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스크랩] 금강경6

수선님 2019. 1. 20. 12:17

 

 

금강경 제 6 :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에서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 4(第 四)와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 5(第 五)에 무슨 법문(法問)이 있었는가하면 수행(修行)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고 성불(成佛)은 무상성불(無相成佛)모양이 없는 부처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보통 보시(布施)라고 하면 복보보시(福報布施)인데, 보시(布施)를 하면 복(福)의 보답(報答)을 받는다. 이것이 복보(福報)이다. 그러니까. 내가 보시(布施)를 하면 그 보시(布施)한 보답(報答)으로 복(福)을 받고 또 보시(布施)하면 보시(布施)한 보답(報答)으로 복(福)을 받는다. 이 복보보시(福報布施)는 아주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하는 것은 바라밀보시(波羅密布施)다. 보시(布施)를 하면 그 보시(布施)한 만큼 복(福)의 보답(報答)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불(成佛)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보현행(普賢行), 보현보살(普賢菩薩)의 공덕행(功德行)인데, 그 보현행(普賢行)으로 무엇을 하는가? 이보현행오보리(以普賢行悟菩提)보현행으로 보리를 깨닫는다. 성불(成佛)을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는 것이 있는 마음으로 보시(布施)를 하면 복(福)을 받게 되는데, 바라는 것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布施)를 하면 성불(成佛) 깨달음을 이룬다. 이것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그것을 바라밀보시(波羅密布施) 저 언덕에 가는 보시(布施)라고 한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 4(第 四)에서는 그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수행(修行)을 말씀하셨고,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 5(第 五) 성불(成佛) 부처가 되는데, 보통 부처는 삼십이상 (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라고 해서 구족상(具足相)을 갖추어야 부처님이다.

 

그런데 이곳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무상불(無想佛) 형상이 없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친견(親見)할 때도 무상(無相)으로 친견(親見)한다. 구족상(具足相)도 아니고, 아무것도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유상무상(有相無相)을 초월(超越)한 그 무상(無想)으로 부처님을 친견(親見)하고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볼 때 부처님을 본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부처님을 친견(親見)할 때도 무상견불(無想見佛)을 한다. 이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보시(布施)를 할 때도 바라는 마음이 없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한다.

 

이러니까. 수행(修行)도 깊고 또 성불(成佛)도 깊어서 보통사람이 이것을 알 수가 있겠는가?이렇게 질문(質問)을 하는 것이다. 인심과심(因深果深) 인(因)도 깊고 과(果)도 깊다. 그러니 누가 이것을 알겠는가? 이렇게 질문(質問)하는 내용이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제 4(第 四)이다.

 

“바로 믿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이런 말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유는 뒤에 나온다.

 

원문을 한 번 보시면, 수보리(須菩提)야, 백불언(白佛言)하되,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을 올리되, 세존(世尊) 세존이시여! 파유중생(頗有衆生) 파유(頗有)라는 말은 진실(眞實)로 있겠는가? 이런 말인데, 한문에서는 능할 능(能)자로도 본다. ‘능히 있겠는가?’

 

중생이 득문여시언설장구(得聞如是言說章句) 여시언설장구(如是言說章句)라고 하는 것은 금강경(金剛經)에 쓰여진 경문(經文)이다. 이러한 언설(言說)의 장구(章句)를, 득문(得聞)이라고 하는 것은 ‘들음을 얻다’ 라는 말이다.

 

생실신부(生實信不) ‘실신(實信)’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眞實)한 믿음’이다. 이 ‘진실(眞實)한 믿음’을 내는 이가 ‘파유(頗有)’가 여기서 해석(解釋)이 된다. ‘정말로 있겠습니까?’ 라는 말이다.

 

‘실신(實信)’ ‘진실(眞實)한 믿음’을 내는 이가 참으로 있겠습니까?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하사되, 금강경(金剛經)에 보면,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 또는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수보리(須菩提)는 백불언(白佛言)하고,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 또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을 하시고, 따라서 부처님은 혼자만 자꾸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이 계속 나오고, 그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에 따라서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가 계속 나온다. 그런 식으로 된 경전이 금강경(金剛經)이다.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막작시설(莫作是說)하라. “이런 말을 하지 말아라”

 

막작시설(莫作是說)하라. 이 말은 ‘네, 생각이 틀렸다’ 는 말이다. 여래멸후(如來滅後) 후오백세(後五百歲), 이것은 ‘여래가 열반에 든 후 몇 천 년이 지난 뒤에도’ 그냥 ‘미래세(未來世)’에도 이 소리이다.

