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스크랩] 42.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

수선님 2018. 12. 30. 12:33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정토삼부경의 하나로 리우쏭(劉宗)의 지앙리앙예서(彊良耶舍)가 서기 424년에 번역한 것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란 잘알다시피 똥진의 쥐에시엔(覺賢)이 빠오윈(寶雲)에서 서기 421년에 번역한 <무량수경(無量壽經)>과 쿠마라지바(Kumarajiva)가 번역한 <아미타경(阿彌陀經)>을 함께 일컫는다.
 
우리는 보통 <아미타경>은 잘 알고 있으나 <무량수경>이나 <관무량수경>에 대해서는 그리 깊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아미타경>은 경전의 분량이 지극히 짧고 내용이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미타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을 간과할 수는 없다.
 
나는 목동 법안정사에서 93년에 <아함경(阿含經)>강의를, 94년에 <정토삼부경>을, 95년에 <승만경>을 강의했다.
 
일반불자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경전을 미리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관무량수경>의 개요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끌려드는 경전의 매력, 그건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웠다세상에는 생각지 않은 일들이 곧잘 벌어지곤 한다.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련의 사건들, 아들이 아버지를 시해하고, 학생이 교수를 구타하고 하는,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터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런 때 우리 불자들에게 어떤 경을 읽게끔 할 것인가. 그래, <관무량수경>을 권해야겠다. 그렇다면 우선 <정토삼부경>을 교재로 택해야지”

 

내가 <정토삼부경>을 택하고 일요법회에 통보하자 불자들은 예상외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금강경(金剛經)>이나 <천수경(千手經)>같이 알려진 경전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정토삼부경>이냐는 것이다. 어렵게 불자들을 이해시키고 그대로 진행했다. <관무량수경>은 라자가하의 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라자가하의 왕 빔비사라와 그의 왕비 바이데히는 단 하나 밖에 없는 태자를 두었다. 태자의 이름은 아자타사트루(Ajatasatru)였다. 그런데 그 태자가 성장하여 부왕인 빔비사라를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 이때 바이데히는 부처님께 지성으로 기도하면서 이러한 일을 맞게 된 전생의 업연은 무엇이며 어찌하면 그러한 일들이 잘 해결될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으로 바이데히 앞에 나타나 여러가지로 인연을 설하고 차제에 극락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펼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리 극락세계가 찬란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면 그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이 <관무량수경>에서는 열 여섯가지 관상법을 통해 상중하의 근기들이 모두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아미타불의 이름만 부르는 것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설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관무량수경>에서도 ‘나무아미타불’의 육자진언을 염송하므로써 마침내 원왕생의 뜻을 이룰 수 있음을 설파하는 것을 빼놓지 않고 있다.
 
극락세계를 다른 말로는 정토(淨土)라고 한다. 정토란 글자 그대로 쾌적한 환경을 뜻한다. 쾌적한 환경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 마음을 텅 비우고 모두를 포용하는 데서만 가능하다.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거나 극단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면 불가능하다. <관무량수경>은 바로 그 점에 착안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포용하며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언제나 참되고 부드러운 언어를 구사하라고 가르친다.
 
특히 아자타사트루의 패역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인륜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목동 법안정사 일요법회 때마다 아름다운 눈망울을 반짝이며 강의에 열중하던 불자들의 모습을. 그렇다. 극락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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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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