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시작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김태영/聞思修법회 법사
군복무 시절, 별 생각없이 펼친 <관음경(觀音經)>이었다. 부시시한 눈을 찌를듯이 다가온, “생각생각 의심치 말라(念念勿生疑)!”는 간곡한 말씀은 한껏 부정의 논리에 익숙해 있던 당시의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다. 철책이라는 엄연한 한계상황을 긍정하여야 한다는 모순을 느꼈기에, 솔직히 말해서 샘솟듯이 치미는 의심만 더해 갈 뿐이었다. 게다가 황당(?)하리 만치 엄청난 갖가지 성취에 대한 약속들을 계속 대하다 보니, 이러다가 자칫 맹신의 길로 들어서면 어쩌나 하는 걱정마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에 대하여 부족하다는 규정을 하고 있는 한, 불만과 이에 따른 불안이 언제나 함께 하기 마련이다. 세상과 대립하고 있는 ‘나’를 중심에 두고 충족시켜야 할 조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심치 말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대하면서도, 내심에서는 전혀 의심의 자락을 거두지 않은 채로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었다. 얄팍한 문자지식 정도로 어찌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나 있었겠는가? 거듭되는 수지독송(受持讀誦)의 결과는 너무도 엄청났다. 우리네 삶의 실상은 부족이 아닌 만족, 불행이 아닌 행복임을 드러내고 있는 위대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관음경>은 굳이 현상의 무의미성을 지적하는 우회적인 표현을 빌리지 않는다. 현세이익을 직설적으로 설한다. 욕망은 버려야 할 쓰레기가 아니므로, 각자의 내면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욕망을 정면에서 응시하라고 한다. 아낌없이 내어 써야 할 생명력이므로, 참된 삶의 실상을 의심치 말고 누리고 살면 그뿐이라는 희망의 물결만이 넘실댄다.
원래 이 경전의 정식 이름은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으로, <묘법연화경>의 총 28품중 제25품에 해당한다. 관세음보살이 갖가지의 모습으로 화현하여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고 소원을 이루도록 설한 것으로 구마라집이 번역했다. 비록 하나의 품으로 자리매김되어 있지만,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간파한 옛 선지식들은 기꺼이 독립된 경전의 가치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경전의 흐름은 전(全)생명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관세음보살의 엄청난 능력에 대한 적나라한 증언으로 가득 차 있다. 때문에 보문(普門)이 뜻하는 바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열려 있는 구원의 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은 아득한 저 하늘 높은 곳에 자리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가 올 미래도 아니다. 괴로움을 싸안고 살아가는 중생들이 사는 바로 지금, 이곳에 항상 한다. 괴로워 하는 당사자는 그 괴로움의 무게에 눌려서 신음소리마저 제대로 내지 못하지만, 관세음보살에게는 걸림없이 노니는 놀이터와 다르지 않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을 석가모니부처님과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려는 시도는 망상에 불과하다. 부처님이 수행하신 내용 그대로가 관세음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므로, 여자인가 남자인가를 따지려는 시도는 더 더욱이나 소용없는 짓이다. 어떤 형상을 갖고 있든 본래부터 관세음보살이 아닌 생명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만약 한량없는 백 천 만 억의 중생들이 여러가지 고뇌를 당할 때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관(觀)하고는,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무진의(無盡意)보살에게 하신 다짐이다.
그럼 무진의란 누구인가? 다함이 없는 원대한 뜻을 품고도, 생각의 언저리에서만 맴도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름없다. 나름대로의 뜻을 갖고 있으면서도 성취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흔히들 괴롭다고 한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의 명호 즉 그 이름에 담긴 이름값을 자기화할 때, 자신의 괴로움은 온 곳 없이 사라진다. 관세음의 이름을 칭하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수행과 깨달음을 믿는 것이고, 그 가르침에 의해 구원되고 있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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