 

유지계수복자(有持戒修福者)하니, 계(戒)를 지키고 복(福)을 닦는 이가 있으니, ‘아무리 세월이 오래가도 계(戒)를 지키고 복(福)을 닦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계(戒)라고 하는 것은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인데, 계(戒)는 모든 악(惡)을 짓지 않고 선(善)을 행하는 것이 계(戒)다. 그런데 이 계(戒)라고 하는 것은 고통(苦痛)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래서 인간(人間)에게는 세 가지 속박(束縛)이 있다. 이것을 삼박(三縛)이라고 한다. 인유삼박(人有三縛)이라. 사람에게 세 가지 속박이 있다. 첫째는 고박(苦縛)이다. 고(苦)에 묶여 있다. 괴롭다.

 

어디에 묶여 있는가? 괴롭다. 괴로워서 몸이 아프다든지, 걱정이 된다든지, 무엇이든지, 여러 가지 괴로움이 있다. 이게 고박(苦縛)이다.

 

그 다음에는 욕박(慾縛)이다. 자기 욕망(慾望)에 묶여 있다. 그리고 근본적(根本的)인 것은 상박(相縛)이다. 이미지, 형상에 묶여 있다. 그래서 인간(人間)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 전부(全部) 형상(形相)과 욕망(慾望)에 따라 가고 있다.

 

그래서 그 결과(結果)로 고(苦)가 생기는 것인데, 생각하는 구조나 행동하는 방식을 보면, 전부(全部) 무엇을 얻기 위해서 무엇으로부터 도망(逃亡)가기 위해서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이것은 상(相)이다.

 

상(相)에 묶여 있고, 욕망(慾望)에 묶여 있고, 고통(苦痛)에 묶여 있다. 그러면 이 고통(苦痛)으로부터 벗어나는 길(道)은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고 계(戒)를 잘 지키면 고출(苦出) 고(苦)에서부터 나오게 된다.

 

선정(禪定)을 닦으면 욕출(慾出)이 된다. 욕망(慾望)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선정(禪定)을 닦지 않으면 욕망(慾望)에서 나올 길이 없다. 그래서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慾望)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또 지혜(智慧)를 닦지 않으면 이 형상(形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지혜(智慧)라고 하는 것은 택법관공(擇法觀空)이라. 법(法)을 딱 선택(選擇)해서 그것이 공함을 보는 것이 지혜(智慧)다.

 

색(色)이 공(空)함을 보는 것이 지혜(智慧)이고, 욕망(慾望)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선정(禪定)이고, 그 악(惡)을 멀리하고 선(善)을 닦는 것이 계(戒)이다. 그래서 이 삼박(三縛)이 있는데, 삼박(三縛)에서 벗어나는 길은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닦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몇 천 년 후에라도 항상 있다. 그러니까. 누가 이것을 믿겠습니까? 걱정하지 마라. 라고 하는 소리다.

 

어차장구(於此章句) 능생신심(能生信心) 이차위실(以此爲實) 이 금강경(金剛經)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서 이 말씀으로써 참다움을 삼으리라.

 

당지시인(當知是人) 마땅히 알아라. 이런 사람들은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이종선근(而種善根) 한 부처님 세계 두 부처님 세계 셋·넷·다섯 부처님 세계에서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다.

 

보시(布施), 공양(供養) 승사(承事) 이것이 선근(善根)이다. 선지식(善知識)을 잘 받들어 섬기고, 보시(布施)하고 공양(供養)하는 것이 선근(善根)인데,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세계에서 보시(布施), 공양(供養) 승사(承事)를 한 것이 아니다. 승사(承事)라고 하는 것은 ‘받들어 섬긴다’는 뜻이다.

 

선지식(善知識)을 아무리 만나고 부처님을 만났어도 승사(承事)하지 않으면 이익(利益)이 없다. 밥이 눈앞에 있어도 먹지 않으면 배가 부르지 않고 이익(利益)이 없듯이 선지식(善知識)은 받들어 섬기는 것이 중요한데, 요즘 사람들은 민주주의 발달해서 다 같이 놀자고 한다.

