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스크랩] 43. 金剛三昧經(금강삼매경)

수선님 2018. 12. 30. 12:34


경전은 길이다. 인간과 세계를 잇는 길. 그 위에는 삶의 결이 수놓여 있다.
 
내가 <금강삼매경>을 접한 것은 원효(617~686)스님을 만나면서다. 이 경은 원효의 주석서인 <금강삼매경론>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때문에 경전으로서의 정체성이 원효의 책이름 속에 묻혀버렸다. 아니 오히려 원효의 주석으로 인해 대중적인 경전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학부시절 나는 원효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금강삼매경>의 미로를 추적해 보았다.
 
도안(314~385)의 경록에는 북량(387~439)시대에 분실된 번역경이라고 하고, 승우(445~518)의 <출삼장기집>에는 이름만 있을 뿐 경전은 없어진 것으로 적혀 있다. 그 후 수나라의 세 목록이나 당나라의 여러 목록 등에도 빠진 경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위의 경전이 현존경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몇 백년이 지난 뒤 당나라 지승의 <개원석교록>(730년)에는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서 편집한다’고 하면서 현존본으로 적고 있다.
 
이 경에는 유수한 대승경론의 교설이 투명돼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북조시대에 논의된 불학의 모든 성취가 총섭되어 있다. 심지어 현장이래(645년) 신유식의 용어와 선종언어까지 등장한다.
 
<금강삼매경>은 대승논서의 문제와 의취가 드리워진 매우 철학적인 경전이다. 이 경의 성립 연기설화가 실려있는 <송고승전> ‘원효전’의 기록처럼 <금강삼매경>은 신라 왕비의 악성 종양(중생의 병)을 매개로 하여 검해(?)용왕과 편집자 대안과 주석자 원효의 세 인물에 의해 출현하고 있다. 설하고 있는 교리 역시 붓다의 가르침에 잘 부합되고 있다.
 
내가 <금강삼매경>에 끌린 것은 이 경전의 소박함 때문이다. 유수한 대승경전과는 달리 초기 경전인 <아함경>처럼 부처님의 인간적 모습이 배어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리불과 목건련 등에서 붙이는 ‘존자’를 부처님의 호칭과 지칭으로 사용하고, 법을 청하는 예의의 몸가짐을 ‘합장 호궤’로 간추려 통칭하며, 법을 묻는 보살이나 제자들을 ‘선남자여!’ 내지는 ‘보살(마하살)이여!’ 또는 ‘장자여!’로 호칭하고, 각 품마다 청(문)법자를 달리하여 정연하게 교설을 설하고 있는 점들이다.
 
이 경은 8품으로 되어 있다. ‘서품’에서는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서 대중을 위하여 일미 진실, 무생 무상, 결정 실제, 본각 이행의 가르침을 설하시고 금강삼매에 드시어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시자 아가타(無去, 滅去) 비구가 이 뜻을 밝히기 위해 게송을 읊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상법품’에는 모든 현상을 깨뜨리기 위해 모습 없음을 관하며, ‘무생행품’에서는 모든 현상을 깨뜨렸지만 관하는 마음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이 생하는 마음을 없애어 생함이 없는 행을 드러낸다. ‘본각이품’에서는 무생행이 이미 생하지 않는다면 비로소 본각을 만나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익을 얻으며, ‘입실제품’에서는 본각에 의해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 중생은 허망으로부터 실제에 든다고 설한다.
 
‘진성공품’에서는 안으로의 수행은 곧 생함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밖으로의 교화는 곧 본래 이익이자 실제에 드는 것이므로 이러한 두 이익은 온갖 행을 갖추고 동시에 참다운 성품으로 드러남을 밝힌다. ‘여래장품’에서는 이 참다운 성품에 의해 모든 행을 갖추고 여래장 일미의 근원으로 들어감을 보여주며 이미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할 것이 없고 또 하여지는 것도 없기 때문에 이 여섯 문(품)을 가지고 대승을 포섭하는 것이라고 설한다.

 

이 경은 나로 하여금 언제나 일미로 세계를 관찰하고 그대로 실행하게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상화 하지 말고 자아화 하라고 일깨운다. 동시에 원효의 앵글을 통해서 이 경전을 보지 말고 나의 눈으로 비추어 보게 한다. 깨뜨릴 수 없는 삼매 수행으로 항시 길 안에 있기를 촉구한다. 
 

고영섭/동국대 강사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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