 일종의 시집과도 같은 경전이 있다. 장로니란 학덕이 높고 연륜이 있어 대중의 존경을 받는 비구니를 말한다. <장로니게>는 바로 그러한 비구니들의 자기 고백적 노래로서, 당시 인도의 사회상까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은 1게(偈)로만 이루어진 시송으로부터 시작해 2게, 내지는 70여게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게를 그 수에 따라 분류하여 1게만을 남긴 장로니의 게를 모아 1집이라고 하고, 2게는 2집, 3게는 3집, 이런식으로 70여게의 것을 대집으로 편찬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으로서 애환과 깨달음을 향한 의지 등을 시로써 전달하고 있는 <장로니게>는 그 시가 지닌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인도 서정시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각 게송의 주인공은 모두 유명한 비구니로서, 이들 가운데 다수가 깨달음을 성취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성의 성불에 인색했던 대승불교에 비하면 당시의 승가가 오히려 진보적이었음을 증명하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장로니게>에는 모두 73명의 비구니 이름이 보인다. 이들의 출신성분을 보면 왕가 출신이 23명, 부호 출신이 13명, 바라문 출신이 18명, 그리고 다른 계급 출신이 4명, 창녀가 4명,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11명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이 상류계급이지만, 창녀도 4명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얼마나 열려있는 종교였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장로니게>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세속에서 평탄한 삶을 영위한 이는 별로 없는 듯하다. 어머니와 딸이 함께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야 했던 기구한 사연을 비롯해,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나 번번히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여인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그들은 결국 출가하여 자신의 그러한 불행이 전생의 악업에 의한 과보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힘겨운 삶을 등지고 출가한 비구니들은 모두 육체와 애욕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그러나 글들의 고백은 한탄이 아니다. 그들이 겪었던 세속의 고단한 삶이 오히려 구도를 향한 의지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니게>에는 다른 경전에서 보이는 신비한 영험담이나 심오한 이론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구니들이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떠한 훈계, 어떠한 교리보다도 종교적 감화력이 있다.
나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더욱 공감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 경전을 통해 나타나는 당시 인도 여성들의 삶과 정서는 옛날 우리 여인네의 그것과 유사하다. 우리 어머니들이 그러한 현실적 제약을 자식과 가족에 대한 헌신으로 승화시켰다면, <장로니게>의 비구니들은 깨달음을 향한 동력으로 활용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살아가면서 주위에 귀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 대상을 책 속에서 찾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 <장로니게>는 그런 귀감이 되는 인물로 가득 차 있는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이라는 벽에 갇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나는 이 경전의 비구니들을 만나 새로운 힘을 충전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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