 

‘선지식(善知識)아 놀자’고 한다. 놀면 어떻게 될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수행인데, 선지식(善知識)하고 같이 놀다 보면, 선지식(善知識)을 자기 생각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지, 자기 생각을 변화시킬 기회가 없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일불이불삼사오불(一佛二佛三四五佛)에서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고 보시(布施)하고, 공양(供養)하고, 승사(承事)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무량천만불소(已於無量千萬佛所) 이미 무량 천만 부처님 처소에서 종제선근(種諸善根)이니, 온갖 선근을

심었으니,

 

문시장구(聞是章句), 이러한 장구(章句)의 말씀을 듣고, 내지일념(乃至一念) 내지 마지막에는 일념(一念) 일찰나 한 생각이라도 생정신자(生淨信者)니라. 청정(淸淨)한 믿음을 낼 자이니라.

 

그러니까. 앞으로 앞으로도 많은 부처님 처소에서 공덕(功德)을 닦은 분이 많으니까. 여기서 ‘공덕(功德)을 닦은 분이 많다’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지계(持戒), 공덕(功德), 지혜(知慧)을 말한다.

 

선행(善行)을 많이 닦고, 또 여러 가지 공덕(功德)을 많이 닦고, 지혜(知慧)가 아주 밝은 분들이니까. 이런 분들은 반드시 금강경(金剛經)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와 무상견불(無相見佛), 보시(布施)는 무주상(無住相)으로 하고 형상(形相)없는 부처님을 보는 이런 성불(成佛)의 참다운 믿음을 낼 사람이 있다.

 

수보리(須菩提)야, 그런데 이 금강경(金剛經) 언구(言句)에 ‘청정(淸淨)한 신심(信心)을 내는 이는 굉장하다.’ ‘무엇이 굉장하냐?’ 여래(如來)가 실지실견(悉知悉見)하나니, 그네들을 다 알고, 그네들을 다 보나니, 시제중생(是諸衆生) 이 모든 중생이 이와같이, 득여시무량복덕(得如是無量福德)무량복덕을 얻나니라.

 

‘이 금강경(金剛經)을 청정(淸淨)하게 믿는 중생들은 무량복덕(無量福德)을 얻는다.’ 앞에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하면 무량복덕(無量福德)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것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복덕(福德)이고, 여기서는 신경(信經) 복덕(福德) 경전(經典)을 믿는 복덕(福德)이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 언설(言說) 장구(章句)에 ‘청정(淸淨)한 신심(信心)을 내면 여래(如來)가 다 알고 보는데, 무엇을 다 알고 보는 걸까? 이 중생(衆生)들이 이와 같은 한량(限量)없는 무량복덕(無量福德)을 얻는 것을 다 알고, 다 보나니라.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 보기도 하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도 한다. 이것은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짐작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혜(知慧)로 보고, 지혜(知慧)로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덕(功德) 중에 무량복덕(無量福德)이 있는데, 그게 신경(信經)공덕(功德) 경전(經典)을 믿는 공덕(功德)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그런가? 앞으로 전개(展開)될 말씀은 지혜(知慧)로써 금강경(金剛經)을 믿는 것에 대한 내용(內用)을 여기서 설명(說明)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용(內用)에서는 지계수복(持戒受福)이었고, 여기서는 지혜(知慧)이다. 지혜(知慧)로써 금강경(金剛經)의 세계(世界)에 들어가는 보살(菩薩)들을 설명(說明)한다.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시제중생(是諸衆生) 이 금강경(金剛經)을 믿는 중생이, 여섯 가지가 없다. 금강경(金剛經)을 믿는 중생은 육상(六相)이 없다. 그러니 한량(限量)없는 공덕(功德)이 있다. 육상(六相)이 무엇인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나머지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 이것이 없다. 그래서 시제중생(是諸衆生)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으며, 법상(法相)이 없으며 또한 비법상(非法相)이 없나니라.’ 이것이 육상(六相)이다.

 

법상(法相)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유상(有相) ‘있다’는 것이다.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법상(非法相)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無相)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아상(我相)인데, 아상(我相)이 인상(人相)이 되고, 인상(人相)이 중생상(衆生相)이 되고, 중생상(衆生相)이 수자상(壽者相)이 된다.

 

아상(我相)이라고 하는 것은 집취자체(執取自體)라. ‘자체(自體)가 내 몸이다.’라고 집착(執着)하는 그것이 아상(我相)이다. ‘자체(自體)’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다.’ 이렇게 집착(執着)해서 취(取)한다. 이것이 아상(我相)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게 전부(全部) 숭악(崇惡)한 망상(妄相)이다. 각자(各自)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제법(諸法)인데, 제법(諸法) 뿐이지, 나(我)라고 하는 것은 없다.

 

육신(肉身)은 단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이루어진 인연가합(因緣假合)의 형상(形相)일 뿐이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에다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이게 오온(五蘊)인데, 이 오온(五蘊)이 제법(諸法)인데, 이 법(法)을 가지고 나(我)라고 하는 것이다.

 

색(色,肉體), 수(受,의식의 감수작용), 상(想,의식 개념·지각·인식작용), 행(行,受·想이외의 능동적인 심리작용, 행동적 욕구), 식(識,종합인식 활동) 이것은 법(法)이지 내(我)가 아닌데, ‘내 몸이다.’ 라고 하는 집착(執着)하는데서 고통(苦痛)이 생기는 것이다.

 

'수(受)' 이하의 4종(宗)은 마음에 관한 것으로서 '색(色)'인 육체(肉體)와 합쳐서 오온(五蘊)은 몸과 마음, 개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기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인연(因緣) 따라 된 것이라. 인연(因緣) 따라 형성(形成)되었다가 인연(因緣) 따라 해체(解體)되는 것뿐인데, 여기서 감각(感覺)을 느끼기 때문에 이 감각(感覺)에 속아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집착(執着)하니까. ‘나는 보통 다른 동물(動物)하고 다르다.’이게 인상(人相)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가 생기고 사라진다.’라고 하는 이것이 중생상(衆生相)이다. 그 다음 ‘일정 기간 동안 생명을 유지한다.’라고 하는 생각하는 이것이 수자상(壽者相)이다. 그리고 ‘이것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없는 것이다.’라고 집착(執着)하는 전부(全部)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알지 못하는 망상(妄相)이다.

 

그러니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하면 한 마디로 망상(妄相)이다. 이렇게 알면 된다. 자세히 알려고 하면 설명(說明)이 전부(全部) 달라서 한참 걸린다.

 

아무리 잠결에 근사(勤仕)한 꿈을 꾸었다고 하더라도 꿈은 꿈이듯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나라고 생각하나 전부(全部) 망상(妄相)이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깊이 믿는 사람은 이런 여섯 가지 망상(妄相)이 없다. ‘있다는 생각’, ‘없다는 생각’, ‘생명이 얼마동안 유지된다는 생각.’ 이런 것이 없다.

 

그래서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시제중생(是諸衆生) 이 모든 중생이, 약심취상(若心取相) 만약 마음에 상(相)을 취하면, 여기서 상(相)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 전체 상(相) 다 포함된다.

 

무슨 상(相)이든지 상(相)을 하나 취(取)하게 되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爲着我人衆生壽者) 곧 아인중생수자(我人衆生壽者)에 집착(執着)함이 되며, 약취법상(若取法相) 만약 법상(法相)을 또 취(取)하면,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 곧 아인중생수자(我人衆生壽者)에 집착(執着)하게 되나니라.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그러면 ‘있다’는 상(相)에 집착(執着)해서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나오는가? 그것은 아니고, 약취비법상(若取非法相) 또한 비법상(非法相)을 취(取)할지라도 ‘없다’는 생각을 일으킬지라도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 곧 아인중생수자(我人衆生壽者)에 집착(執着)하게 되나니라.

 

그러니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서는 어떤 생각(思)이든지, 어떤 형상(形相)이든지, 보면 그것은 않되는 것이다. 어떤 꿈이든지, 꿈을 꾸면 그것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듯이 꿈꾸는 순간(瞬間)에 잃어버린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든지,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瞬間)에, 또 어떤 모습이든지 그 형상(形相)에 머무르는 순간(瞬間)에 자기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 생각 좀 들어 보라.’고 하는데, 그게 들어보나 마나다. 다 흘러가는 생각이고, 쓰잘데없는 생각이다. 이것 아세요? ‘내 말 한 번만 들어 보라.’ 고 말은 생각인데, 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 이것이다.

 

또 비유(比喩)로 말하면 꿈(夢)은 무슨 꿈을 꾸어도 그것은 깨어나야 할 물건(物件)이고 대상(對象)이지, 이것을 가지고 주장할 물건(物件)은 아니다. 꿈(夢)에서는 깨어나야 한다. 이런 망상(妄相)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무슨 생각(思)을 일으켜도 그것은 망상(妄相)이다. 청정법신(淸淨法身)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상(法相)을 일으켜도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속하고, 그런데 약심취상(若心取相)이라고 하는 것은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을 다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총상(總相)이라고 하고 밑에는 별상(別相)이라고 한다. ‘만약 마음에 상(相)을 취하면’ 이것은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이 다 해당이 되는 것이고, 밑에는 ‘법상(法相)을 취하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해 집착(執着)을 하게 되나니라.

 

하이고(何以故) 왜냐하면, 약취비법상(若取非法相) 또한 비법상(非法相)을 취(取)할지라도, ‘없다’는 생각을 일으킬지라도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 곧 아인중생수자(我人衆生壽者)에 집착(執着)하게 되나니라.

 

시고(是故) 이런 고로, 불응취법(不應取法)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 그러므로 법(法)을 취하지도 말고, 불응취(不應取) 는 ‘취(取)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응(不應)’이라고 하는 것은 ‘말아라’는 소리다. ‘있다’는 것에도 취(取)하지 말고, 집착(執着)하지 말고, 또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 비법(非法) ‘없다’는 것에도 집착(執着)하지 말지니라.

 

 

이시의고(以是義故)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여래상설(如來常說) 여래가 늘 말씀하시되, 여등비구(汝等比丘) 너희들 비구는, 지아설법(知我說法) 내가 설(說)한 법(法)을, 여벌유자(如筏喩者)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라’고 하였느니라.

 

부처님의 설법(說法)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이런 것을 다 넘어 가는 것이고,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다 넘어가는 것이까. 법(法)도 취(取)하지 말고, 비법(非法)도 취(取)하지 말아라.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여벌유자(如筏喩者) ‘뗏목의 비유와 같다’ ‘뗏목의 비유’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이 교법(敎法)이 세친(世親)의 금강경론(金剛經論)이 있는데, 세친(世親)의 금강경론(金剛經論)에서 교법(敎法)의 정의(定義)를 두 가지로 내려 놓았다.

 

하나는 수순(隨順)이고 하나는 부주(不住)다. 교법(敎法)을 수순(隨順)은 따르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교법(敎法)에 부주(不住)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통(通)해서 교법(敎法)을 잘 따라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지혜(知慧)를 증득(證得)해야 한다.

 

이것을 증지(證知)라고 한다.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따르는 것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지혜(知慧)를 증득(證得)하기 위한 것이다. 이게 수순(隨順)이다. 그러면 증득(證得)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증지사교(證知捨敎)지혜를 증득하면 교(敎)를 버린다. 이것을 증지사교(證知捨敎)라고 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잘 따라서 실천(實踐)하는 것은 지혜(知慧)를 내가 얻기 위해서다. 증득(證得) ‘내가 얻는다’는 말이다. 지혜(知慧)를 얻기 위해서 실천(實踐)한다.

 

그러면 지혜(知慧)를 얻은 다음에는 사교(捨敎)를 한다.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버린다고 한다. 이것이 부주(不住)이다. 그리고 지혜(知慧)를 증득(證得)하는 것은 수순(隨順)이다. 이것을 비유(比喩)로 말하면 여벌유자(如筏喩者) ‘뗏목의 비유와 같다’ 고 한다.

 

뗏목이 왜 필요한가? 고해(苦海)의 물을 건너가기 위해서 필요하다. 지혜(知慧)를 증득(證得)하기 위해서 교법(敎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뗏목(배)을 타는 뜻은 피안(彼岸)에 가기 위해서 타는 것이다.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배우는 것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지혜(知慧)를 증득(證得)하려고 교법(敎法)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증지(證知)를 한 다음에는 교법(敎法)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교(捨敎)를 한다. 교(敎)를 버린다.

 

피안(彼岸)에 다 건너 갔으면 뗏목은 필요가 없다. 그래서 승선도하(乘船渡河) 뗏목을 타고 물을 건너 간 다음에는 피안사벌(彼岸捨筏) 피안에 이르러서는 뗏목을 버린다. 여벌유자(如筏喩者) 이 말이 뗏목의 비유이고, 마지막 결론이 다음과 같다.

 

법상응사(法尙應捨) 하황비법(何況非法) 법(法)도 응당히 버리는데, 하물며 비법(非法)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법(法)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법(法)도 버리는데, 비법(非法)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을 구하고 나쁜 것을 버리는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법(法)도 버리는데,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은 무엇인가?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이라고 하는 것은 좋다고 구했는데, 나중에 보면 고통(苦痛)이다. 반갑다고 만났는데 나중에 보면 싫어진다. 이게 다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이다.

 

그래서 중생(衆生)의 고통(苦痛)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좋다고 구하는데서 꼭 온다. 좋다고 구하지 않았으면 절대 고통(苦痛)이 없다. 이게 전부(全部)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이다. 천당(天堂)이라고 올라 갔는데 복(福)이 다 떨어지니까. 다시 지옥(地獄)으로 갔다. 이것이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이다.

 

높은 곳이라고 해서 올라 갔는데 올라가서 보니까. 춥기만 하고 외롭기만 하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 올려고 하니까 애(碍)먹고 고생(苦生)한다. 이것이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이다.

 

그래서 중생(衆生)은 좋다고 구하다가 괴로워지는 것, 상(相)에 쫓아가다가 고통 받는 것, 이것이 상박(相縛)이고, 고박(苦縛)이고, 욕박(慾縛)이다. 세 가지 속박(束縛)이다. 이것을 삼박(三縛) 인유삼박(人有三縛)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법(法)에 의해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지혜(知慧)를 증득(證得)한 다음에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교법(敎法)도 버리는데, 다른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 흥망성쇠법(興亡盛衰法) 이런 허망(虛妄)한 그런 법(法)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쭉 보면 이런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부처님 경전(經典)은 이게 물을 건너가는 뗏목(筏)과 같은 것이다. 뗏목(筏)이라고 하는 것은 뗏목(筏)을 타(乘)는 것에 목적(目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저 피안(彼岸)에 도달(到達)하는 것에 목적(目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안(彼岸)에 도달(到達)하면 이 교법(敎法)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부주(不住)이다. 그런데 피안(彼岸)에 도달(到達)하기 전까지는 뗏목(筏)이 필요하다. 이게 수순(隨順)이다.

 

그러면 피안(彼岸)에 도달(到達)도 않했는데, 처음부터 뗏목(筏)을 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못건너 간다. 완전히(完全) 버리는 것이 아니고, 일단 건너간 다음에 버리는 것이다. 전기(全棄)가 아니라 부주(不住)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부주(不住) 머물지 않게 되기 전까지 그 이전(以前)에는 수순(隨順)을 해야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경전(經典)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개념(槪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지혜(知慧)를 얻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저 달(月)을 가리키는 손가락(指)이다.’ 라고 한다. 그러면 이 손가락에 따라서 수순(隨順)하여 달(月)을 본다. 이것이 증지(證知) 지혜(知慧)를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그러면 견월망지(見月忘指)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은 잊어 버린다. 이것이 부주(不住)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수순(隨順)과 부주(不住)가 있다. 이것은 딱 법칙(法則)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교법(敎法)에 따라야 되고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교법(敎法)에 머물지 않는다. 피안(彼岸)에 건너갔으면 뗏목(筏)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전(經典)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논리(論理) 개념(槪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절대(絶對) 아니다. 바로 지혜(知慧)를 얻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부(全部)가 ‘방(室)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鍉鍵)와 같다.’

 

이게 바로 열쇠(鍉鍵)다. 불응취법(不應取法)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 이게 열쇠(鍉鍵)다. 그래서 이런 열쇠(鍉鍵)를 하나 주면 그 열쇠(鍉鍵)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열쇠(鍉鍵)하나 받았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애지중지(愛之重之) 가지고 있어 봐야 소용(所用)없다.

 

열쇠(鍉鍵)를 준 것이 아니라 방(室)을 준 것이다. 그 열쇠(鍉鍵)로 잠금장치(裝置)를 열고 방(室)에 들어간다. 그래서 방(室)의 세계(世界)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고, 그것은 방(室)을 준 것이지, 열쇠(鍉鍵)를 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잘못 알고 나면 열쇠(鍉鍵) 하나 받았다고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방(室)은 구경(求境)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순(隨順)과 부주(不住)가 아니다. 그러나 방(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열쇠(鍉鍵)가 필요하다.

 

달을 보기 전까지는 손가락이 필요하고 그래서 달을 본 다음에 손가락을 잊어야지 달도 보기 전에 손가락을 잊어버리면 달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경전(經典)이라고 하는 것은 밥(米)과 같다.

 

밥(米)을 한 그릇 주면 그것은 밥(米)을 준 것이 아니라 몸(身)을 준 것이다. 그래서 그 밥(米)을 먹으면 그 밥(米)은 몸(身)이 된다. 그런데 밥(米)을 아무리 줘도 먹지 않고 가만히 놓아두면 그냥 밥(米)일 뿐이다. 소용(所用)없다. 먹지 않는 밥(米)은 소용(所用)이 없다.

 

그러면 밥(米)을 다 먹으면 밥그릇을 다 치워야 된다. 밥(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밥(米)은 다 소화(消化)되어서 몸(身)이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먹은 다음에 밥그릇을 다 치워야지, 먹지도 않고 치우면 어떻게 되는가? 소용(所用) 없는 것이다.

 

이렇게 수순(隨順)과 부주(不住) 수순(隨順)은 하되 머물지(不住)는 않는다. 따르기는 따르되 거기에 머물지는 않는다. 이것이 경(經)이다. 그래서 증지사교(證知捨敎)라고 한다. 증지사교(證知捨敎)지혜를 증득하고 교(敎)를 버린다.

 

이것이 법상응사(法尙應捨) 하황비법(何況非法)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법(法)도 지혜(知慧)를 증득(證得)한 다음에는 오히려 버리는데, 생노병사(生老病死) 생사윤회법(生死輪回法), 흥망성쇠법(興亡盛衰法)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무엇을 취(取)할 것이 있겠는가? 법(法)도 응당히 버리는데, 하물며 비법(非法)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라고 하는 말씀이다.

 

불교(佛敎)가 어렵다고 이야기 하는데, 불교(佛敎)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일반 대중(大衆)의 생각이 비불교(非佛敎)적 이라서 그렇다. 우리 생각이 불교적(佛敎的)이 아니기 때문에 기 불교(佛敎)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이렇다. 우리가 보통(普通) 무슨 공부(工夫)를 한다든지, 어떤 노력(努力)을 한다고 하면 그것에 대한 무엇을 ‘알아내고’, ‘이루어 내는’ 이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알아내는 것’, ‘내가 이루어 내는 것’ ‘아! 내가 무엇을 해냈다.’ ‘무엇을 이루었다.’, ‘성취감이 있다.’ 이런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룬 것이 내일쯤 가면 변하고 시원치 않아진다. 그래서 이룩(成就)하고 달성(達成)해도 계속 부족(不足)해서 계속 이루어야 된다. 이것이 괴로움이고 고(苦)다. 알아도 오늘 안 것은 내일쯤 가면 또 달라진다.

 

내가 보니까. 어렸을 때 내가 안 것들은 오늘 날 다 틀리거나 상당부분 달라졌다. 또 자기가 안 것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또 다르거나 틀린다. 그래서 며칠 전에 약속을 하나 했다. ‘교보문고에서 만납시다.’ 이렇게 하고는 나는 강북(江北)에 있는 교보문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電話)를 해보니까. 자기는 강남(江南)에 있는 교보문고 앞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강남(江南)에도 교보문고가 있느냐?’ 고 물었다. 강남(江南)에 교보문고가 있는 줄 몰랐다. 그러니까. 자기가 아는 것, 그것뿐이다. 그 이상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업식(業識)이라고 하는데, 요즘 말로 표현(表現)하면 경험정보(經驗情報)다. 자기 경험(經驗)에 의해서 쌓인 정보(情報) 그것만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생(衆生)의 경험정보(經驗情報)는 전부(全部) ‘알아내고’, ‘이루어 내는’ 이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행복(幸福)을 얻으려고 하니, 알고 알아도 만날 없어지고, 이루고 이루어도 만날 없어지니까. 알려고 하면 알려고 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고, 이것은 실제(實際)다. 공부(工夫)하려고 하면 전부(全部)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편하게 살려고 하면 절대(絶對) 공부(工夫)해서는 않된다. 공부(工夫)하려고 하면 전부(全部) 모르는 것만 나온다. 이루려고 하면 이뤄도 이루어도 만날 부족하니까. 편하게 살려고 하면 이루려고 하지 말아야 된다.

 

다 이루고 만족한 사람은 영원히 없다. 그런데 금강경은 그게 아니다. 어떤 생각(思)이든지, 생각 그 자체(自體)를 비우는 것이다. 이것을 무념(無念)이라고 한다. 무슨 선(善)한 생각이든지, 어떤 악(惡)한 생각이든지, 마찬가지다.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무슨 죽겠다는 생각, 살겠다는 생각을 싹 다 비우는 것이다. 이것이 무념(無念)이고, 식심(息心) 마음을 쉬는 것이다. 여기에 활로(活路)가 있고, 여기에 해탈(解脫)이 있는 것이다.

 

무념(無念)의 해탈(解脫)이지, 무념(無念)이 되지 않고서는 해탈(解脫)은 없다. 만날(每日) 자기(自己) 생각에 자기(自己)가 묶여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하는 것은 무념(無念)이다.

 

그러면 무념(無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상관(無相觀)이다. 제상비상(諸相非相)이다. 상(相)에 상(相)이 없다. 이것을 관찰(觀察)하는 무상관(無相觀) 수행(修行)이 있다. 이것을 무상삼매(無相三昧)라고 한다.

 

금강경(金剛經) 저 뒤에 보면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에서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다 그게 바로 상(相)이 상(相)이 아니라는 것은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무주심(無住心) 머물지 않는 마음이다. 머뭄이 없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보든지, 좋게 본다든지, 나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애증심(愛憎心)을 가지고 보지 않는 그것이 무주심(無住心)이다.

 

그리고 무착행(無着行) 무엇이든지,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 바라는 마음이 없이 행하는 그것이 무착행(無着行)이다. 이것이 무념(無念)을 수행(修行)하는 방법(方法)이다. 무상관(無相觀)을 닦고, 무주심(無住心)을 닦고, 무착행(無着行)을 닦으면, 그것이 무념(無念)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야부송(野夫頌)이 있는데, 야부송(野夫頌)에서도 ‘오직 무념(無念)으로 돌아가면 비로자나 부처님의 정상(頂上) 위에 마음대로 활보(闊步)하고 다닌다’고 게송(偈頌)으로 읊었다. 무념(無念)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衆生)이 무엇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自己) 욕망(慾望)에 더 묶여서 않되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묘법(妙法)이다. 그러니까. 불교(佛敎)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평소(平素)의 생각이 불교(佛敎)적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 뿐이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면 다 된다. 무착행(無着行)을 가지고 세상(世上)을 살아 가다보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저 좋은 것이다. 좋은 것 뿐이지, 나쁜 것은 없는 것이다. 오래 오래 살던 남편이 당신하고 그만 살고 다른 여자한테 살러 간다. 이렇게 해도 무착행(無着行)을 닦는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은 어떻게 하는가?

 

‘안녕히 가십시오.’ 이것이 무착행(無着行) 보살(菩薩)이다. 왜냐하면 남편과 같이 살아도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것도 있는데, 무슨 상관(相關)이 있는가? 아내가 잘못을 해도 ‘감사합니다.’ 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무착행(無着行) 보살(菩薩)이다.

 

그리고 누가 먼저 세상(世上)을 떠나도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게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보내 드리고 자기(自己) 공덕(功德) 계속 닦고, 그래서 공덕(功德)만 닦되, 바라는 마음은 일체(一切)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이 무착행(無着行)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성불(成佛)을 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무념(無念) 수행(修行)인데, 무념(無念) 수행(修行)은 무상삼매(無相三昧)다. 무상관(無相觀), 무주심(無住心), 애증심(愛憎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떠난다고 해서 미워하고 찾아온다고 좋아하는 이것은 무착행(無着行) 보살(菩薩)이 아니다. 그저 생사윤회(生死輪回) 범부(凡夫)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공덕(功德)은 열심히 닦되, 절대(絶對)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라고 한다.

 

바라는 마음을 자꾸 일으키다 보면 자기(自己) 욕망(慾望)이 자기(自己)를 괴롭힌다. 하루 종일 남편을 위해서 좋은 일을 했는데, 칭찬(稱讚)을 받고자 하는 욕망(慾望)이 일어나서 그 욕망(慾望) 때문에 남편이 미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칭찬(稱讚)을 받고자 하는 욕망(慾望)을 비우고 하루 종일 좋은 일을 하고 그 이튿날도 좋은 일을 하면 완전(完全) 보살(菩薩)이다. 이렇게 하면 성불(成佛)한다. 바라는 마음만 없으면 바로 성불(成佛)을 한다. 성불(成佛)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라는 마음 때문에 성불(成佛)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마치겠습니다.

 

 

 

 

 

 

 

 

 

 

 

 

출처 : 수보리
글쓴이 : 원종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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